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조상연

관련사진보기


아버지가 모아놓은 글 속에 너와 카톡으로 나눈 재미있는 대화다. 너희들을 믿기에 잔소리는 거의 안 하지만 가끔 좋은 말도 했구나. 날짜를 보니 2016년 정월 초엿새인데 회사에서 보낸 메시지로 기억이 난다.

어제의 일이다. 부회장이 퇴근하더구나.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동료 한 사람의 혼잣말이 좀 컸는지 주위 몇 사람이 그를 돌아보는데,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이라 혀를 끌끌 차며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매가 곱지 않다.

"세상 참 공평하지 못해. 쩟쩟."

그가 바라는 공평한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회장이 벤츠 타면 자기도 벤츠 타고 부장이 하와이로 휴가를 떠나면 자기도 하와이로 휴가를 가야만 공평한 세상일까? 아버지가 바라본 그가 생각하는 공평한 세상은 꼭 회장이 아니라도 남들이 김치찌개 먹을 때 자기는 쇠고기 먹고 남들이 제주도 갈 때 자기는 프랑스 에펠탑 밑에 서 있어야 공평하다 할 사람이다.

서울역 노숙하는 분에게 할머니 한 분이 곰보빵을 주었더니 퍽퍽한 빵이라며 거절을 하더란다. 노숙하는 그분은 퍽퍽한 곰보빵이 분수에 맞고 자기는 보들보들한 카스테라가 분수에 맞는 거라며 각자 분수에 맞게 사는 게 공평한 세상이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의 말이 기억난다. 그런 그가 기사 딸린 벤츠를 타고 출퇴근하는 부회장을 보며 세상 공평하지 못하다니 그의 공평함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공평함이란 이렇다. 생물학적으로 신체구조가 다른 남자와 여자인 아버지와 네가 짐을 들고 갈 때 남자인 아버지가 무거운 짐 한 개라도 더 드는 게 공평하다. 책상 앞에 온종일 앉아서 일하는 여자인 너보다 온종일 서서 일하는 아버지가 밥 반 공기라도 더 먹는 게 공평하다. 회장 아들이나 장관 아들이나 경비원 딸이나 남자나 여자나 기회가 주어졌을 때 능력에 따라 그 기회를 똑같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회가 공평한 사회다.

지난번 너와 맥주 한잔하며 네가 받는 옳지 못한 회사의 차별에 아버지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내 입에 들어가는 밥을 남의 손 안 빌리고 스스로 해결하는 한, 세상에 기죽지 말고 당당해라. 그래야 아버지 딸이다.

비가 내린다. 저기 전무님이 출근하는구나.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하는데 전무님 어깨에 빗방울이 굴러떨어진다. 이렇게 하늘은 전무냐 대리냐 상관없이 공평하건만 사람들 스스로가 높낮이를 정하고 길고 짧음을 견주는 어리석음을 범하는구나.

누가 더 길고 짧은지 재봐야 알겠지만 아버지는 네게 말한다. 세상에 너보다 특별히 잘난 사람 없다. 가진 게 많다고 너보다 잘난 사람이랴? 단언컨대 그건 아니다. 또한, 너보다 못난 사람도 없다.

아버지 말 잊지 마라. 매사에 겸손하면 된다. 불평등과 불공정한 처사에 침묵하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 대해 당당하되 이웃들 앞에서는 겸손해라. 아버지는 회장님이나 전무님 또는 미화 여사님들에게 인사를 할 때 회장님이라고 고개를 더 숙이고 미화 여사님들이라고 덜 숙이지 않는다.

그가 회장이거나 말단 직원이거나 또는 미화 여사님이거나 사람이 반가워하는 인사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인사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지 그의 직책에 하는 인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 딸아. 비가 내리는구나.
아직 떨어지지 않은 벚꽃의 앓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봄비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시집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87)

▶ 해당 기사는 모바일 앱 모이(moi) 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모이(moi)란? 일상의 이야기를 쉽게 기사화 할 수 있는 SNS 입니다.
더 많은 모이 보러가기


태그:#모이, #아버지와 딸, #시집 , #편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편안한 단어로 짧고 쉽게 사는이야기를 쓰고자 합니다. http://blog.ohmynews.com/hanast/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