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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경우 기록이 많지 않은 관계로, 기록 이외에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는 유물 등을 통해 고대사의 빈 공백을 채운다. 지금은 작고한 고 이근직 교수나 김용성 박사 등 신라왕릉을 연구한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왕릉의 범주로 추정할 수 있는 시기를 마립간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인왕동 고분군, 경주 시내에서 덩치 큰 고분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인왕동 고분군 인왕동 고분군, 경주 시내에서 덩치 큰 고분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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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마립간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이 한반도에서는 오직 신라에서만 등장하고 있고, 출토되는 유물 역시 신분의 격을 알 수 있을 만한 유물이라는 점에서다.

크기에서 알 수 있듯 덩치 큰 고분의 경우 도굴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웠기에 발굴조사로 출토되는 유물의 분석을 통해 왕릉의 추정이 가능했다. 이러한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황금문화로 대표되는 신라 금관으로, 오늘은 적석목곽분과 신라 금관을 통해 당시의 시대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마립간 시대를 말해주는 적석목곽분과 신라 금관

통상 마립간 시대는 내물왕(재위 356~402)을 시작으로 지증왕(재위 500~514)에 이르는 시기로, 이 시기 집중적으로 덩치 큰 고분들이 조성되었다. 지금 우리가 경주 시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고분들이 마립간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덩치 큰 고분들은 마립간 시대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인왕동 고분군 중 27호분인 내물왕릉, 마립간 시대를 열다.
▲ 내물왕릉 인왕동 고분군 중 27호분인 내물왕릉, 마립간 시대를 열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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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시대는 기존과 다른 변화의 시대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우선 내물왕 때 신라의 왕호 변경이 이루어졌다. 기존의 '이사금(尼師今)'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변화됐다. 한편 동시대의 금석문인 '충주고구려비'와 '울진봉평신라비' 등에서 신라의 왕을 '매금(寐錦)'으로 칭한 것을 볼 수 있어 왕호의 변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릉원(大陵苑)'으로 상징되는 덩치 큰 고분들의 존재는 공통적으로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으로 불리는 묘제 양식으로 조성이 되었다. 동시대 한반도의 국가에서는 오직 신라에서만 등장하고 있는데, 놀라운 건 이러한 적석목곽분에서 신라의 황금문화를 상징하는 신라 금관이 출토된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 금관은 총 5기(금관총, 황남대총 북분, 천마총, 금령총, 서봉총)가 확인되었다.

황남대총의 전경, 발굴조사를 통해 북분에서 신라 금관이 출토되었다.
▲ 황남대총 황남대총의 전경, 발굴조사를 통해 북분에서 신라 금관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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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의 출현 시기를 보면 적석목곽분이 출현한 시기와 동일한 것을 볼 수 있어, 마립간 시대를 규정하는 유물로 평가된다. 이러한 신라 금관의 외형은 '출(出)'자 형태의 신목과 사슴뿔 2개가 원형을 이루고 있는 모양이다. 보통 신목으로 표현되는 나무는 과거 샤먼이 하늘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이러한 신라 금관은 왕과 제사장의 역할이 하나인 제정일치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보통 금관을 떠올리면 왕만 쓴다고 인식하기 쉬운데, 신라 금관은 왕 이외에 왕실 가족도 함께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사실은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과 금령총 금관을 통해 알 수 있다.

황남대총 북분의 경우 함께 출토된 은제 허리띠 장식에서 '부인대(夫人帶)'라는 명문을 통해 여성으로 추정되며, 금령총 금관의 경우 다른 금관에 비해 크기가 작기 때문에 어린아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옛 백제 지역인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출토되는 백제 금동관 역시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데, 지방세력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고분에서 금동관이 나온 점은 백제의 지방통치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로 여겨진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 出자 형태의 신목과 사슴뿔 형상을 하고 있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직접 촬영
▲ 황남대총 북분 신라 금관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 出자 형태의 신목과 사슴뿔 형상을 하고 있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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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왕이라는 호칭 역시 왕만 쓴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왕의 친족에 부여되는 '갈문왕(葛文王)'의 호칭과 포항에서 발견된 냉수리비에 등장하는 '차칠왕등(此七王等)', 금관총에서 출토된 세고리자루큰칼에 등장하는 '이사지왕(尒斯智王)'의 명문과 함께 원성왕이 왕위를 두고 경쟁을 벌인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했던 사례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마립간 시대의 위기와 극복 과정, 나제동맹의 체결

신라 김씨의 세습왕조가 이어진 마립간 시대는 신라의 역사에서 보면 위기와 극복의 시대였다. '광개토태왕비문'은 경자년(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해 신라를 구원한 사실을 적고 있다.

내물왕 당시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신라로 쳐들어오면서 이에 자체적인 힘으로 막기 어려웠던 신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광개토태왕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원정군을 보낸 것이다. 이러한 위기는 임라가라 종발성에서의 전투를 끝으로 고구려의 승리로 귀결되며, 신라는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마립간 시대에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알려주는 ‘충주고구려비’ 사진 : 충주고구려비 전시관 직접 촬영
▲ 충주고구려비 마립간 시대에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알려주는 ‘충주고구려비’ 사진 : 충주고구려비 전시관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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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구원의 대가로 신라는 고구려에 예속화되는 처지가 되었는데,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충주고구려비'와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명 그릇'이다.

'광개토태왕'의 명문이 새겨진 호우명 그릇이 경주 시내에서 출토된 부분이나, 충주 고구려비에 새겨진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의 명문을 통해 당시 신라에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했다는 점은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알려준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내물왕이 세상을 떠난 뒤 고구려는 인질로 와있던 실성을 왕으로 옹립하고, 실성왕(재위 402~417)은 인질이라는 명목으로 내물왕의 아들인 미사흔을 왜로, 복호를 고구려로 보내버렸다.

이는 실성왕이 내물왕이 아들이 아니었다는 점과 고구려에 의해 왕이 된 측면에서 입지가 약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실성왕은 고구려의 힘을 빌려 남아있는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를 제거하려 했지만, 오히려 고구려의 군대에 실성왕 자신이 죽임을 당했다.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명 그릇’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직접 촬영
▲ 호우명 그릇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명 그릇’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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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새롭게 왕위에 오른 눌지왕(재위 417~458)은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강했는데, 백제의 손을 잡고 고구려에 대항하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졌다. 당시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수탉을 죽여라'라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는 나라 안의 고구려 사람을 죽이라는 의미였다. 이러한 눌지왕의 반 고구려 정책은 당시 고구려의 기세에 눌리던 백제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역사상 '나제동맹'으로 불리는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처럼 마립간 시대의 덩치 큰 고분과 적석목곽분의 묘제 양식은 당시의 시대를 보여주는 지표 유물로 평가된다. 또한 신라의 역사에서 오직 이 시기에만 출토된 신라 금관은 신라 김씨의 세습왕조 구축과 당시 왕의 권력과 제사장의 권력이 하나인 제정일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러한 제정일치의 분리는 뒤에 법흥왕 대에 이루어진 율령의 반포와 불교의 공인으로 사라지게 되고, 신라 금관 역시 더 이상 역사에 등장하지 않다는 점도 이 시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신라왕릉답사 편> 내용을 일부 참고해 새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태그:#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 #마립간시대, #적석목곽분, #신라 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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