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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들이여, 피해자 말고 가해자를 때려라
 남자들이여, 피해자 말고 가해자를 때려라
ⓒ pixabay 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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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자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자로 살았고, 특별히 변동사항이 없는 한 쭉 남자로 살게 될 것 같다. 내가 선택하거나 성취한 게 아니니, 남자라는 게 수치스러울 이유도, 자랑스러울 까닭도 없다.

꽤 긴 세월을 남자로 살아왔지만, 최근에야 '남자'라는 생물학적 범주가 얼마나 질기고 모순적인지 깨닫고 있다. 오직 같은 남자라는 이유로 범죄를 감싸고 묵인할 뿐 아니라, 한술 더 떠 피해자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제 와서? (가해 혐의자가) 뜨고 나니 지도 뜨고 싶나?"
"원체 XX들 성폭력 무고가 많아서 무조건 믿으면 안 되고 수사결과를 기다려야 함."
"미투의 절반이 무고던데 처벌 강화하자."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역이용해서 돈 뜯어내는 꽃뱀들도 수사해라."


성폭력 사실을 밝히는 '미투(MeToo)'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다. 앞에 인용한 글들은 비교적 '얌전한' 축에 속한다. 역시나, 그 지겨운 '꽃뱀' 이야기가 여기서도 등장한다. 성폭력이 절반이 허위라더니, 이제는 미투 운동의 절반이 사기극이란다.

나는 이 '제멋대로 통계'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 무시해 왔지만, 놀랍게도 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할 수 없이 이들을 위해 꼼꼼히 계산을 해서 '성범죄 허위신고율은 0.5% 미만'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었다(관련 기사 : 성범죄 18~50%가 '꽃뱀 자작극'이라고?). 하지만 이들의 억지는 끝나지 않았다.

본래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이들을 설득할 방법은 없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이들의 2차가해 행위에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기만 하면 된다. 무책임한 가학 행위로 인해 성폭력 생존자들에 고통받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꽃뱀 설화'를 신봉하는 분이 있다면, 앞의 기사 "성범죄 18~50%가 '꽃뱀 자작극'이라고?"를 읽고 오시기 바란다.

'미투'에 대한 가학적 조롱, 어떻게 봐야 하나?

어렵게 용기를 낸 성범죄 생존자를 비난하는 행위는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문제는 단지 산수실력 부족이나 비합리적 사고만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이 뒤죽박죽인 사람들에게도 공감능력은 있기 때문이다.

남성들 대부분은 고용주의 비인간적 횡포와 '갑질' 보도에 즉각적 분노를 쏟아낸다. 하지만 그 고용주가 성폭력 가해자가 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예컨대 여성 직원이 남성 상사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말하면, '왜 즉각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냐'며 '꽃뱀'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직장 안에서 부당대우, 언어폭력, 심지어 신체폭력 등을 경험하고도 말 한마디 못하는 남성 노동자들의 심정은 이해하면서, 성폭력 피해자에겐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

경제적 착취와 성적 폭력은 모두 같은 이유로 발생한다. 바로 힘의 불규형이다. 하지만 '갑질'에 성별 구분이 드러나는 시점부터 '남성 을'들은 교묘히 입장을 바꾼다. 모순은 그것만이 아니다.

남성들은 교통사고 가해자에게 금전적 배상이나 합의금을 요구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긴다. 법이 보장한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이 성범죄 가해자에게 '금전'이라는 말만 꺼내도 확실한 '꽃뱀 증거'가 된다.

심지어 가해자가 형량을 낮추기 위해 피해자에게 합의금을 제시하며 끈질기게 합의를 종용한 뒤 나중에 '돈을 요구했다'며 '꽃뱀'으로 모는 사례까지 있다. 교통사고 합의금을 받은 남자들이 '살모사', '구렁이', '자해공갈단' 따위로 비난받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한국 여성들이 바로 이런 곳에 살고 있다. 

 한국여성연극협회 관계자들이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연극계 성폭력 사태를 규탄하며 미투(#Me_Too)운동을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2018.03.08
 한국여성연극협회 관계자들이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연극계 성폭력 사태를 규탄하며 미투(#Me_Too)운동을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2018.03.08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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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문화가 만들어낸 공감부재

21세기 들어 공감에 대한 생물학적, 사회학적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최근 공감 연구가 밝혀낸 가장 중요한 성과는 공감이 본능에 속하는 능력으로, '타인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배려'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이다.

아이가 울면 주위의 다른 아이도 따라 운다. 아기의 울음이 자신의 고통, 배고픔, 불편함을 해소해 달라는 외침이라는 점에서, 울음에 동참하는 행위는 공동체 일원의 고통을 속히 해결하라는 연대 시위인 셈이다. 제대로 된 공동체는 개인의 아픔을 공동체의 아픔으로 여긴다. 이 점을 말을 못하는 아이들도 안다. 

연대의 도움 받았던 아이는 남이 울 때 연대의 목청을 돋우는 것으로 보답한다. 공동체의 도움을 받은 개인은 공동체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길 줄 안다. 이 연대는 성별, 나이, 피부색을 가리지 않는다.

공감 능력은 성인이 된다고 자연적으로 소멸하지 않는다. 누군가 문틈에 손가락이 끼이거나 넘어져 무릎이 깨지면, 그 장면을 바라보는 순간, 내 표정도 일그러진다.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다. '남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공감의 사전적 정의다.

우리는 이런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을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일부 남성이 성폭행 생존자를 조롱하면서 가해행위를 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제러미 리프킨이 <공감의 시대>에 쓴 내용이 단서를 준다.

"공감의식이 아동기, 청소년기, 성인기를 거쳐 얼마나 발달하고, 넓어지고, 깊어지는가는 부모가 초기부터 아이를 어떻게 기르느냐에 달려 있다. 아울러 그 아이가 태어나 습득하게 되는 문화권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우리는 공감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지만, 이 능력은 후천적으로 확장될 수도 있고 소멸할 수도 있다. 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가정과 사회 속의 교육과 집단문화이며, '공감부재'의 주범은 성폭력을 가벼이 여기는 강간문화(rape culture)다. 이 집단문화 속에서 남성들은 공감능력에 반하는 행위를 부추기면서 관심과 주목으로 서로를 보상한다.

타인의 고통을 유희로 삼는 집단

만일 누구의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상황에서 히히덕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대분의 사람들이 '사람도 아니다'라고 비난할 것이다(보다 정확한 표현은 '짐승도 아니다'이다. 침팬지, 보노보 등의 영장류는 물론, 개나 고양이, 쥐 등의 포유류 대다수가 공감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공포영화를 연구하고 있다. 내 관심사는 바로 앞의 상황, 즉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상황'을 유희로 만들어 내는 영화적 장치다. 사람들은 공감능력이 있기 때문에, 극중이라도 타인의 생생한 고통은 불쾌한 자극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포영화에는 공감을 차단하는 서사적 장치가 필요하다.

가장 흔한 수법은 고통받는 등장인물을 '고통받아 싼' 악당으로 만드는 것이다. <쏘우> 같은 선혈 낭자한 '슬래셔' 영화를 보라.  고문도구에 이리저리 찔리고, 눌리고, 잘리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마약중독자, 부패한 경찰, 악덕 보험사 직원 같은 사람들이다. 이 '타자화' 장치 때문에 공포영화는 대개 진부한 도덕극의 모양새를 띠게 된다.

과거에는 쾌락을 추구하는 여성이 공포영화의 주된 표적이었다. 예컨대 성을 탐닉하는 '부도덕한' 여성이 등장하면, 그는 영락없이 잔혹하게 살해당하곤 했다. 가부장적 성윤리를 '공감차단 장치'로 사용한 것이다.

한국의 여성혐오나 강간문화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관점에서 여성은 편협한 기준으로 남성 파트너를 고르는 이기적 존재이고 (남성들이 얼마나 '이타적 기준'으로 여성을 고르는지는 중요치 않다), 돈 몇 푼 받아내기 위해 남자의 등이나 치는 '꽃뱀'이며, 떼로 몰려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페미나치'로 묘사된다.  

타자화는 여성의 고통을 조롱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혐오사이트 '일베'를 보라. 이들은 반말쓰기로 '동료의식'을 강화하는 가운데, 여성에 대한 잔인한 발언과 행동을 '추천'으로 보상한다. 이들은 여성이 차에 치이는 장면을 게시판에 올린 뒤 히히덕 거리며 성적인 농담까지 주고받는다.

이 잔인하고 가학적 쾌락과 '꽃뱀론'으로 대표되는 '피해자 때리기'는 모두 공감부재라는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 '일베'는 강간문화가 특정 매체 형태로 구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터넷에는 강간문화를 공유하고 재생산하는 '정상적인' 유머, 기술, 취미 사이트가 즐비하다.

이처럼 강간문화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일상적 술자리, 강의, 업무, 회의, 친목 모임 속에도 존재한다. '일베' 등을 혐오하는 '괜찮은 남자들' 사이에도 존재한다.

 남자들이여, 피해자 말고 가해자를 때려라
 남자들이여, 피해자 말고 가해자를 때려라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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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 '유투(#YouToo)'를 제안한다

내가 속한 집단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그것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교회든 절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경찰이든 검찰이든 마찬가지다. 우리 앞의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생애를 바쳤고, 그로 인해 우리는 더 나은 세상에 살게 되었다. 우리가 내부고발자를 보호하고 존경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일 자신이 속한 집단이라는 이유로 그른 일이 바른 일이 되고, 바른 일이 그른 일이 된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이런 무리를 '범죄 집단'이라 부른다. '미투 운동'도 마찬가지다. 성폭력은 주요 가해자 집단인 남성이 나서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이제부터라도 동료, 후배, 선배, 상사의 성폭력 행위를 목격하면 그 자리에서 지적하거나 고발하라. 이것은 피해자를 배려하는 것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가해자를 돕는 일이다. 당신이 아끼는 사람이 계속 범죄를 저지르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페미니스트로 길러야 한다. 꿈을 성취하도록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꿈이 한순간에 날아가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검사, 고위 공무원, 기업인, 교수, 작가, 연예인, 영화감독, 예술가가 평생 쌓아 온 꿈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의 자녀가 다른 이의 꿈을 파괴하는 범죄자가 되는 것만큼 불행한 사태는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 교육'이 거창한 것도 아니다. 내가 특별한 만큼 남도 특별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누구든, 그의 의사를 묻고 존중하라고 가르치면 된다.

공감능력은 남을 향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가 남을 배려하면 남도 나를 배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동체, 즉 '사람 사는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당신이 '남성'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면, '유투'에 참여하길 제안한다.

만일 같은 남성의 성폭력을 지적하거나 고발할 용기가 없다면, 성폭력 생존자에게 '왜 이제 와서' 따위 말은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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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와 <미디어기호학>을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