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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 정상의 2층 누각 침산정
 침산 정상의 2층 누각 침산정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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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 아래의 강변, 금호강과 신천이 만나는 지점에는 희고 고운 모래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백사벌(白沙伐)이라 불렀다. 흰(白) 모래(沙) 벌판(伐)이라는 뜻이다. 백사벌은 뒷날 발음하기 쉬운 '백사부리'로 바뀌었다.

침산 일원과 신천 건너 연암산 일원에서는 선사 시대 유물이 많이 발굴되었다. 이는 아득한 옛날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다는 역사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들은 신천 물가로 와서 빨래를 했다. 빨래하기에 적합한 넓적한 빨랫돌이 많았기 때문이다. 침산(砧山)은 빨랫돌(砧)이 많은 산(山)이라는 뜻이다.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곳

침산은 해발 121m밖에 안 될 만큼 높이가 낮다. 산이라 할 것도 없지만 사방이 모두 강과 들판이니 우뚝 솟은 것만은 사실이고, 그 탓에 봉(峰)이라 부를 수 없어서 저절로 산(山)이 되었다. 그런데도 언덕 같은 이 산에는 등산로가 많다.

침산의 동쪽 등산로 입구는 북구 성북로5길 51-5(침산동 산15-3), 서쪽 등산로 입구는 북구 침산남로9길 113(침산동 1168-1), 남쪽 등산로 입구는 북구 침산남로9길 32(침산동 1643-45), 북쪽 등산로 입구는 북구 침산남로9길 167(침산동 810-32)의 주소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산에 굴곡이 많고 계곡도 여러 갈래라는 점을 가늠하게 해준다.

등산로 입구가 여럿인 산은 봉우리도 여럿인 법이다. 침산은 한때 오봉산(五峰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봉우리가 다섯 있는 산이라는 말이다. 1906년∼1907년 대구읍성을 파괴한 친일파 대구 군수 박중양(朴重陽, 1874∼1959)이 이 산을 개인 소유로 만들고는 그런 이름을 붙였다. 

침산에 오봉산이라는 새 이름이 붙은 까닭

1906년 대구에 거주 중이던 일본인 상인들이 박중양에게 대구읍성을 철거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외국인은 대구읍성 내에서 장사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그 탓에 일본인 상인들은 장사에 재미가 없었다. 성벽만 없으면 읍성 안과 밖의 구분이 없어지니 일본 상인들의 장사에 크게 도움이 될 터였다.

박중양은 1906년 10월 붕괴 위험이 있으므로 대구읍성을 부수겠노라는 허가 요청 공문을 조정에 제출했다. 공문을 보낸 박중양은 조정에서 회신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읍성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조정의 '불허' 공문이 도착한 11월 대구읍성은 이미 박중양에 의해 반쯤 파괴된 뒤였다.

박중양이 무자비하게 대구읍성을 부수다

대구읍성은 1988년 가을 프랑스의 유명한 지리학자 샤를 바라(1842∼1893)가 조선을 여행한 후 귀국하여 <조선 기행>을 발표하면서 '북경성을 축소해 놓은 듯 아름답다'라고 격찬했던 소중한 문화유산이었다. 바라는 다음과 같이 감탄했다.

"대구읍성의 성벽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평행사변형이었고, 사방 성벽에는 웅장한 성문이 서 있었다. 성문의 정자에는 옛 역사를 나타내는 그림과 조각들이 가득했다. 성문의 정자에서 나는 가을 햇볕 아래 찬란한 색채를 빛내며 전원을 휘감아 흐르는 금호강의 낙조를 지켜보았다. 내 발아래로 큰 도시의 길과 관사들이 펼쳐져 있었다. 서민의 사는 구역에는 초가지붕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었고, 양반들이 사는 중심부에는 우아한 지붕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 <조선 기행>, 눈빛 번역 출간, 2001년


조정의 불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구읍성을 무참하게 부수었지만 박중양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평안남도 관찰사로 승진했다가 이내 경상북도 관찰사가 되어 대구로 '금의환향'했다.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소문이 나 있었을 만큼 일본의 비호를 받아온 자다운 출세가도였다.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무너뜨릴 때 성의 정문(남문) 영남제일관도 파괴되었다. 사진의 망우당공원 영남제일관은 1980년에 복원한 것이다. 1736년에 건립된 본래의 영남제일관은 중구 종로 17(남성로 92) 약전골목 안 네거리에 있었다.
▲ 영남제일관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무너뜨릴 때 성의 정문(남문) 영남제일관도 파괴되었다. 사진의 망우당공원 영남제일관은 1980년에 복원한 것이다. 1736년에 건립된 본래의 영남제일관은 중구 종로 17(남성로 92) 약전골목 안 네거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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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양이 얼마나 대단한 친일파였던가 하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조선통치 25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조선 공로자 명감>도 극명하게 증언해준다. <조선 공로자 명감>은 박중양을 두고 '이등박문 이하 총독부 대관으로부터 역량과 수완이 탁월하다고 인식되고, 비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사급에서는 박중양'이라고 기술했다. 1945년 4월에는 일본제국의회 귀족원이 조선인 7명을 의원으로 임명하면서 박중양을 포함시켰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제국회의 의원에 선임된 자는 1945년 4월 이전에 선임된 3명을 포함해 모두 10명뿐이었다.

일본 측 기록 "박중양은 믿을 수 있는 인물"

박중양은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대구에 거주했다. 그는 대구 출생도 아니었지만 침산 아닌 오봉산에 지어놓은 별장에서 유유자적 살았다. 친일파들을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인 이승만 정부의 비호 덕분이었다.

박중양은 1959년에 사망했지만 그가 자신의 공로를 칭찬하여 세운 일소대(日笑臺)라는 기념비는 해방 이후 50년이 지난 1996년까지 산에 남아 있었다. 심지어 일부 주민들은 그 기념비 앞에서 치성을 드리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는 1996년 8월 15일 일소대 앞에 박중양의 친일 행적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웠다. 마침내 박중양의 후손들은 1996년 10월 11일 일소대를 철거했고, 2007년에는 침산 자체도 국가 재산으로 환수되었다. 

침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이 계단에는 '폭포 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 좌우로 두 개의 작은 연못이 있어서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내렸다가 녹는 날이면 계단 좌우로 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 폭포 계단 침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이 계단에는 '폭포 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 좌우로 두 개의 작은 연못이 있어서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내렸다가 녹는 날이면 계단 좌우로 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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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의 '대구 10경'


제 1경 : 琴湖泛舟금호범주 (금호강의 뱃놀이)
제 2경 : 笠巖釣魚입암조어 (입암의 낚시)
제 3경 : 龜峀春雲귀수춘운 (거북산의 봄 구름)
제 4경 : 鶴樓明月학루명월 (금학루의 밝은 달)
제 5경 : 南沼荷花남소하화 (남소의 연꽃)
제 6경 : 北壁香林북벽향림 (북벽의 향림)
제 7경 : 桐華尋僧동화심승 (동화사의 중을 찾음)
제 8경 : 櫓院送客노원송객 (노원의 송별)
제 9경 : 公嶺積雪공영적설 (팔공산에 쌓인 눈)
제10경 : 砧山晩照침산만조 (침산의 저녁노을)

조선 시대의 선비 서거정(1420, 세종 2∼1488, 성종 19)은 대구의 아름다운 경치 10경을 노래하면서 그중 한 곳으로 '침산만조(砧山晩照)'를 꼽았다. 침산의 저녁놀은 대구를 대표할 만한 아름다운 풍경 중 한 곳이라는 것이다.

水自西流山盡頭(수자서유산진두)
물은 서쪽에서 흘러와 산머리에 다다르고
砧巒蒼翠屬淸秋(침만창취속청추)
침산 푸른 숲에는 가을빛이 어리었네
晩風何處舂聲急(만풍하처용성급)
해 질 녘 바람에 어디선가 방아소리 들리니
一任斜陽搗客愁(일임사양도객수)
노을에 물든 나그네 마음 더욱 애잔하네

서거정은 푸른 침산에 가을빛이 어리었다고 했다. 박중양과 같은 친일파를 역사에 단죄하고 현실에 그 잘못을 새겨야 나라가 살고 민족 정기가 회복된다. 나는 <침산만조>의 3행을 '침산에 오른 서거정은 진작에 우리 역사가 아름답게 되살아나는 모습을 예감했던 모양'이라고 마음대로 해석해 본다.

침산 정상에 있는 정자 침산정 앞 큰돌에 시 '침산만조'를 새겨놓은 서거정 시비
 침산 정상에 있는 정자 침산정 앞 큰돌에 시 '침산만조'를 새겨놓은 서거정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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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사이트에 검색을 하니 대구에서 오봉산 이름으로 떠오르는 것은 식당 한 곳, 골프 연습장 한 곳, 자동차 수리점 한 곳뿐이다. 오봉산이라는 박중양의 작명이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침산 전체에도 오봉산 대신 '침산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다만 아쉬운 바는 침산 남쪽 등산로 입구의 오거리가 여전히 '오봉 오거리'로 불린다는 점이다. 네이버 지도에도 '오봉 오거리'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박중양이 대구 시내를 큰소리치며 돌아다녔다. 왜 아무도 그를 엄중하게 처벌하지 않았을까? 그 결과 지금도 침산 아래 오거리에 '오봉 오거리'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대구에 거주하는 이북 도민들이 1993년 10월에 세운 망배단. 망배단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엎드려 절하는 제단이라는 뜻이다.
 대구에 거주하는 이북 도민들이 1993년 10월에 세운 망배단. 망배단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엎드려 절하는 제단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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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 정상 침산정(砧山亭)에 올라 멀리 달서구 와룡산 방향을 바라본다. 서거정이 이곳에 올라 시를 읊었던 당시에는 대구부 중심부와 금호강 사이가 그저 광활한 들판이었다. 달성 앞을 지나쳐 유유히 흘러온 대구천은 금호강으로 접어들고, 저녁놀은 아찔하게 서산을 넘어가며 물길과 들길을 황홀하게 물들였으리라.

그 아름다운 풍광을 친일파 박중양이 오봉산이라는 이름으로 더럽혔다. 깨어있는 많은 시민들이 빨랫돌(砧) 위에 오봉산이라는 못된 이름을 얹어놓고 오랫동안 두드린 끝에 침산이라는 이름을 이제 거의 되찾았다. 그래도 아직 친일 잔재 청산은 완성되지 않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신채호 선생의 절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태그:#침산, #오봉산, #박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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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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