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는 한때 박상륭 마니아였다. 박범신의 장편소설 <유리>를 마주하자 제목 때문에 <죽음의 한 연구>를 떠올린 이유다. <죽음의 한 연구>에서 등장하는 '유리'는 수도승들이 거처하는 메마른 땅이다. 선지식이라 할 인물들이 대물림하듯 살부(殺父)하는 신화적 공간이다. 그 '유리'의 진한 관념성을 설마 <유리>에서 마주하지는 않으리라 싶다. 박범신은 감성어가 뛰어난 베스트셀러가 많지 않은가.

책표지
 책표지
ⓒ 김유경

관련사진보기


<유리> 출간을 늦추게 한 성추문 때문에 재조명 받은 <은교>도 노인의 감수성을 띄운 작품이다. 감성적 언어 세계가 관념성과 동떨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유리>는 2016년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할 당시 9만 이상의 독자층을 확보한 웹소설 태생이다. 결코 무거운 이야기는 아니리라.

내 궁금증은 '프롤로그-유리 할아버지'에서 일단 풀린다. 첫 문단부터 이야기를 풀어내는 "유리流離"는 이야기 화자이자 이야기 속 주인공이다. 한자병용 표기는 유리가 떠도는 신세의 은유임을 밝힌다. 허나 만만하지 않다. 유리는 자신의 어릴 적 비범함을 "사람들은 내 혀가 유난히 길다고 말했다"로 뭉뚱그리더니, 17살에 "나의 죽음"을 보았다고 복선을 깐다.

게다가 갓 도착해 난생 처음 만난 손녀는 "나의 할아버지 미스터 유리"라는 형용 모순의 호칭을 쓴다. 부쩍 호기심이 이는데, 보아하니 <유리>는 액자소설이다. 서술자 손녀가 유리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고, 독자는 손녀가 전하는 유리 이야기를 듣는 격이다. 부제 '어느 아나키스트의 맨발에 관한 전설'이 유리 이야기인 거다.

<유리>는 유리의 일대기(1915~2015)를 통해 동아시아 현대사 100년을 흝어 보인다. "수로국"(한국), "화인국"(일본), "대지국"(중국), "풍류국"(대만) 등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짐승의 시대"가 유리가 떠도는 시공이다. 유리가 17살에 양부 큰아버지를 죽이고 길로 나선 이후 위안부 피해자 "김점순"과 동거하기 전까지, 즉 1931년부터 유신시대까지를 다룬다.

어머니와 간음하고 친일행위에 앞장선 큰아버지를 단죄한 후 유리는 뿌리 뽑힌 자가 된다. 이제까지의 삶에 근거한 정체성 일체를 내버린 채 길로 나섦이 "아나키스트의 맨발"이다. 그것은 "이념적 체제와 제도에게 소속되는 게 삶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길이라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 자유인의 행보로 이어진다. 17살에 동굴의 샘에서 본 주름살투성이 노인이 되는 길이다.

자유인 유리의 오롯한 수단은 "긴 혀"다. "긴 혀"는 <유리>가 구축하는 초현실적 세계의 토대다. 구렁이와 놀면서 혀가 길어졌다든가, 은여우・원숭이・햄스터・고양이와 말이 통해 위기를 모면한다든가, 동굴 속 샘물에 비친 자기 죽음을 본다든가, 긴 혀로 "수운마님"의 귓병을 낫게 한다든가 등의 우화와 판타지는 진실한 소통이 부재한 현실을 손가락질한다. 그래서 "긴 혀"는 사막 같은 현실에서 오아시스 같은 삶을 일구는 "착한 권력"과 동격이다. 

그러나 역사적 질곡의 현장에서 "긴 혀"로 아나키스트적 삶을 꾸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도망자로서 건너간 중국 대륙에서 어찌어찌 항일운동을 하다 다시 길로 나선다. 첫 연심 "붉은댕기"의 자취를 뒤따르다 머물게 된 오아시스 마을까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번져 또 떠돌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대만에서 살만해졌을 때 화교 신분으로 한국전쟁에 합류한 후 경제적으로 성공했지만, 반공 이데올로기로 포장한 유신 시절의 희생양이 된다.

아나키스트의 긴 혀가 무용지물임을 깨달은 유리는 급선회한다. 정보부에서 고문 받다가 기억상실증에서 놓여나 본명 "梁 炯國"이 생각난 게 일조한다. "한 통속이 되어 엮이는 흐름이 역사라 할진대, 그것을 거부하고 얻는 자유가 과연 어디 있겠는가"는, 체제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의 자유론과 어긋난다. 국적과 이름을 되찾아 정체성을 회복해야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뒤늦은 자각은, 유리를 위안부 피해자 김점순과 결혼해 정착하는 삶으로 이끈다.

그렇다고 유리가 진담을 소통시키는 긴 혀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비록 유리는 "짐승의 시대"를 끝장내는 긴 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지만, 자기 이야기를 전달함으로써 손녀와 배턴 터치를 하게 된다. "'나의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던 손녀는 유리의 이야기를 들은 후 무거운 역사를 재밌게 들려주는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역사학자"가 되려는 포부를 밝히기 때문이다.

장차 역사를 짊어질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긴 혀를 만들겠다는 손녀는, 웹소설 <유리>를 선보인 작가 박범신의 바람을 대변한다. <유리>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치유에 대해 '수요집회(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를 암시하며 젊고 활달한 "이장의 손녀"를 띄운 것도 마찬가지 예다.

이래저래 <유리>가 비중 있게 물고 늘어진 "짐승의 시대"는, 이 땅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우상화로 치달은 박통의 역사 왜곡이다. 둘은 국민을 우중(愚衆)으로 만들어 부린 집단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유리>는 '어느 아나키스트의 맨발에 관한 전설'의 허구로써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해 새삼 국민의 정체성 회복을 역설한 셈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정체성 회복은 일회성 과업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 뿌리내리고 살면서 순간순간 깨어 있어야 지속가능하다. 그걸 행하는 자유정신의 은유가 "말굽" 같은 뒤꿈치를 만들어 주름살마다 이야기를 가득 채우고 죽은 유리 이야기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 여기의 적폐청산을 국민의 이야기가 깃든 역사적 주름살로 만들려면, 피로감 운운을 활기차게 딛고 줄기차게 나아가야 한다. 

어쨌거나 <유리>는 유리 캐릭터를 통해 무거운 현대사를 보통사람 친화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또한 보편적인 삶의 가치 부재를 공적 역사에서 문제 삼은 <유리>는 작가의 감성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의 기존 작품들과 다르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작가 박범신이 추문을 제대로 딛고 보다 폭넓은 독자층을 아우를 새 이야기를 들려주길 바란다.


유리 - 어느 아나키스트의 맨발에 관한 전설

박범신 지음, 은행나무(2017)


태그:#장편소설 유리, #박범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온갖 종류의 책과 영화를 즐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