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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한테 사과는 하고 있는데, 엉뚱한 사과를 하고 있다. '가로채고 착취해서 미안해'라고 사과해야 하는데, 고작 '갑질해서 미안해' 정도로만 사과하고 있다. 

한진그룹과 한화그룹을 포함해, 갑질 문제로 사법기관에 출석하는 재벌 측 가해자들은 한결같이 죄송하고 송구스럽단 말을 하고 있다. 그들의 사과는, 사회적 지위를 악용 혹은 남용해 세상을 불편하게 한 점에 대한 사과다.

하지만 그들이 꼭 해야 할 사과가 고작 그 정도에 그치지는 않는다. 진짜 해야 할 사과는, 국민들의 것을 가로채고 착취한 점에 대한 사과다. 그들이 낮은 임금으로 대중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도 모자라, 정권과 유착해 국민의 세금과 재산에까지 손댔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재산을 불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재산을 불리는 과정에서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다. 재벌이라고 할 만한 규모의 재산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도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 재벌이 생성되는 과정에서부터 태생적 하자'가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모태 하자'가 있었던 셈이다.

그런 일이 영국 역사에서는 인클로저 운동(Encloser Movement)이란 이름으로 있었다. 농민들의 경작지, 특히 공유지를 불법 강탈하는 방법으로, 영국 기업인들의 자본 축적이 진행됐던 것이다. 그렇게 강탈된 농토는 목초지로 바뀌고, 이를 기반으로 양모 산업과 모직물 산업이 발달했다. 목초지를 만들 목적으로 기존 농토에 울타리를 쳤다(enclose)고 해서 인클로저 운동이라 불린다.

강제로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흘러가 노동자가 됐다. 인클로저 운동이 영국 기업인들에게 자본과 노동력을 공급하는 발판이 됐던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악랄했던지 1489년에, 그러니까 조선에서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이 왕이었을 때, 영국왕 헨리 7세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법령 조문에서 언급했을 정도다.

"수많은 농장과 가축, 특히 양이 소수인의 수중에 집중되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경작이 크게 쇠퇴하고 교회와 가옥들이 파괴됐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계유지에 필요한 수단을 빼앗겼다." 
인클로저 운동 때 사용된 울타리.
 인클로저 운동 때 사용된 울타리.
ⓒ 위키백과 영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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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재산을 가로채 부를 축적하는 대규모 현상이 불과 70년 전 대한민국에서도 있었다. 소수가 대중의 것을 가로채는 일은 어느 시대나 있었지만, 불과 70년 전에는 이 일이 아주 '대규모로' 벌어졌다.

일제강점기에 한국 땅에서 두각을 보인 기업의 대부분은 일본인 소유였다. 한국인 기업도 있었지만, 미미한 편이었다. 그래서 산업자본 대부분은 일본인 것이었다.

1987년 제정된 현행 대한민국 헌법은 전문(서문)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법률도 대한민국 법률체계에서 효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 임시정부가 1941년 11월 28일 발포한 건국강령 제3장 제6조 '나'항은 일본인 소유 재산에 대해 이렇게 규정했다.

"적이 빼앗거나 설치한 관·공·사유 토지와 어업·광산·농림·은행·회사·공장·철도·학교·교회·사찰·병원·공원 등의 방산과 기지와 기타 경제·정치·군사·문화·교육·종교·위생에 관한 일체의 사유 자본과 부역자의 자본 일체와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

일본인과 친일파의 소유물은 총독부 소유이건 개인 소유이건 무조건 몰수해 국유화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국유화한 뒤에 국민 대중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은 위 조문의 '다'항이다.

"몰수한 재산은 가난한 노동자, 가난한 농민과 재산 없는 자의 이익을 위한 국영 혹은 공공의 집단 생산기관에 제공함을 원칙으로 함."

하지만 해방 뒤 이 법률은 지켜지지 않았다. 1945년 9월부터 이 땅을 지배한 미 군정이 친일파만 살려준 게 아니다. 친일파 재산과 일본인 재산 즉 적산(귀속재산)이 반대편 수중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일도 해줬다. 친일파는 살려주면서, 적산을 친일파 아닌 쪽에 넘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사회적 권력은 돈에서 생기는데, 친일파 아닌 쪽에 돈을 넘기면서 친일파를 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친일파 아닌 쪽에 적산이 넘어가지 않도록 미군정이 어떤 고안을 했는지에 관해,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대우교수 등을 지낸 안치용의 <한국 자본권력의 불량한 역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 군정의 귀속재산 처분이 연고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원래의 일본인 소유자에게 재산관리를 위임받은 사람들이 거의 귀속재산의 주인이 되었다. 따라서 미군정이 처분한 일본인들의 재산은 대부분 친일 성향을 지녔던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렇다 보니, 반미 혹은 반일 성향을 가진 기업인은 적산을 인수하기 힘들었다. 이런 가운데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적산이 사실상 헐값에 임의로 분배됐다.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가치가 급락하는 속에서 해방 이전 가격으로, 그것도 장기할부로 적산을 인수하도록 해주었다. 사실상 무상분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미·친일 성향의 그들은 국가가 서민 대중한테 무언가를 무상분배하려 하면 포퓰리즘이니 빨갱이니 하는 말을 하지만, 실상은 그들이 사실상 무상분배의 최대 특혜자였다. 

미군정청이 사용한 중앙청 건물. 총독부가 사용했던 건물로 지금의 광화문 안쪽에 있었다.
 미군정청이 사용한 중앙청 건물. 총독부가 사용했던 건물로 지금의 광화문 안쪽에 있었다.
ⓒ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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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정의 적산 처리는 한민족 전체의 재산을 임의로 가로채는 행위였다. 임시정부 건국강령에 따라 그 재산은 "가난한 노동자, 가난한 농민과 재산 없는 자의 이익을" 위해 쓰일 예정이었다. 그런데 미 군정은 이런 재산을 가로채, 자신들과 가까운 기업인들에게 사실상 무상분배로 불하해줬다. 정권과의 유착을 통해 이런 재산을 잘 챙기고 잘 지켜낸 집단이 지금의 한국 재벌들이다.

적산 기업의 불하가 한국 재벌의 재산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은 2007년에 <경영사학> 제22집 제1호에 실린 이한구 수원대 교수의 논문 '귀속기업 불하가 재벌 형성에 미친 영향'에서도 강조됐다. 이 논문은 "대부분의 주요 재벌들은 최소한 1, 2개 정도의 귀속 기업체를 현재 계열사로 확보하고 있다"면서 재벌 기업들의 구체적 사례를 거론한 뒤 이렇게 말했다.

"재벌들 또한 귀속사업체의 경영을 통해 재벌의 몸집을 부풀린 것으로 추정된다. 귀속재산 불하가 우리나라 재벌 형성의 중심축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해직 기자의 대부이자 한국 언론의 사표로 불리는 송건호의 <송건호 전집 7권>에 이런 대목이 있다.

"미 군정 3년간에 특이한 사항은 식민통치시대 전(全)한국 산업자본의 98%, 전 자산의 약 80%에 달하는 일본 재산이 적산으로서 귀속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엄청난 귀속재산이 군정 동안에 주로 친일 기회주의자들 손에 불하되었다."

해방과 함께 우리 국민들이 공유했어야 할 산업자본의 98%, 재산의 80%가 미 군정에 의해 임의로 처리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처리된 재산의 상당 부분이 현존하는 재벌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우리 국민들이 공유하고 있거나, 아니면 국민들의 뜻에 합당하게 처분됐어야 할 재산들이 이렇게 불법적이고 부당하게 처리됐던 것이다.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재벌이 된 게 아니라 국민의 것을 가로채서 재벌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돈을 갖고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이 국민들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면, 한진그룹 일가나 한화그룹 일가가 하는 것 같은 사과를 해서는 안 된다. 때리고 던지고 비행기 돌리는 갑질을 해서 죄송한 게 아니라 국민의 것을 임의로 가로채서 죄송하다는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이다. 재벌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대해 사죄해야 하는지를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태그:#재벌 갑질, #적산 불하, #귀속재산 불하, #인클로저 운동, #자본의 시초 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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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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