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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km를 걷고 나서

 네 군데(빨강, 갈색, 녹색, 연두색)의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 지도. 녹색이 작년에 걸었던 프랑스 길이다. 이번 여름에는 빨강색 포르투갈 길을 걷게 된다.
 네 군데(빨강, 갈색, 녹색, 연두색)의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 지도. 녹색이 작년에 걸었던 프랑스 길이다. 이번 여름에는 빨강색 포르투갈 길을 걷게 된다.
ⓒ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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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일이라는 시간이 하루 이틀로 압축돼서 저장되었다. 늘 그렇다. 힘든 일이든 기쁜 일이든 빨리 정리해서 저장소에 보관해버리는 것이 습관이라면 습관이랄까. 만약 SNS에 기록하지 않았으면 몇 가지 단어로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좋다! 다시 올 것이다!' 이렇게.

6월 12일에 생장피드포르에서 출발하여 7월 15일 묵시아에서 마무리할 때까지의 여정. 살아가면서 힘들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꺼내 먹는 삶의 영양분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 길은 끝이면서도 끝이 아니다.

 묵시아에서 받은 완주증
 묵시아에서 받은 완주증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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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 길)을 다녀온 지 일 년이 되고 있다. 그곳에서 샀던 스틱과 가리비는 이번 봄에 순례길을 떠난다는 지인에게 주었다. 그 힘을 받아서 무사히 완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지인은 갈 수 없게 되었고 나는 또 이번 여름에 순례길로 나서게 되었다. 프랑스 길이 아닌 포르투갈 길이다. 프랑스 길을 다녀온 뒤에 계획했으니 일년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던 거였다.  

혹자는 그럴 것이다. 그곳에 다녀와서 변한 것이 있는가, 우리나라도 여러 길이 있는데 굳이 왜 외국까지 가서 걸으려고 하는가 등.

내 인생은 순례길을 걷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40대의 나이는 참 애매하다. 젊다고도 나이들었다고 할 수 없는, 인생 절반을 산 나이. 인생의 절반을 살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루어 놓은 것도, 잃어버린 것도 있을 나이이다. 현재, 일을 왕성하게 할 나이이기에 상대적으로 그 만큼 받는 스트레스도 상당할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세상의 규칙에 어느 정도 길들여져서 모험보다는 편안함을 추구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편안하기 위해서는 반항보다는 순종을 도전보다는 머무름을 창의적인 것보다는 길들여짐을 선호할 수도 있겠다. 나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틈'을 발견했다. 아주 우연한 기회였는데, 그 틈이 나를 간지럽히면서 뭔가를 터트리기 위해 점점 커져갔다.

훌쩍, 떠나야 했다. 낯선 땅에서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과 900km를 걷는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결론적으로는 무척 잘한 일이었다. 그 틈에서 느꼈던 폭발 직전의 간지러움은 에너지로 변환되었다. 나의 순례길은 열정의 길이었으며 인생의 전환점이된 길이었다.

 피니스테레에서 받은 완주증
 피니스테레에서 받은 완주증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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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으로 눈에 띄게 변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 심지는 더욱 굳어졌다. 자존감을 높이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용기라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위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용기라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용기를 낼 수 있는 상황은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철저하게 낯선 공간에서, 무엇보다 언어가 다른 곳에서, 힘들 때 의지할 사람이 있는 것보다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야 할 상황에서 힘이 더 세지는 법이다. 그것은 익숙한 공간보다는 낯선 공간이어야 했다. 우리나라보다는 외국이라는 곳이 더 적합했다.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귀국하는 비행기 날짜가 아닌 이상). 그런 곳이어야 했다.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의 인터뷰가 실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글이 안 될 때는 호텔에서 글을 쓴다고 했다. 그 이유가 걸작이다. 하루치 숙박비가 아까워서더라도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고. 베스트셀러 작가니깐 호텔비 정도는 부담스럽지 않아서 그럴 거라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에도 충분히 공감했다. 외국에서 길을 걷는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모 베스트 작가가 호텔에서 글을 쓴다는 것과 비슷한 면도 있지 싶다.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 있겠어, 라고.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고 났을 때는 분명 보상이 있었다. 앞서 말한 자존감을 높이고 용기 있음을 새삼 발견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 '보폭'을 존중했다는 것이다. 내 보폭을 존중한다는 것은 남의 보폭 또한 인정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경쟁 상대가 빨리 달리더라도 그 빠름에 경도되지 않고 되레 존중해 준다는 것. 걷다보면(살다보면) 목적지에 조금 일찍 도착할 수도 조금 늦게 도착할 수도 있다. 언젠가는 도착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의 여유이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 용기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나'가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 또한 신뢰하고 있다. 이것은 남과 비교하는(비교당하는)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다른 말이다.

그래서 나는 걷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내 걷기는 장담하건데 숨을 쉬는 한 계속될 것이다. 작년 여름에 걸었던(프랑스 길), 이번 여름에 걷게 될 산티아고 순례길(포르투갈 길)은 세상의 길이란 모든 길을 걸을, 준비 운동에 불과하다. 그 길에 '글'과 동행할 것이다. 글이라는 것은 내 걸음 걸이에 윤기를 더하면서 내밀한 이야기를 걸어 줄 좋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뚜벅뚜벅 걷는 그 길, 응원을 해주신(해주실) 분들께 감사드린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받은 완주증.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받은 완주증.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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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하면서 참고한 책들]

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하우스중앙, 2006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웅진지식하우스, 2007
김진세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이봄, 2016

가테프, 세실 <걷기의 기적>, 기파랑 잎새, 2006
캔키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지음사, 1994
얀 마텔 <파이 이야기>, 작가정신, 2004
알베르 까뮈 <이방인>, 민음사, 2011
어니스트 헤밍웨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민음사, 2011
존 브리얼리 <산티아고 가이드북>, 넥서스BOOKS, 2010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문학동네, 2011
NAVER·DAUM 백과사전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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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차노휘는 소설가이자 광주대 초빙교수이다. 2016년부터 걷기 시작하여 도보 여행을 하면서 ‘길 위의 인생’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고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 여행 에세이집으로는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