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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어느 날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한 청년이 죽었다. 공안당국은 그 청년이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사인을 발표했다. 그러나 실은 물고문에 의한 죽음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밝혀졌다. 이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영화 '1987'에서 잘 소개된 것처럼 6월 항쟁의 촉발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재정권 아래에서 하루 혹은 한 달이 아니라 30여 년이나 모진 고문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이인모 선생님을 비롯한 비전향 장기수이다.

비전향 장기수란 단어 그대로, 사상을 전향하지 않아 오랜 세월 수감생활을 한 죄수라는 뜻이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북으로 복귀하지 못했거나 남쪽에 남아 전쟁을 이어가다 포로가 된 사람들이었다. 제네바협정에 따르면 전쟁포로는 전쟁 후 본국으로 소환해야 하나 남한 정부는 전쟁이 끝났음에도 그들을 북으로 송환하지 않고 존재를 숨긴 채 철저히 사회로부터 격리했다. 격리된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고문을 비롯한 비인간적인 탄압 속에서 사상을 '전향'할 것을 요구받으며 기약 없는 감옥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비전향장기수들도 출소를 하게 되었고, 이인모 선생님의 경우 88년에 밖으로 나왔다. 그후 1989년, 월간 잡지 '말'에 이인모 선생님의 기사가 실리며 비전향 장기수가 한국 사회에 이슈로 되었다. 이에 남과 북에서 이인모 선생님의 송환 여론이 높아져, 이인모 선생님은 1993년 북으로 송환되었다. 책 <전 인민군 종군기자 수기, 이인모>는 이인모 선생님의 수기를 '말'지의 기자 신준영씨가 정리하여 1992년 출판한 것이다.

이인모 선생님의 삶

이인모 선생님은 1917년 함경남도 풍산군 개마고원 지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일제에 맞서 싸우던 백두산 유격대를 보고 항일의지를 키우던 소년 이인모는 선배 및 친구들과 함께 항일운동에 뛰어든 후 스물한 살 때 서울로 옮겨 활동하였다. 45년 6월 일제의 지독한 탄압에 산속으로 피신한 지 2개월쯤 지나 산속으로 달려오는 사람들로부터 해방 소식을 듣는다. 이때가 선생님 나이 29세였다.

해방 후 이인모 선생님은 고향으로 돌아와 새 나라를 건설하는 데 힘을 쏟았다. 풍산, 흥남 지역에서 조선노동당 지역 선전국장으로 활동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쟁 후 이인모 선생님은 종군기자가 되어 전선을 따라 낙동강 유역까지 내려왔다. 북한군이 후퇴를 시작하자 이인모 선생님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유격대의 신문을 발행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던 중 52년에 국군에게 체포되어 광주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당시 선생님 나이 36세일 때였다.

이 항일운동과 해방 후에도 선생님이 겪은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많다. 이인모 선생님이 처음 경찰에 붙잡힌 것은 일제강점기인 16세 때였다. 당시 풍산 지역에 농민조합운동이 왕성해지자 일제 경찰은 이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는데, 16세 소년들까지도 모조리 잡아갔다는 것이다.

이에 이인모 선생님도 연루되어 동료들과 함께 끌려갔는데 일본 순사가 유치장 앞 복도에서 권총 소제를 한다며 권총을 꺼내 여기저기 겨누면서 까불다가 오발 사고를 냈다. 운 나쁘게도 그 총알이 이인모 선생님을 이끌어준 선배에게 가 닿았다. 일제 강점하에 조선인의 삶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 북한에서 친일 부역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도 눈여겨볼 법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 풍산경찰서 순사부장이던 일본인이 해방이 되자 도망치다 잡히게 되었다. 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조선인들이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이 한 행위가 드러날까 봐 겁을 먹고 저항하다 잡혔는데, 이들의 처분을 이인모 선생님이 맡게 되었다. 이인모 선생님은 그들의 친일 행적을 밝히고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느냐 물었더니, 증거가 명확하여 모두 변명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이인모 선생님이 "민족적인 양심으로 과오를 뉘우친다면 새 조국 건설에 참여할 기회를 주겠소"라고 하였더니,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기에 그 자리에서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이인모 선생님은 대담하게 포용하면 그들도 뉘우치고 자발적으로 민족적 대열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배웠기에 그렇게 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던 이인모 선생님은 52년 36세의 나이로 포로로 잡혀, 88년 72세가 되어서야 사회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분단이라는 괴물

순사 놈의 장난질에 조선사람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던 식민지 시절을 지난 이인모 선생님은 같은 민족에게 30여 년이나 갇혀 매일같이 악독한 고문을 받는 분단의 현실을 고스란히 마주하게 된다. 이인모 선생님의 말씀을 잠시 옮겨본다.

"떡봉이들(장기수들을 고문할 권한을 받은 일반 범죄자)은 우리들을 홀랑 벗긴 후 세면장으로 데리고 가 우리들의 알몸에다 얼음 같은 냉수를 퍼부어댔다. 그리고는 추위로 와들와들 떠는 우리를 알몸인 채로 꽁꽁 묶은 다음 공중에 매달아 놓고는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전향할래" 해서 "안 한다" 하면 계속 때리는데 살이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 등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참혹한 광경이었다.

단식 7일째인 7월 13일 감호소 측은 동지들을 차례로 끌어내 강제급식을 시행했다. 강제급식이라고 하면 호스로 묽은 미음을 주입하는 것인데 저들은 소금을 잔뜩 녹인 짠 소금물을 들이부었다. 우리가 물도 마시지 않으며 단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금물을 주입하여 목이 타서 할 수 없이 물을 먹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김용성, 최남규, 이종, 서준식 동지 등 네 사람이 감호과로 붙들려 갔을 때 최동지가 끌려들어가 보니 먼저 들어간 김용성 동지는 입에 거품을 물고 죽어가고 있었다, 최 동지는 "호스가 식도가 아닌 기도로 들어간 것 같았다"고 증언하였다."

대한민국은 전쟁 포로로서 전쟁이 끝남에 따라 북으로 송환해야할 이들을 구태여 붙잡아두고 어떻게 차마 인간으로선 할 수 없을 일을 하였는가. 이런 고문은 단지 사상을 포기하고 전향한다는 말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전향서를 받아낸대도 그 전향서를 쓸 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고작해야 남한의 체제 선전에 사용될 반북 보도를 하나 써내는 것일텐데, 그것이 비인간적인 탄압을 자행하고,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릴 만큼 소중했던 것일까. 냉수를 부어 추위에 떠는 몸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전향할래" 묻고 "안한다"고 답변하면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은 사람이라기보다 괴물의 모습 같다. 고문하는 형사들 또한 한 가정의 남편이고 부모이고, 누군가의 자식일텐데, 형사들보다도 분단 자체가 그렇게 태생부터 괴물인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지키는 것

어떻게 수십 년에 걸쳐 저런 고통을 받으며 어떻게 전향을 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전향한다는 말 한마디면 당장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이런 질문을 수없이 받았을 이인모 선생님은 이렇게 답하였다.

"인간으로서 차마 버텨내기 힘든 육체적 고통 아래서도 그놈의 사상을 버리지 않겠다니 빨갱이 사상이 무섭긴 무섭다고도 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가 굴복하지 않은 것은 빨갱이 사상 때문이 아니다. (중략) 고통만큼이나 강렬하게 치솟는 것은 고문하는 자들, 즉 인간의 탈을 쓴 야수들에 대한 분노이다.

차마 못 견딜 구타와 물고문 아래서도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한 우리 동지들이 악질 독종인가, 아니면 인간을 복날 개 잡듯 패면서 항복하지 않는다고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는 정치권력의 하수인들이 야수들인가."

이인모 선생님은 사상과 신념에 앞서 사람으로서 사람 같지 않은 자들, 즉 야수들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으로서 괴물이 사람다움을 꺾게둘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이인모 선생님의 수기를 엮어 책으로 낸 신준영 기자는 "계속되는 극한상황 속에서 인간의 정신세계가 대체 어느 정도까지 강인해질 수 있는가 하는 실험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에 대해 알게 되면서 존경심이 들게 된다면 신준영 기자의 말처럼 극한의 상황에 몰려가면서도 사람으로서의 존엄을 지킨 그 강인함 때문일 것이다.

이인모 선생님의 송환과 오늘

이인모 선생님이 출소하신 것은 87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화를 쟁취한 뒤인 88년이고 선생님의 이야기가 세상에 전해진 것은 89년이다.

출소 후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쪽의 양로원에서 지내시던 날, 설날을 맞으니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사무쳐 이인모 선생님은 어머니께 올리는 편지를 썼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인이 "편지를 직접 고향에 보낼 방법은 없지만, 신문이나 잡지에 실으면 어쩌면 고향에서 보실 수도 있지 않겠느냐"면서 고향에서 편지를 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려야 하지 않겠냐고 권하여, 부치지 못할 편지가 '말'지에서 기사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 편지를 받아 기사로 만든 신준영 기자는 "선생님께서는 원래 기자의 임무를 띠고 남쪽에 내려오셨는데 감옥 사시느라 그 일을 다 못하셨다고 봐야겠지요"라며 "구멍 뚫린 역사의 페이지를 복원하기 위해 그간 헤쳐오신 격동의 역사를 지금부터 꼼꼼하게 기록해나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라고 권하였다. 이인모 선생님은 이것이 역사와 시대의 요청이라 생각이 들어 선생님의 삶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 책이 <민군 종군기자 수기, 이인모>인 것이다.

한편, 이인모 선생님이 쓴 편지는 기사로 되어 지구 한 바퀴를 돌아 기어이 북녘에 가서 닿았다. 아래는 이인모 선생님의 아내 김순임 씨에게서 온 답장의 일부이다.

"리별의 그날로부터 어언 세월은 흘러 어제 날의 23살 꽃나이 청춘이 64살의 로파가 된 한 녀인이 남편을 소리쳐 부르며 흘리는 눈물 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과 고뇌가 깃들어 있는지 당신은 리해하실 겁니다. 그것은 한 달도, 십 년도, 이십 년도 아니요 장장 40년 세월 시어머니와 딸애의 눈에라도 띄울가보아 그녀들이 잠든 깊은 밤에 홀로 흘리고 흘려온 눈물이랍니다."

이 이야기가 세상에 퍼지면서 남에서 북에서 이인모 선생님을 송환하라는 요구가 빗발쳐, 93년에 북한으로 가실 수 있게 되었다. 이때가 77세 때의 일이다. 비전향 장기수는 이인모 선생님뿐만이 아니었는데, 7년 뒤인 20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하고 발표한 6.15 공동선언에 따라 63분의 비전향 장기수들도 송환되었다. 전쟁 직후 좌익 사범이 수천 명이었다고 하니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국가가 뜻을 꺾어버린 이는 몇이며 목숨을 잃은 이는 또 몇이었겠는가.

이 책은 선생님이 송환되기 한 해 전에 출판한 책이어서 송환을 희망하시던 중이었다. 내가 빨리 고향으로 갔으면 하는 바람보다 더 간절한 소망은 민족의 진정한 화해라고 하시던 이인모 선생님이 수기를 끝맺으며 쓴 마지막 글을 옮긴다.

"손도 발도 머리도 쓸모없게 된 나이기에 나는 이제 정성 어린 기다림을 시작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던가. 늙고 병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 노인이 마지막 기력을 쏟아붓는 이 간절한 기다림이 분단의 장벽을 녹이는 한 줌 온기가 되기를 기대하며 오늘도 나는 기다림의 나날을 계속하고 있다."

이 책이 발표된 후 벌써 25년이나 지났다. 이인모 선생님은 북에서 2007년 사망하셨다. 아직 분단은 그대로이지만, 이인모 선생님이 남긴 한 줌 온기는 오늘날 평창에서, 서울과 평양에서 만난 남녘과 북녘 동포들의 웃음과 눈물, 악수와 포옹 속에 느껴지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주권방송에도 게재되었습니다.



태그:#이인모, #북한, #서평, #통일, #장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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