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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영화 <남한산성>의 개봉에서 알 수 있듯 광해군의 폐위와 반정으로 즉위했던 인조의 시대는 다양한 매체와 문학 작품을 통해 소개되고 있다. 인조를 떠올리면 보통 '삼전도의 굴욕'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지금도 서울시 송파구에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가 세워져 있어 후세의 교훈으로 남아 있다.

서울 삼전도비 삼전도의 굴욕을 상징하는 ‘삼전도비’의 모습
▲ 서울 삼전도비 삼전도의 굴욕을 상징하는 ‘삼전도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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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우리는 '삼전도의 굴욕'을 단순히 청나라에 무릎을 꿇었던 사건으로 인식하지만, 실상 내부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던 인조였기에 두 차례의 호란과 '삼배구고두의 예'를 통해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한 사건은 권위의 실추로 다가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병자호란(1636~37)'은 뜻하지 않게 인조의 가족사에 큰 광풍을 몰고 오게 된다. 오늘은 병자호란 이후 심양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 일가의 비극적인 죽음, 그리고 지금은 그들이 어떤 모습들로 관리가 되고 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 권력은 아들과도 나눌 수 없는 속성

병자호란을 통해 인조(재위 1623~1649)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차남인 봉림대군 등은 청나라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게 된다. 하지만 소현세자(1612~1645)가 볼모 생활을 하는 동안 인조와 소현세자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게 되는데,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파주 장릉 파주 장릉,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능이다.
▲ 파주 장릉 파주 장릉,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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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인조에게 있어 소현세자는 아들이기 이전에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청나라의 대응에서도 나타나는데, 인조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세자를 왕위에 올리겠다는 위협 카드로 썼다. 때문에 인조와 소현세자의 사이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못한 다는 속성을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청나라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였다. 명분과 실리의 사이에서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의 경우 청나라에 대해 유연한 대처가 가능했지만, 인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청나라와 심양에 있는 소현세자 부부의 존재에 대해 유연한 대응이 어려웠다. 따라서 병자호란의 여파는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을 부채질했다는 점에서 불행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남은 가족들의 비극적인 운명

1645년 조선으로 영구 귀국 길에 올랐던 소현세자는 돌아온 지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당시 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독살설'이 제기될 만큼 논란이 있었던 대목으로, 지금도 논쟁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독살 여부를 떠나 이때 인조의 행동을 보면 세자의 죽음에 일정 부분 관여 내지는 방치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경원 소현세자의 소경원, 정자각의 사라지고, 초석만 남아 있는 모습니다.
▲ 소경원 소현세자의 소경원, 정자각의 사라지고, 초석만 남아 있는 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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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부분은 인조의 행동을 보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난 뒤 인조는 차남인 봉림대군(효종, 재위 1649~1659)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이는 장자 계승의 원칙과 맞지가 않아서 당시 조정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보통 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경우 세자의 맏아들인 원손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소현세자에게 세 아들이 있었음에도 무리하게 왕통을 바꾼 인조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기 충분했다.

소경원의 문인석 소경원의 문인석에서 바라본 모습, 비공개 지역인 탓에 찾는 발걸음이 뜸한 곳이다.
▲ 소경원의 문인석 소경원의 문인석에서 바라본 모습, 비공개 지역인 탓에 찾는 발걸음이 뜸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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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세자빈 강씨(1611~1646)의 경우 소용 조씨에 대한 저주와 자신에 대한 암살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사사하는 등 소현세자 일가에 대한 핍박을 이어갔다. 결국 1647년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고, 이곳에서 맏이인 경선군(1636~1648)과 차남인 경완군(1640~1648)은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막내인 경안군(1644~1665)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처럼 소현세자 일가의 죽음과 비극은 이후에도 여전했는데, 최초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난 뒤 '소현묘(昭顯墓)'로 조성이 되었다. 보통의 경우 세자가 세상을 떠나면 '원(圓)'으로 조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인조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인조는 죽을 때까지 소경원을 찾지 않는 비정함을 보여줬다.

아내는 광명에, 가까이에 있는 아들은 군부대에

세자빈 강씨 역시 그냥 넘어가지 못했는데, 1646년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사사되었다. 이 여파로 소현세자와 함께 묻히지 못한 채 친정인 광명에 묘가 조성되었는데,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죽어서도 함께 하지 못한 비운의 부부가 되었다. 이후 숙종 때 신원이 회복되어 '민회빈'으로 추존되었으며, 묘의 경우 '민회묘(愍懷墓)'라 불리게 된다.

광명 영회원 광명 영회원, 민회빈 강씨의 원으로, 억울한 누명으로 세상을 떠난 뒤 친정에 묘가 조성되었다.
▲ 광명 영회원 광명 영회원, 민회빈 강씨의 원으로, 억울한 누명으로 세상을 떠난 뒤 친정에 묘가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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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782년(정조6년)의 기록 중 정술조가 상소를 올려 '소현묘(昭顯墓)의 경우 신위를 철거했고, 순회묘(順懷墓)의 경우 봉은사에 신위를 봉안하고 있어 문제'라고 지적하며 '하물며 순회세자나 소현세자가 이런데 일개 후궁(원빈 홍씨)이 원을 칭할 수 있는 것이냐'며 상소를 올렸다. 이를 통해 정조 때도 여전히 묘로 불린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원으로 격상이 된 건 고종 때에 가서야 가능했다. 이때 '소현묘'는 '소경원'으로, '민회묘'는 '영회원'으로 격상될 수 있었다.

한편 제주도로 유배를 간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맏이인 경선군과 차남인 경완군이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후 그들의 묘는 아버지 소현세자의 소경원 인근에 조성이 되었다. 얼핏 보면 아버지와 함께 있어서 행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 서삼릉은 농협 부지와 종마목장, 군부대로 갈기갈기 찢겨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거리상 가까울지 모르지만, 현실의 거리는 오히려 더 멀어진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경선군과 경완군의 묘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아들인 경선군과 경완군의 묘, 지금은 군부대에 둘러싸여 있다.
▲ 경선군과 경완군의 묘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아들인 경선군과 경완군의 묘, 지금은 군부대에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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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소경원만 해도 군부대와 농협 부지, 종마목장으로 고립된 상태인데, 소경원에서 직선거리로 500m도 채 안 떨어진 경선군과 경완군의 묘는 군부대에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환경을 말해주듯 소현세자의 '소경원', 민회빈 강씨의 '영회원', '경선군묘', '경완군묘'는 모두 비공개 지역으로 관람이 제한되는 곳이자, 찾는 발걸음이 뜸한 곳이다.

경안군과 임창군의 묘 소현세자의 아들 중 유일하게 생존한 경안군과 그의 아들 임창군의 묘로, 대자동 일대에 소현세자 후손들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 경안군과 임창군의 묘 소현세자의 아들 중 유일하게 생존한 경안군과 그의 아들 임창군의 묘로, 대자동 일대에 소현세자 후손들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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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후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경안군과 그의 아들 임창군의 묘 역시 소경원에서 멀지 않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이곳에서 눈여겨봐야 할 곳은 굴씨묘의 존재로, 소현세자의 증손자이자 경안군의 손자인 밀풍군의 묘 아래 자리하고 있다.

굴씨는 심양 볼모생활 중 소현세자를 모시던 명나라의 마지막 궁녀로,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서 생을 마쳤다. 이에 소현세자의 종중에서 묘역을 정비하고, 비석을 세워 관리하고 있다.

굴씨묘 굴씨묘의 전경, 소현세자 일가의 비극적인 운명과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 굴씨묘 굴씨묘의 전경, 소현세자 일가의 비극적인 운명과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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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소현세자 일가의 비극적인 운명과 흔적은 여전히 현장에 남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의 나비효과가 빚어낸 비극은 아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과 함께 현실에 그어진 보이지 않는 경계는 슬픈 적막감만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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