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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선생님은 항상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바보온달', '나무꾼과 선녀', '콩쥐팥쥐' 이야기도 그렇게 시작하셨고, 곰이 동굴에서 100일 동안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됐다는 '단군할아버지' 이야기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과학이 뭔지도 모르고, 생물이 뭔지도 모르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됐다는 게 정말 희한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던 시절, 우리나라가 처음 만들어지던 때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심이었기에 그랬을 겁니다.

중학생이 돼서야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됐다는 이야기가 '단군신화'였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춘기에 눈 뜨던 시절이어서 그런지 그때는 신화조차 다큐로 읽었습니다. 희한하지만 재미있었던 이야기, 다큐로 읽는 단군신화는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 그 자체였습니다. 

호랑이와 곰이 한 곳에 살았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곰이 사람이 됐다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거짓으로 읽혔습니다. 그리고 일 주일, 한 달, 일 년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100일이라고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도 생겼습니다.

신화와 역사가 만나는 우리 신화 읽기 <신화는 두껍다>

<신화는 두껍다> / 지은이 김진섭 / 펴낸곳 지성사 / 2018년 4월 25일 / 값 35,000원
 <신화는 두껍다> / 지은이 김진섭 / 펴낸곳 지성사 / 2018년 4월 25일 / 값 35,000원
ⓒ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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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두껍다>(지은이 김진섭, 펴낸곳 지성사)는 암흑에서 천지가 개벽하는 개국신화를 시작으로 단군, 주몽, 박혁거세, 김수로 등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신화적 영웅들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백제의 건국시조였으나 오랜 시간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온조, 뛰어난 책략으로 이주민에서 왕의 자리까지 오른 신라의 탈해까지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화에서조차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시각인 탓에 알게 모르게 소외되거나 가려져 있던 유화, 알영, 소서노, 허황옥 등 여성 인물들과 관련한 이야기까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읽어도 다큐로 읽는 신화는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할 뿐입니다. 하지만 신화가 담고 있는 의미와 상징, 행간과 이야기 속에 은밀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복합적인 의미까지를 알게 되면 신화 속 숫자 하나, 신화에 등장하는 어떤 이름이나 장소 하나 하나가 품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다큐를 뛰어넘는 무거운 감동으로 읽혀집니다.

환웅이 제시한 100일과 곰이 실천에 옮긴 기간이었던 3·7일, 즉 21일 역시 단순히 물리적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성·종교성·사회성·문화성 등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100일과 3·7일은 생명체의 탄생과 관련하여 우리 고유의 민간신앙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100년 묵은 용이 승천한다'거나 '100년 묵은 여우가 자유자재로 연신하는 이야기' 등에서 100은 완전성과 영원성을 뜻하는 상징수였다. 그리고 부모의 100일 기도 끝에 영웅이 탄생했다거나 사람이 죽은 후 백일재를 지내는 풍습 등에서도 100에 사람의 탄생이나 죽음이 비로소 완결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 <신화는 두껍다>, 75쪽


오늘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대개의 신화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을 거쳐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동안 보태지거나 조금은 뒤틀어지며 빠진 이야기도 있을 수 있고, 기록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축소되거나 생략되는 부분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은유로 전해지던 비밀스런 이야기, 행간에 숨겨진 비유로 은밀하게 표현하였던 뜻들이 글로 박제화 돼 읽히게 되면서 신비스럽게 품고 있던 신화적 의미, 향기처럼 풍기고 있던 상징까지 한낱 허구성 진한 옛날이야기 쯤으로 읽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책에서는 고분을 발굴해 보존처리를 하고 복원작업을 하듯 신화를 발굴해 신화에 담겨 있는 의미를 밝혀냅니다.

허황옥, 인도 출신 아닌 중국 출신

남해 금산에 있는 보리암엘 가면 옛날 인도 월지국에서 온 허태후(허황옥)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이 보리암에서 기도를 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허황옥, 가락국의 초대 왕인 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은 인도에서 온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책에서는 허황옥이 인도 출신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관련 기록을 전거로 한 합리적인 추론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허황옥의 출신지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추론이 가능하다. 먼전 석 달 이내의 항해기간과, 가락국과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허황옥 일행은 낙랑이나 중국을 통해 들어온 유이민이었을 가능성도 있다.(중략)

그럼에도 그녀가 스스로를 아유타국 출신이라고 말한 것은 허황옥과 그녀의 가족 또는 그녀의 조상들이 어느 시기에 고향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에서 해상무역에 종사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또는 아유타국이란 지명은 신화적 요소를 강화하기 위한 장치로도 볼 수 있다. - <신화는 두껍다>, 489쪽


사람 얼굴에 물고기 몸을 하고 있는 하백, 하백의 세 딸 중 첫째 딸인 유화를 납치 해 주몽을 낳은 하모수. 하백과 하모수가 잉어와 수달, 사슴과 늑대, 꿩과 매로 변신하며 일합을 겨루는 싸움, 입술의 길이가 석자나 되도록 입을 늘렸다는 신화 속 이야기들은 신화에서나 읽을 수 있는 황당무계한 허구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토록 황당무계한 허구에 스며있거나 행간에 드리워있는 의미와 상징까지를 알게 되면 신화에서 역사가 시작되고, 역사의 뿌리가 신화에서 발아했음을 스스럼없이 삭일 수 있게 될 거라 생각됩니다.

신화와 역사가 만나는 우리 신화는 두께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두껍지만, <신화는 두껍다>를 통해 읽어 들이는 우리 신화는 깊지만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처럼 투명하게 드러나는 또 다른 역사라는 것을 느끼게 될 거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신화는 두껍다> / 지은이 김진섭 / 펴낸곳 지성사 / 2018년 4월 25일 / 값 35,000원



신화는 두껍다 - 신화와 역사가 만나는 우리 신화 읽기

김진섭 지음, 지성사(2018)


태그:#신화는 두껍다, #김진섭, #지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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