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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비혼, 돌아온 비혼, 자발적 비혼 등 비혼들이 많아진 요즘, 그동안 ‘비혼’이라는 이유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조금 더 또렷하고 친절하게 비혼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낸 40대 비혼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5년이나 탈출하지 못한 압력은 결국 '돌발성 난청'으로 터져버렸다
 5년이나 탈출하지 못한 압력은 결국 '돌발성 난청'으로 터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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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2006년,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곯을 대로 곯아 있었다. 한 달에 15일을 야근하면서 월간지를 만들어냈고, 열심히 한 덕에 팀장으로 승진해서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다. 워커홀릭으로 치열하게 산 덕분에 높이 올라갔지만 삶은 점점 사막이 되어 갔다. 특히 중간 관리자로서 사장님의 과다한 요구를 조율해야 하는 것도 적잖은 스트레스였다.

5년이나 탈출하지 못한 압력은 결국 '돌발성 난청'으로 터져버렸다. 그나마도 마감 작업을 하느라 한참 지나서야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병원을 찾았을 땐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쳐서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왜 빨리 오지 않았냐"는 타박과 함께 "이제 방법이 없으니 한쪽 귀나 잘 관리하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더 이상 물이 나올 수 없을 만큼 꽉 쥐어 짜여진 빨래가 된 느낌이었다. 이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라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그리고 심각하게 사직을 고려했다.

'명함'은 나에게 안전띠였다. 명함 안에 쓰여 있는 내 직업과 직함이 그 어떤 것보다 나를 잘 드러내고, 보호해 준다고 여겼던 탓이다. 게다가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은 경제적 안정과 여유를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버리기가 아까웠고 무서웠다. 어디서 그런 객기가 생겼는지 모르겠는데, 모든 안전띠를 제거해 보자 싶었다.

'여태까지 쉼 없이 달려왔으니 딱 6개월만 나를 위해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결정, 내가 싱글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선택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되, 기왕 쉬는 거 제대로 낭비하고 싶었다.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하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외국에서 한 달쯤 살아보며 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는 것. 어릴 때부터 꿈꿔왔지만 그저 꿈일 뿐, 현실로 이뤄질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그 일을 저지르자 싶었다. 그리고 난 아무 연고도 없는 캐나다의 작은 섬, 빅토리아로 떠났다.

빅토리아섬에서 보낸 1년

 거리를 다닐 때마다 오래된 빨래에서 구정물이 빠지듯 눈물이 났다
 거리를 다닐 때마다 오래된 빨래에서 구정물이 빠지듯 눈물이 났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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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안전장치를 제거하고, 익숙한 터전과 관계를 떠나 캐나다에서 지낸 1년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빅토리아는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와 비슷한 휴양지로, 노인들이 많아서 느리고 여유로운 곳이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이 우선인 분위기, 느리고 약한 사람들을 기다려주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에 적잖은 문화 충격을 받았더랬다. 사람들은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서 계산이 늦어져도 여유 있게 기다려 주었다. 서두르지 않고 승하차를 하는 건 당연한 일상이었다.

가장 감동적인 건 횡단보도에 서있기만 해도 차들이 멈춰줄 때였다. 늘 쫓기고 등 떠밀리는 삶을 살다가 느리고 기다려주는 문화 속에 들어가니 그제야 내가 얼마나 지쳤는지 실감이 났다. 거리를 다닐 때마다 오래된 빨래에서 구정물이 빠지듯 눈물이 났다. 그렇게 구정물을 빼고 또 빼면서 치유를 받았다.

'느려도 괜찮다.', '약해도 괜찮다.'

그곳에선 모두가, 모든 것들이 나에게 그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반 박자 정도 느린 내가 빠른 사람들의 보폭을 맞추느라 얼마나 총총 거렸는지, 얼마나 눈치를 보았는지, 그래서 얼마나 버거웠는지 그제야 느껴졌다. 느릿하게,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 보낸 그곳에서의 시간은 지금까지의 내 생애 중 가장 훌륭한 낭비였다.

빅토리아에서의 시간이 좋았던 만큼 서울에서 맞부딪힌 현실은 혹독했다. 마치 12시 종이 친 다음에 다시 재투성이로 돌아간 신데렐라가 된 느낌이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정규직 취업은 어려웠기 때문에 난 자의반 타의반으로 프리랜서가 되었다. 프리랜서 작가, 프리랜서 편집자, 프리랜서 취재기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래야 겨우 먹고 살만 했다.

"뚜~~"하는 이명을 귀에 단 채로 무리해서 일해야 하는 날도 많았고, 일이 없는 채로 쉬는 날도 많았다. 월 100만 원도 못 버는 때도 있었고, 300만~400만 원짜리 일을 계약해도 결제가 늦어지면 손가락을 빨아야 하는 날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겨우 작업비가 나오면 빚을 갚느라 통장은 늘 가난했다. 불안정한 프리랜서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나에게 일을 하고 돈을 번다는 것은 보람이나 재미보다 생계와 더 직결되는 현실이 되었다.

내 이름 옆에 어떤 수식어가 붙으면 좋을까

어느덧 40대 후반이 되어 갱년기 증상이 생기기 시작한 요즘은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거의 쉬지 않고 열심히 페달을 밟았는데 고작 여기인가?' 싶어 더 그렇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밥벌이를 위한 노동도 그만하고 싶고, 일을 하지 않을 때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먹고 살 걱정도 그만하고 싶다. 일하기도 싫고 일하는 것이 힘에 부치면서도 나는 10년 전 그때처럼 일을 그만둘 용기가 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먹고사니즘'은 절실하니까.

또 40대 싱글인 내가 일마저 없다면, 자칫 루저가 되거나 걱정스러운 존재로 전락해 버리기 십상이니까. 이런 이유들로 인해, 일은 나에게 중요하지만 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때가 많아져 버렸다.

일하고 싶지 않을 때 일하지 않기 위해 나는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일을 원하는 욕망과 그 일에 내 자신을 갈아 넣지 않겠다는 불안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말이다. 과연 일을 하지 않아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올까. 내 일상을 지키면서 충분한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 가난한 통장, 명함 없는 신분, 그래서 조급해질 때마다 몸과 마음에 탈이 나서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했던 지난날을 기억하며, 종종 브레이크를 잡는다.

"텔레비전에서 하는 인재 발굴 프로그램이랑 똑같아요. 사람들이 무대에 오르고 그 아래에 그 사람 이름과 하는 일이 자막으로 크게 박히죠'. 실업자'라는 커다란 글자가요. 수잔 보일이 등장했을 때 그랬어요.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카드 만들기를 좋아한다'거나, 다른 뭐라도 쓸 수 있는데도 말이에요. 어디나 다 그래요, 심지어 뉴스에서도' 수잔 브릭스, 제빵사'라고 표시하고, 게임 프로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루시, 동물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즐김'이라고 써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정말 좋을 거 같아요." - <일하지 않을 권리>


 <일하지 않을 권리> 책표지
 <일하지 않을 권리> 책표지
ⓒ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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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게 벌어 불편하고 명함이 없어 불편해도 그 불편함들이 오히려 나답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고, 길을 찾게 한다. 내 이름 옆에 어떤 수식어가 붙으면 좋을지 상상해 본다.

'신소영, 여행을 즐기고 괜찮다고 위로해 주는 걸 좋아함.'

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롭고 여유가 생긴다면, 사람들에게 '빅토리아 섬'이 되어 주고 싶다. 이 빠르고 강박적인 세상에서 "느려도 괜찮다", "부족해도 괜찮다", "약해도 괜찮다", "실패해도 괜찮다", " 좀 달라도 괜찮다"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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