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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나는 덤세트(dumb set) 일원이었다. 남의 학교 운동장에서 "니가 길을 잘 못 알려줬네", "그것도 못 찾은 니가 바보네"를 가지고 서로가 바보라며 싸우는 나와 친구를 보고 선배들이 지어준 별명 'dumb & dumber'. <덤앤더머>라는 영화가 개봉한 지 몇 년 흐른 뒤였지만 우리 행동은 영락없는 덤 앤 더머였다.

그 와중에 더머보다는 나아보이겠다고 난 덤을 맡았다. 이후 우리 둘 외에 바보 같은 아이들이 하나 둘 늘었다. 선배 언니 꼬임에 9박 10일 농활을 오게 된 친구는 밭일을 하며 '궁시렁'대다 '궁시렁'이란 별명과 함께 더머 자격을 부여받았다. 최초 더머는 더미스트로 승격했다. 우리 셋을 보며 가장 똑똑하고 정상인 척하던 친구는 농활에서 밭을 매다 침 흘리며 조는 사건으로 '에일리언'이란 별명과 함께 킹덤 자리에 올랐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덤세트는 어느 덧 불혹을 지나 중년에 들어섰다. 생일 챙기는 일도 시시해지고, 아이 낳고 사느라 바빠 못 만나는 친구들도 많은데 최근 덤세트는 연 4회 모임을 하고 있다. 각자 생일에 맞춰 만나는 모임이다. 서울 강북 끝 쪽에 사는 더미스트, 성남에 사는 더머와 킹덤, 경기도 남쪽에 사는 덤이 모이기 위해선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생일쯤은 돼야 마다 않고 만날 수 있다.

이번 5월에는 더머가 생일이다. 작년에 10년 넘게 다니며 3권의 책을 쓰고 이사직에 있던 회사를 그만두고 수의대에 편입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더머에게 정당한 이유를 가진 외출은 소중했다. 덤세트 4인은 카톡 방에서 진지하게 생일파티 장소를 공모했다.

더머: "놀아본 자들이 정하시게~"
킹덤: "나 집순이야."
더미스트: "요즘 집에서 책만 읽고 관계를 끊었더니 모르겠다."
덤: (말하지 않아도 육아로 집콕임을 모두 인지하고 있음)
더미스트: "이태원 어때?"
덤: "무서워."
더머: "뭐가 무서워?"
덤: "외국인 남자들."
더미스트: "야, 한국 남자가 더 무섭다."

외국인 남자가 무섭다는 내 발언은 킹덤에게 상처가 됐다. 킹덤 남편이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실수를 알아차리고 개인톡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성격 좋은 킹덤은 이런 발언이 심화되면 혐오일 수 있다며 조언을 해주고 이해해주었다.

다른 친구는 내게 개인톡으로 "왜 이태원과 외국인 남자들이 무섭냐"며 진지하게 물어왔다. 질문을 받고 나니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림책 <곧 이방으로 사자가 들어올거야>가 생각났다.

어느 날 사자가 방에서 나간 뒤, 호기심 많은 소년이 사자의 방에 들어간다. 문밖에서 소리가 들리자 소년은 사자가 돌아온 줄 알고 얼른 침대 아래에 숨는다. 하지만 방에 들어온 건 또 다른 소년이다. 두 번째 소년도 문밖에서 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 천장의 전등으로 재빨리 도망간다. 정작 방에 들어온 건 소녀였고, 이후 개와 새들이 차례로 사자의 방에 들어설 때마다 모두 사자가 돌아온 줄 알고 두려움에 벌벌 떤다. 그리고 사자가 정말로 방에 들어온다. 사자도 자기 방이 왠지 낯설게 느껴져 겁에 질린다.

<곧 이방으로 사자가 들어올거야> 그림책은 단순한 줄거리로 된 책이다. 사자의 방에 누군가 들어오고 소리가 난 뒤 숨는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두려움은 점차 심화되고 방안은 두려움에 떠는 등장인물로 가득 찬다. 두 명의 소년과 소녀, 개와 새들로 가득한 방에 마지막에 사자가 들어온다. 숨어 있는 존재를 사자가 발견하게 될까봐 조마조마하다. 그런데 사자마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방안에 있는 모든 존재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독자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자가 들어올까봐 긴장을 하다 마지막 순간 이들이 왜 두려워하고 있는지 의아해하며 자신이 느꼈던 두려움에 의문을 갖게 된다.

판화로 제작된 그림의 단순한 선과 색이 선명한 줄거리와 잘 어울린다. 방안을 확대해 화면을 채우고 숨어 있지만 전혀 숨어 있는 것 같지 않은 등장 인물을 보며 웃음짓게 된다. 웃음과 긴장을 동시에 주는 이 그림책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 잡힌다. 왜 두렵냐고 물어보면 바로 대답을 못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실체 없는 두려움은 없다. 이 그림책에서도 등장인물들이 두려워하는 건 '사자'다. 사자와 마주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숨는 거고 그 가운데 긴장과 두려움이 생긴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존재와 마주치려는 용기를 내어 숨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외국인 남자가 무섭다'는 내 두려움을 들여다봤다. 보통 백인 외국인에게는 호감을 가지고 흑인에게 두려움을 갖는다는 데 그런 건가? 아니었다. 내 두려움은 고등학교 시절 이태원에 피자 먹으러 갔다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친구와 함께 이태원에 갔다  우리 동네에도 피자헛이 있었지만 이태원 피자헛 피자가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찾아나선 길이었다. 오후 4시쯤 도착한 것 같은데 2시간을 대기해도 우린 자리를 잡지 못 했다. 주방에 문제가 생겼는지 겨우 자리를 안내 받은 후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얇은 씬 피자가 서비스로 나왔다.

우리가 주문한 피자는 좀더 걸린다고 했다. 두툼한 피자를 맛보러 갔지만 이게 웬떡이냐 하는 마음으로 서비스 피자만 먹고 샐러드와 음료값을 계산하고 나왔다. 바깥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그때 길거리를 지나가던 외국인 남성들이 술병을 들고 소란을 피우다 병이 깨졌다. 친구와 난 겁을 먹고 길 가장자리로 조심스레 피해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이제는 희미해서 잘 기억도 안나는 일이 '외국인 남자가 무섭다'는 툭 튀어나온 말에 의해 소환됐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이태원이라는 곳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만들어줬다. 만일 인사동에서 만나자고 했다면 외국인 남자가 무섭다는 말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들여다본 뒤 두려움의 실체를 알게 됐지만 마주칠 용기는 생기지 않는다. 어떻게 맞서야 할지 모르겠다. <곧 이 방으로 사자가 들어올거야> 책의 등장인물들도 나처럼 두려움의 실체와 맞설 방법을 몰라서 숨었던 것 같다.

살면서 불안하고 두려운 감정이 올라 올 때가 있다. 이 감정들을 부정하고 숨는 것보다 맞서다 보면 그만큼 성장하게 된다. 특정 사건 때문에 외국인을 두려워하는 건 엄밀히 말해 9.11 테러 이후 아랍인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트라우마가 있다고 해서 편견을 가진 시선이 정당성을 갖는 건 아니다. 내 두려움의 실체는 선입견에 의한 잘못된 시선이면서 극복해야할 트라우마이자 여러 가지가 엉켜있는 복잡한 실타래다.

아직은 두려움과 편견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모르겠다. 이 감정이 복잡하고 불편한 것이라는 걸 바라보는 데 까지만 왔다. 불편하더라도 불편한대로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까지가 이번에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하면서 얻게 된 소득이다.


곧 이 방으로 사자가 들어올 거야 - 2015 볼로냐 국제 어린이 도서전 라가치 상 수상작

아드리앵 파를랑주 글.그림, 박선주 옮김, 정글짐북스(2015)


태그:#이태원, #두려움, #사자, #마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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