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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원래 처절했다. 사자와 같은 근육과 이빨도 없고, 코끼리 같은 거대한 몸뚱이도 갖고 있지 않다. 새처럼 하늘을 날지도 못하며 말처럼 빠르게 달리지도 못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명은 인간이 도구를 다룰 수 있다는 단순함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인류의 문명은 생존자체가 절박했던 순간과 함께 시작됐다.

메소포타미아. 인류문명의 탄생지인 메소포타미아는 척박한 곳이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나는 지점. 그곳은 비옥한 토양으로 인해 야생밀과 보리와 같은 곡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강수량이 적고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생존본능과 도구의 활용은 이 척박한 곳을 꿈틀거리게 했다. 야생밀과 보리는 수렵으로 연명하던 인류를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하게 했다. 수메르(Sumer)인이라고 불렸던 이들은 이곳에서 농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자연은 평화로움과 부유함만을 건네지 않았다. 해마다 범람해 농사를 망치게 하던 강물은 수메르인들에게 고통이었다.

맥주의 탄생... 기원전 5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메소포타미아 맥주의 탄생지
▲ 메소포타미아 맥주의 탄생지
ⓒ Gran tek,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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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인이 지금껏 역사책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 이유는 이들이 순순히 자연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메르인은 범람하는 강물을 막기 위한 치수사업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확한 측량기술이 필요했고 이를 통해 수학, 기하학뿐만 아니라 천문학까지 발전하게 된다. 또한 정확한 의사소통을 위해 문자기술까지 발전시켰다.

발전된 기술로 정교한 배를 만들 수 있었던 수메르인들은 강을 통해 활발한 교역을 했다. 메소포타미아는 돌과 나무가 부족했기 때문에 수메르인들은 강을 통한 교역을 통해 곡물과 옷감을 수출하고 목재, 석재 그리고 금속을 수입했다. 이러한 교역은 수메르가 도시국가의 초석이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기원전 5200년경 수메르는 발달된 과학기술과 농업 그리고 교역을 통해 인류 최초의 문명인 도시국가를 세우게 된다. 척박한 환경은 오히려 인류에게 문명이라는 결과물을 가져다 준 것이다.

동아시아가 풍부한 강수량으로 인해 쌀농사가 발전했던 것에 반해 수메르인에게는 밀과 보리가 중요한 곡물이었다. 수메르인들은 불을 다루는 기술이 탁월했는데, 이를 이용해 밀과 보리를 빵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벽돌로 수로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었던 수메르인들이 빵을 구울 수 있는 화덕과 불을 쉽게 다룰 수 있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빵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창조자이자 주인이었던 수메르인들의 주식이었다. 그런데 빵과 더불어 맥주가 이들의 중요한 생명수였다면 믿을 수 있을까? 맥주는 수메르인들에게 물을 대신해 마실 수 있는 안전한 음료였고 새로운 사람과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이자 노동의 댓가이기도 했다. 어떻게 맥주가 기원전 5000년에 인류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애초 최초의 술은 과실주, 즉 과일 발효주였다. 땅에 떨어졌든 나무에 메달렸든 과일에 남아있던 당이 발효돼 나온 '달고 시큼한' 액체는 문명 이전 인류에게 신이 내려준 선물이었다. 과실주는 인류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우연히 주어진 음료였다. 하지만 곡물을 통해 만들어지는 맥주는 반드시 농업, 즉 문명과 함께여야만 탄생할 수 있는 음료였다.

맥주의 탄생과정은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그 중 가장 유력하고 신빙성이 높은 설은 빵과 함께 시작된다. 맥주는 발아된 곡물에 있는 당이 발효되서 만들어지는 술이다. 기원전 5000년 전 발아된 곡물의 흔적은 그들이 당시 만들었던 빵에서 찾을 수 있다. 수메르인들은 농사를 통해 수확한 밀과 보리를 통해 빵을 만들었다. 당시 빵을 만드는 방법은 수메르인들의 문자를 통해 볼 수 있다.

'시큼 달큰한' 액체

수메르 문자판 최초의 맥주양조법을 담은 문자
▲ 수메르 문자판 최초의 맥주양조법을 담은 문자
ⓒ Babel Stone,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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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빵을 만들기 위해 크게 몇 단계를 거쳐야 한다. 우선 가루를 만들기 위해 곡물의 껍질을 벗겨내고 불에 구어 빻는다. 이후 반죽을 한 후, 다시 화덕에서 굽게 된다.

맥주는 이렇게 만들어진 빵을 통해 발견됐다. 곡물은 발아하면 내부에 당이 만들어진다. 일부 발아된 곡물이 빵을 만드는 데 사용됐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어느날 우연히 빵이 물에 젖게되고 인간이 잠든 사이 주위에 있던 효모와 균이 빵에 남아있던 당을 발효해 매우 시큼하지만 달큰한 액체를 만들었다. 더구나 이 액체에는 인간에게 에너지와 쾌락을 주는 묘약, 알코올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맥주였다.

밀과 보리는 빵을 만드는 데도 사용됐지만, 맥주를 만드는 주재료로도 사용됐다. 특히 보리는 껍질이 잘 벗겨지는 밀에 비해 단단한 껍질을 가지고 있어 맥주를 만드는 데 주로 사용됐다. 수메르인은 밀과 보리로 만든 빵을 물에 넣어 죽으로 만들고 끓인 후, 시간이 흐르면 매력적인 액체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수메르인들은 이 액체를 '시카루'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수메르인들은 시카루를 식수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를 할 때 마셨다. 시카루는 화덕과 빵을 통해 만들어졌지만 최종 결과물은 자연에 의해 결정됐다. 시카루의 품질을 좌우하는 발효는 당시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수메르인들은 좋은 시카루를 만들어 주는 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대지를 아우르고 농사를 도와주는 신들을 여자로 생각했는데, 시카루를 만들게 해주는 신도 역시 여자였다.

닌카시 최초의 맥주여신
▲ 닌카시 최초의 맥주여신
ⓒ Smithson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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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카시(Ninkasi). 훌륭한 시카루를 만들어 주는 여신의 이름은 닌카시였다. 수메르인들은 닌카시의 손길을 통해 빵에서 나온 거친 죽이 훌륭한 시카루가 된다고 믿었다. 수메르인들의 신은 이후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를 관통하는 신화의 기틀이 되는데,  닌카시 또한 이후 맥주와 술의 신으로 이어지게 된다. 수메르인들은 시카루뿐만 아니라 다양한 컬러와 맛을 갖는 맥주를 만들 수 있었다. 심지어 다이어트 맥주의 일종인 'eb-la'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수메르인들이 만든 시카루를 지금도 마실 수 있다면 어떨까? 재미있는 사실은 현존하는 맥주 스타일 중 무려 지금부터 7000년 전 만들었던 최초의 맥주, 시카루와 비슷한 맥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7000년 전 맥주와 가장 흡사한 이 맥주

Belgian Lambic Geuze Boon Lambic
▲ Belgian Lambic Geuze Boon Lambic
ⓒ 윤한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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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람빅(Lambic)이라는 맥주는 놀랍게도 시카루와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맥주다. 50%의 밀과 50%의 보리가 사용되는 이 맥주는 철저하게 자연 속에 있는 효모와 균을 통해 발효를 진행하게 된다.

현재 90% 이상의 맥주는 인간이 맥주에 적합하게 개량해 발전시킨 효모(Culture yeast)를 통해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벨기에 람빅은 인간의 손에 의해 개량된 효모가 아닌 자연에 존재하는 야생효모(wild yeast)와 유산균의 일종인 락토바실러스(Lactobacillus)와 같은 박테리아를 통해 양조된다. 야생효모와 유산균을 통해 만들어진 맥주는 강한 신맛과 쿰쿰한 향을 갖게 되는데, 시카루 또한 이러한 맛과 향을 가졌을 것이다.

맥주는 신이 인간에게 던져준 선물이 아니다. 맥주는 인류의 생존을 위한 처절함에서 나온 산물이다. 맥주에는 수메르인들이 자연과 당당하게 맞섰던 결기가 남아있고, 우연히 발견한 액체로 인해 흥겨워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좋은 시카루를 위해 닌카시에게 기도했던 간절함 역시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마시는 맥주는 우리와 같이 삶과 죽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수많은 맥주가 탄생하고 죽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인간의 역사가 항상 함께했다. 맥주의 역사를 거슬러보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탐닉해보는 것과 같다. 비록 더 이상 닌카시의 손길을 맥주에서 느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중복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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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맥주문화협회장으로 '맥주는 문화'라는 명제를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beergle@naver.com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