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 고대사의 국가 중 신라의 왕위 계승은 독특한데, 고구려나 백제 등 대부분이 단일한 왕계를 이어온 반면 초기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이 번갈아가며 왕위에 오르는 특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건 이들 각 성씨의 시조가 난생설화나 이와 유사한 설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시조들에게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로, 또 다른 난생설화의 예인 '탈해왕릉'과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탄생한 '계림(鷄林)'을 통해 이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경주시 동선동에 자리한 탈해왕릉
▲ 경주 탈해왕릉 경주시 동선동에 자리한 탈해왕릉
ⓒ 김희태

관련사진보기


탈해왕의 난생설화와 이사금의 의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탈해왕(=탈해)의 출신은 명확히 이주민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록마다 일부 차이는 있지만 탈해왕의 아버지가 다파니국(혹은 완화국, 용성국)의 왕으로 등장하고 있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 주석을 남겨 용성국이 왜국의 동북쪽 1천 리에 있다고 했는데, 이를 통해 탈해왕은 박혁거세와는 다른 남방계 출신인 것을 알 수 있다. 탈해왕(재위 57~80)의 난생설화는 알을 배에 띄워 보낸다는 점에서 성경이나 그리스 신화와도 일부 유사점이 있다.

난생설화의 내용은 임신한 왕비가 알을 낳자 이를 괴이하게 여긴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 여겨 알을 궤짝에 넣고, 배에 실어 바다로 보냈다. 배는 금관가야를 거쳐 경주의 동쪽인 '아진포(阿珍浦)'에 멈추고, 노파에 의해 발견이 되면서 키워지게 된다는 요지다. 이러한 난생설화는 부여의 건국 시조인 동명왕 설화를 비롯해, 고구려 건국 시조 추모왕 설화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측면에서 바라본 탈해왕릉의 모습
▲ 경주 탈해왕릉 측면에서 바라본 탈해왕릉의 모습
ⓒ 김희태

관련사진보기


노파의 양육 아래 성장한 탈해를 눈여겨본 남해왕(재위 4~24)은 자신의 딸 '아효부인(阿孝夫人)'을 탈해와 결혼시키며 사위로 삼았다. 이 결혼을 통해 탈해는 왕실의 일원으로 편입이 되는데, 훗날 성씨가 다름에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신라의 역사에서 성씨가 다름에도 왕위에 올랐던 경우가 제법 있는데, 예외 없이 사위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권력을 공유할 수 있는 집단의 편입 유무로 나누는 기준이 되었던 셈이다.

탈해가 왕위에 오르기 전 재미있는 일화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른바 '떡과 이빨자국'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남해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이 되는데, 삼국사기에는 당시 태자였던 유리왕(재위 24~57)이 덕망이 있던 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던 장면으로 시작한다.

물론 탈해는 사양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서로 양보가 오가는 과정에서 합의안으로 도출된 것이 연장자가 왕위에 오르자는 것이다. 그런데 연장자를 구분하는 방법이 재미있다.

당시 떡을 깨물어 이빨 자국이 많은 사람을 연장자로 구분했는데, 유리왕의 이빨 자국이 더 많았기 때문에 유리왕이 먼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일화는 당시 신라의 왕호인 '이사금(尼師今)'이 연장자를 뜻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 있게 바라볼 일화다.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는 경주 계림

유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탈해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이를 통해 당시 탈해의 기반과 세력이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탈해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왕실의 권력을 공유하는 집단에 포함이 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통해 탈해는 석씨계 최초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한편 이 무렵 '계림(鷄林)'에서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탄생했다.

경주 계림,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는 현장이다.
▲ 경주 계림 경주 계림,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는 현장이다.
ⓒ 김희태

관련사진보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계림 숲의 나무에 걸려 있던 금 궤짝 아래 흰 닭이 울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해 금 궤짝을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다는 것이 김알지 탄생설화의 핵심이다. 삼국유사에는 탈해왕이 김알지를 궁으로 데려와 태자로 삼았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기에 김알지는 신라의 시조 가운데 유일하게 왕이 되지 못한 경우다.

신라 김씨는 이후 김알지의 7대 손인 미추왕이 최초로 왕위에 오르고, 이후 내물왕의 즉위와 함께 세습왕조를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는 경주 계림은 경주 나정과 함께 성스러운 장소로 인식이 되었으며, 지금은 1803년에 세워진 계림비가 전해져오고 있다.

석씨계 왕릉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탈해왕릉

탈해왕릉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편으로 교차분석을 통해 왕릉의 위치를 유추해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탈해왕릉이 성의 북쪽 양정(壤井) 언덕에 있다고 했으며, 삼국유사의 경우 문무왕의 꿈에 탈해왕이 나타나 왕릉을 파내어 자신의 뼈로 소상을 만들 것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소상을 토함산에 두라고 했는데, 문무왕은 이 말을 따라 최초 조성된 탈해왕릉을 파내어 뼈를 모아 소상을 만들었다. 즉 문무왕 대에 기존의 탈해왕릉은 없어지고, 그 대신 소상을 토함산의 사당에 모셨다는 것이 핵심이다. 실제 토함산의 중턱에서 사당의 흔적이 확인되면서 기록과 현장이 일치하고 있다.

탈해왕의 사당인 숭신전의 모습
▲ 숭신전 탈해왕의 사당인 숭신전의 모습
ⓒ 김희태

관련사진보기


현재 탈해왕릉으로 전해지는 왕릉의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도굴로 인해 고분의 내부가 드러난 바 있는데, 신라 후기의 묘제 양식인 석실분으로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초기 묘제 양식인 '목관묘'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고고학적으로 현재의 탈해왕릉이 당시의 왕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제기된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온 전승의 개념과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로서 탈해왕릉은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시조들의 탄생설화를 통해 당시 신라 사회가 이주민들에게 열려 있는 사회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반면 오늘날 다문화에 대한 혐오와 공포가 만연해 있는 현실과 비교해보면 생각해볼 점이 많은데, 탈해왕릉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눈여겨볼만한 역사의 현장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신라왕릉답사 편> 내용을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경주계림, #탈해왕릉, #김희태, #김알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에 이야기를 더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