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생업까지 위협받아야 했던 날들이 있었다. 과거형으로 말하지만 실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그 때, 팟캐스트가 대안 미디어 플랫폼으로서 급부상했다. 전국을 강타한 정치 팟캐스트도 있었고, 정치적 상황과 무관한 다양한 장르의 팟캐스트들이 여전히 인기리에 만들어지고 있다. 팟캐스트라는 새로운 시장은 이미 탄탄하게 자리를 잡은 듯하다.

이제 팟캐스트를 통해 접했던 방송인을 공중파 TV나 라디오에서 보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원래 유명했지만 한동안 주춤했다가 팟캐스트를 통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공중파에 재진입하는 경우도 있고, 순전히 팟캐스트를 통해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아 공중파로 진출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더 이상 공중파냐, 팟캐스트냐를 나누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방송인에게 공중파 방송이 기존의 익숙한 플랫폼이었다면, 출판계에는 등단이라는 시스템이 있다.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고, 작가로서의 타이틀을 얻고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스템의 장점 역시 분명 존재하겠지만, 때로 작가가 되는 지나치게 '좁은 문'이자 일종의 권력 관계가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여기, 기존의 등단제도와는 사뭇 다른 경로를 통해 소설가가 된 작가가 있다. 반 년 만에 벌써 다섯 권의 소설집을 낸 <회색인간>의 저자, 김동식 작가다. 바닥 타일 기술을 배웠고, 액세서리 공장에서 일했다는 것, 그리고 2016년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는 것이 책날개에 소개된 그의 이력이다.

독특한 이력 못지않게 그의 글 역시 특별하다. 쉽게 읽고, 오래 생각하게 한다. 등장부터 꽤 큰 주목을 받은 작가라 나까지 칭찬할 생각은 없었건만, 현실을 들여다보게 하는 그의 재기와 탁월함에 빠져 들었다. 그가 개척한 새로운 장르도, 작가가 되는 또 하나의 방법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만, 무엇보다 그의 글이 가장 선명하고 진하다. 내겐 퍽 반가운 작가다. 

김동식 소설집 <양심고백>
 김동식 소설집 <양심고백>
ⓒ 요다

관련사진보기


<양심고백>에는 26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판타지 같은 이야기도 있고, 지극히 일상의 풍경을 말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느 것 할 것 없이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쳐난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한 곳을 가리킨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다. 때로는 비틀어서, 때로는 직설적으로, 우리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몇 편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인간 평점의 세상'은 악마의 저주로 사람이 죽을 때마다 그의 머리 위에 평점이 매겨지는 세상을 그린다. 인간 평점의 반향은 꽤 커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고인의 삶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고작 1점이라서, 혹은 무려 10점이라서,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을 비하하거나 극찬한다.

악마는 인간에게 저주를 내린 것이건만, 인간 세상은 더욱 좋아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죽음 뒤의 평점을 두려워하며 스스로의 행동을 경계하고, 보다 선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게 된 것이다.

이에 보다 똑똑한 악마가 나타나, 저주를 바꾸어 버린다. 바로, 죽을 때 평점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평점을 받고 태어나도록.

"10점짜리 아기, 5점짜리 아기, 1점짜리 아기…" (p10)


그 후의 인간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책은 그 이후에 대한 묘사를 절제하고 있지만, 지옥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미 모든 평가가 끝났고, 삶이 분명하게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책을 넘기려다 말고, 멈칫하게 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이 악마의 저주와 무관한가.

무시무시한 제목의 '똑똑한 살인 청부업자'에는 살인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직접 살인은 하지 않는다. 바로 중간 유통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의뢰인(소비자)과 살인자(판매자)는 이 중간 유통업자들 때문에 한 번 마주하기도 힘들다.

"하여간에 우리나라는 이게 문제야. 중간 유통업자들이 마진을 다 떼먹고 있으니, 원…"


실소가 뿜어져 나오려는 찰나, 살인자는 생각한다. 가격을 올려야겠다고. 정말이지 "미친 상상력, 유쾌한 풍자"라는 뒷표지의 말을, 책을 읽으며 몇 번이고 실감했다.

웃음과 씁쓸함을 동시에 주는 이야기들도 있다. '개인 감옥'에서는, 사막의 패권을 두고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인다. 파란 나라의 포로가 된 빨간 나라의 전사들은 개인 감옥에 갇혀 차츰 희망을 잃어간다. 그 때, 파란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아는 한 포로가, 다른 전사들에게 기운을 북돋기 시작한다. 그들을 구할 군대가 오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데나가데'라는 파란 나라의 말을 가르쳐 주며.

그 덕분에 용기를 얻은 포로들은 결국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나 밝혀지는 '데나가데'의 비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으로 확인하시길 권한다.

"읽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긴 이야기"라는 책날개의 설명은 정확했다. 미사여구가 배제된 간결한 문장들은 가독성을 높이지만, 한 편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좀처럼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수 없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부여잡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저자는 2016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니, 채 3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연말 첫 책을 출간하고 벌써 다섯 권의 소설집을 낸 작가가 되었다. 그의 능력과 열정, 그리고 성실함에 새삼 감탄이 나온다.

저자는 한국에서 흔치 않은 방법으로 작가 데뷔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보기 드문 새로운 장르를 시도했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의 다음 책은 어떠할까.

지금과 같은 형식을 유지해도 그만의 독특한 장르 확립으로서 환영할 것이고, 지금과 다른 책이 나온다면 이 역시 그 만의 급속한 진화를 보여줄 것 같아 사뭇 기대된다. 어느 쪽이 되든, 그의 창작이 계속되길 바랄 뿐이다.


양심 고백

김동식 지음, 요다(2018)


태그:#양심고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