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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책이 나왔습니다'는 저자가 된 시민기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된 시민기자라면 누구나 출간 후기를 쓸 수 있습니다. [편집자말]
글과 동행하는 작가의 길을 걷게 된 지 거의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남들보다 늦게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또 한참 뒤늦게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그림과 사진을 익히다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글의 씨앗과 만난 결과였다. 열정과 방황은 어쩌면 동일한 것의 다른 현현(顯現)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면서 열병을 앓았고, 때로는 방황을 했다.

첫 창작집을 내고,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 안에 조금씩 틈이 생기고 있음을 알았다. 그때부터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길이 산이기도 했고, 섬이기도 했다. 제주에서 시작해, 남해의 섬을 찾아 나섰다. 해풍을 맞으며 길 위에 섰을 때, 뭐랄까, 노트북을 켜면 모니터 제일 위쪽에서 깜박거리는 커서가 된 기분이었다. 길 위에 선 내가 체험해야 할, 깨달아야 할 것들이 광활한 여백으로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했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을 완주한 그 해 여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훌쩍 떠났다. 내 안의 틈이 더 벌어졌지만 나는 걷는 동안 그것과 대면할 용기가 생겼다. 끊임없이 물었다. 틈의 정체는 무엇일까. 

부다페스트 비오는 길거리 풍경
 부다페스트 비오는 길거리 풍경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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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간한 창작집이 한국도서관협회 우수도서로 선정되어 전국 도서관에 비치되었다. 작가로서 경험을 넓히기 위해 광주작가회의에 들어갔다. 주로 혼자 글을 쓰고, 혼자 활동하던 내게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적극적으로 활동하진 못했지만 선배 작가들을 만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의 내밀한 속내에 대해 더 고민할 수 있었다. 역사의 도시 광주에 살면서도, 속앓이만 했지 먼저 나서서 길을 찾으려는 행동은 늘 굼떴다.

그러다 문학인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그 작은 행위가 '블랙리스트'란 이름으로 되돌아왔다. 내가 영향력 있는 작가여서 문화당국의 지원을 받을 일은 없었지만 배제와 차별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준비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섬뜩했다.

'글은 역사의 칼'이어야 한다는 말을 간혹 듣곤 한다. 글이 역사의 칼이어야 한다는 리얼리즘을 내가 따라가진 않더라도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냉철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자각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저항과 희생의 역사 현장이 있는 광주를 깊게 아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탑, 금남로, 충장로, 전남도청, 전일빌딩, 5.18 묘역까지.

나는 지난해 촛불이 타올랐던 시간에 틈틈이 그 자리를 지키면서도 역사의 흔적이 스며있는 거리를 다시 걸어보았다. 작가로서 내가 채워야 할 틈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글을 낳고, 어떤 글로 독자와 만나야 할지를 더 고민해야 했다. 이번 체코와 헝가리 여행 또한 그 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의 연장선이었다.

체코 프라하, 카렐교의 야경
 체코 프라하, 카렐교의 야경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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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소련의 위성국으로서 남보다 북과 가까웠던 나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던 나라. '헝가리 혁명'과 '프라하의 봄'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하고자 했던 두 나라. 설익은 몇 가지 지식만으로도 두 나라는 광주와 비견할 만한 곳이었다. 

그들에게도 '틈'이 있었다

나는 배낭을 꾸렸다. 방학을 맞아 체코(프라하)와 헝가리(부다페스트)에 머무르면서 광주에서 일상을 보내듯 사십여 일을 그곳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곳의 길을 걸으며 내 안의 나, 역사를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나, 작가로서의 나와 조우하고 싶었다. 

그리고 떠났다. 두 도시를 넘나들면서 여행자로서의 자유와 아픔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과거에서 현재를 봤고 지리적으로 떨어진 여행지에서 한국의 정치 변화를 느꼈다. 운 좋게 두 청년을 만났다.

작년 여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부다페스트 공과대학생인 데이비드와 그의 가족들.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작년 여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부다페스트 공과대학생인 데이비드와 그의 가족들.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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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때 홀로코스트를 겪은 조상을 둔 이스라엘 청년 모어와 지난해 여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났던 부다페스트공과대 학생인 데이비드. 모어는 법률가였고 여행 중이었다. 그 나이 때에 누릴 수 있는 방황을 하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Ph.D 과정을 밟아 연구원이나 교수가 되기를 바랐다. 아픔을 겪어낸 두 나라의 청년들. 둘은 상이한 성격을 지녔지만 그들 모두 일상의 '틈'을 느끼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 그럴수록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삶. 나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어떤 사람이든 장소든 시간의 궤적이 있고 그 궤적은 다양한 이야기를 잉태하기 마련이다. 아픔보다는 즐거운 추억이 많아야 하지만 대부분 아픈 기억을 오래 품는 듯했다. 강한 사람(국가) 사이에 끼었을 때는 더욱 더. 예민하면 그보다 더욱. 나는 아픈 궤적을 예민하게 체코와 헝가리에서 따라가기로 마음 먹었고 그렇게 했다.

다녀온 흔적을 남기기 위해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에 담았다. 그리고 여기, 소박한 여행기를 내놓는다. 책을 내놓기까지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셨고 앞으로 많은 분들이 힘을 보태주시리라 믿는다. 그분들께 감사를 전한다.

차노휘의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 책을 펼쳐놓으며
 차노휘의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 책을 펼쳐놓으며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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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음성으로 성벽에서 환호성을 터트렸다. 프라하 성에서 바라볼 때와 달리 비셰흐라드 성벽에서 내려다본 블타바 강은 더 역동적이다. 유난히 낮게 내려앉은 하늘이 온통 구름에 뒤덮여 블타바 강을 거울삼아 내려다보고 있다. 저 먼 시원(始原)에서 시작한 이들의 몸짓은 끝나지 않을 수다를 동반하다. 나는 그 수다에 귀를 기울인다.

이제야, 이곳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의 빗장을 연다. 이방인이 아닌, 이곳에서 오랫동안 뼈를 묻은 조상을 둔 사람처럼. 프라하에 온지 나흘째이다.

-차노휘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 에코미디어, p. 52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

차노휘 지음, 에코미디어(2018)


태그:#차노휘,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 #프라하 , #부다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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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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