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동백꽃은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를 계기로, 스러져간 제주의 영혼들을 상징하는 꽃이 됐다. 제주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도, 4.3의 영령들과 함께 져 버린 것이 아닐까.
 동백꽃은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를 계기로, 스러져간 제주의 영혼들을 상징하는 꽃이 됐다. 제주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도, 4.3의 영령들과 함께 져 버린 것이 아닐까.
ⓒ 김흥구

관련사진보기


제주4·3항쟁은 해방 공간의 변혁의 꿈을 절실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그 격렬한 기점이 바로 1947년 3.1 사건이었다. 제주도 3.1절 기념대회가 끝난 직후 경찰의 발포에 의해 사상자가 발생한 이 사건은 이후 미 군정의 살인적인 탄압으로 이어져 4·3항쟁을 낳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47년 제28주년 3.1절 기념대회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은 단순히 좌우대립의 충돌에 그치지 않는다. 그해 3월 1일 서울에서는 남산과 서울운동장에서 각기 따로 기념식을 치른 좌익과 우익세력이 남대문에서 충돌했고, 이에 경찰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좌우대립의 긴장 관계를 넘어 미 군정의 좌익 탄압을 가중함으로써 당시 정치 지형을 더욱 흔들어놓았다. 이후 남한 내 극우세력의 득세는 분명해졌고, 분단의 가시화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3.1절 기념대회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주최 아래 전국적으로 치러진 경우가 많았다. 남로당과 민전 등 좌익세력은 3.1절 기념대회를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투쟁과 결부시켜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제주도의 경우도 도 민전의 주최 아래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북국민학교를 비롯해 제주 전역에서 치러졌다.

이날 새벽부터 제주 읍내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비상경계에 돌입한 군정 경찰은 미제 카빈총으로 무장, 읍내 요소요소에 배치됐다. 그러나 경찰의 경계선을 뚫고 조천·신촌·화북의 동쪽 마을 주민들은 동문통으로, 애월·신엄·하귀·도두 등 서쪽 마을 주민들은 서문통으로 진입했으며, 오라·노형·아라 등 읍내 외곽마을 주민들도 서문통으로, 남문통으로 내려왔다.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개최된 '제28주년 3.1절 기념대회'는 3만여 명의 도민이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 넘는 주민들이 참석한 셈이다. 제주읍의 행사와는 별개로 한림·대정·안덕·중문·서귀·남원·표선·구좌 등지에서도 수천 명이 모였고, "제주도 개벽 이래 최대인파가 참석했다"는 말이 돌 정도로 도민들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대회가 치러졌다. 

제주도 민전 안세훈 의장은 3.1절 기념식 개회사를 통해 "3.1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개회사에 이어 독립선언문이 낭독됐고, 이어 각계각층의 대표가 결의를 표명했다.

3.1절 기념대회의 주요 구호는 "위대한 민족해방투쟁인 3.1운동 제28주년 기념 만세", "3.1정신으로 통일독립 전취하자", "삼상회의결정 절대 지지", "10월인민항쟁 만세!", "농민에게 강제 공출 절대 반대" 등이었다. 이 외에도 "친일파를 처단하자", "부패 경찰을 몰아내자"와 "양과자를 먹지 말자"라는 구호도 등장했다.

또 기념식에서는 3.1절을 기념하는 동시에 진정한 독립을 위한 정치적 요구들도 쏟아졌다. 통일과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상생활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주장들이 기념식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민전, 민청, 부녀동맹, 학생들, 그리고 제주도민 모두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과 그것을 요구하는 당당한 모습으로 1947년 3월 1일의 그 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3.1절 기념대회의 주도 세력이었던 좌익세력에 대한 평가는 시간을 더 많이 필요로 할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들만이 3.1절 기념대회의 기치를 밝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평범한 마을 청년들의, 평범한 여성들의, 평범한 제주도민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녹아있었다. 좀 더 나은 세상,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 그리고 진정한 조국의 독립을 이룬 세상에 대한 일반 대중의 열망이 함께 했던 것이다.

제주도민이 혹은 다른 지역의 평범한 사람들이 좌익에게 그냥 이끌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였을까? 최소한 해방정국, 1947년의 3월에 제주도민은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역사를 대면하는 존재들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양정심씨는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입니다.



태그:#제주4.3, #제주4.3 범국민위원회, #4370신문, #1947년 3월 1일
댓글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2018년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아픈 역사의 정의로운 청산과 치유를 위해 전국 220여개 단체와 각계 저명인사로 구성된 연대기구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