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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달리십니까?"

여전히 지인들을 만나면 건네 오는 인사말이다. 10년 넘게 사막과 오지를 달리고 있으니,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달리고 운동량도 엄청날 것으로 지레 짐작하는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 게다가 사람들은 내가 잔병 없고 지치지도 않는 철인으로 안다.

하지만 나는 슈퍼맨이 아니다. 세상이 외로울 땐 발걸음이 무겁고, 직장 일로 늘 스트레스를 달고 산다. 초여름엔 거르지 않고 감기에 걸리고, 요즘은 시력까지 눈에 띄게 떨어졌다. 나는 두 녀석을 둔 가장이고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다.

스리랑카 정글에서
▲ 나는 요즘도 달린다 스리랑카 정글에서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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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라아 락 정상에서
▲ 정글 210km를 함께 뚫은 전사들 시기라아 락 정상에서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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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처럼 오지 레이스는 내 삶의 진한 일부가 되었지만 출전 때마다 최상의 컨디션이나 단련된 몸을 유지하는 건 아니다. 바쁜 직장 일에 허덕이다 턱없이 부족한 훈련 상태로 출국할 때도 적지 않다.

2015년 연초 주택과로 근무부서를 옮기고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재건축사업과 주거환경관리사업에 공동주택 관리업무까지. 매일 반복되는 야근으로 제대로 된 운동은 꿈도 꿀 수 없는 먼 남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다 찾아온 지독한 유혹에 겁 없이 스리랑카 레이스에 도전장을 던졌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그해 5월, 나는 평범한 직장인에서 대범한 오지레이서로 옷을 바꿔 입고 인천공항 출국장을 빠져나왔다.

'기계나 사람이나 녹슬면 쓸모없는 고철로 전락할 뿐이다.' 8시간 비행 끝에 홍콩을 경유한 비행기가 콜롬보에 도착했다. 인도 남부 타밀라두주와 마주하고 있는 인도양의 섬나라. '동양의 진주'라 할 만큼 아름답고, 고대 문명의 보고(寶庫)로 불리는 스리랑카에 발을 들여 까마득한 시간과 마주했다.

출발 전 야파후와 사원에서
▲ 승려들의 무사완주 기원 의식 출발 전 야파후와 사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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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본 시기리아 락 전경
▲ 밀림 속 천상의 요새 하늘에서 본 시기리아 락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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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정글 레이스 중에
▲ 뛰어야 살 수 있다 스리랑카 정글 레이스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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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흥분과 설렘도 잠시.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에 입술이 터지고 수포까지 생겼다. 콜롬보에서 북동쪽으로 100km를 이동해 야파우와에서 하루를 보낸 후 곧바로 레이스에 돌입했다.

5박 6일 동안 밀림과 늪, 산야와 임도 210km를 달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인 밀림 속 천상의 요새, 시기리아 락 정상에 종지부를 찍었다. 폭염과 높은 습도 속에 4일을 달리다 5일째부터 퍼붓던 폭우는 레이스 마지막 날까지 멈추지 않았다. 질컥이는 신발 속 발바닥이 물집으로 부르터 만신창이가 되었다.

매일 아침, 출발은 순조로웠지만 캠프가 가까워 오면 죽을 만큼 힘들었다. 툭툭이의 유혹, 주로를 잃고 왔던 길을 더듬어가는 허탈감, 눈에 핏발을 세우며 허벅지 통증을 참아냈다. 두 다리는 앞을 향해 내딛지만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사력을 다했다. 나는 매일 나를 모두 태우며 밀림에서 6일 밤낮을 보냈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어떤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이해인 시인)이기 때문이다. 죽을 만큼 힘들어도 캠프에 들어서면 안도의 한숨과 내일의 여정을 떠올렸다.

주로에서 만난 학생들
▲ 이수뚜띠(*안녕하세요?) 주로에서 만난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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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중에 만나 친구, 공작
▲ 짐짓 야생 꽃 인줄 알았다는... 레이스 중에 만나 친구,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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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4일째(55.8km), 새벽 6시 30분 캠프를 떠난 선수들이 종일 밀림과 습지를 맴돌았다. 오후 2시를 넘겨 간신히 밀림지역을 벋어나 캠프로 향하는 마지막 CP5(9.9km) 구간에 들어섰다. 긴장이 풀릴 때 위험이 찾아온다. 계곡물을 건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다 뒤로 엎어졌다. 꼼짝할 수 없었다. 하늘이 하얗게 보였다.

마침 근처에서 멱을 감던 여인이 황급히 쫓아와 내 머리에 물바가지를 부으며 흔들었다. 조금 정신을 차린 나는 손짓으로 물 한 바가지를 더 부탁했다. 그제야 파란 하늘과 몇 조각의 구름이 눈에 아른거렸다.

고통엔 무게가 있다. 뻣뻣한 허벅지는 속도를 더디게 하고, 터진 물집은 자꾸 주저앉게 한다. 물집의 고통으로 다리를 끌다시피 절뚝거렸다. 자주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지만 포기하지 않는 건 '자존심'이다. 나와 나의 싸움이었다.

나는 미친 게 아니라 내 안의 열정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막과 오지는 나의 열정을 태우고, 지혜의 샘과 같은 곳이다. 숱한 위기의 순간에도 내가 믿고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일상의 흩어진 시간을 모아 꾸준히 운동한 밑천 덕이다.

이들의 지킨 것 '자존심'이었다.
▲ 고통의 무게를 딛고 이들의 지킨 것 '자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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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중 밀림에서 만난 녀석
▲ 저건 분명 야생 코끼리다! 레이스중 밀림에서 만난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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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레이스 중 CP에서
▲ 물을 통째로 머리에 붓지 맙시다 어느 레이스 중 CP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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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기적이 펼쳐졌다. 기적은 산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환경을 극복하는 것이다. 5박 6일의 처절한 사투 끝에 폭우를 가르며 세계 8대 불가사의중 하나, 정글 속 수직의 요새인 시기리아 락 정상을 향한 1860개 계단을 뛰쳐오르는 내 모습을 보았다. 홍콩의 Derek과 영국의 Nigel 선수는 무릎 주변 근육이 파손된 부상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단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집념과 투혼은 선수와 운영진 모두를 놀라게 했다. 나는 수고했고, 내가 소망한 것이 이루어졌다. 행복은 내가 만든 기쁨이다. 부탄(2013년, 200km)과 캄보디아(2013년, 220km)에 이어 스리랑카 210km 레이스까지 모두 완주한 내게 "Global Limits Heritage Site Runner" 상이 목에 걸렸다.

나의 나름 살아가는 방식은 주변에 버려진 시간들을 모아 요긴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흩어진 시간들을 모자이크 맞추듯 활용하는 것이다. 자투리는 '팔거나 쓰거나 하다가 남은 피륙의 조각 따위'를 말하듯 자투리 시간도 일상에서 의미 없어 보일 수 있다. 애써 써먹지 않아도 탓할 사람 없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했는가의 평가도 자신만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락 줍듯 모은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하면 이룰 일은 무척 많다.

시기라아 락 암벽 그림
▲ 프레스코화 미인도 시기라아 락 암벽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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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아 락 정상에서 스테판과 함께
▲ 도전의 결과는... 기록이다 시기리아 락 정상에서 스테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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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할 때, 여행 할 때, 운동도 마찬가지다. 체력을 키우기 위해 비싼 헬스클럽이나 굳이 먼 곳으로 원정 갈 필요는 없다. 팔굽혀펴기나 앉았다 일어서기를 하며 TV를 보고, 아파트 계단이나 가까운 거리를 걸어다는 것도 괜찮다.

스트레칭만으로 훌륭한 운동이 되듯 자투리 시간만 잘 활용해도 우리의 삶은 훨씬 풍요로워 질 수 있다. 내가 사는 방식이 정답은 아니더라도 풍요로운 삶과 건강한 인생을 사는 데 다소 도움은 될 것이다.



태그:#사막, #오지, #김경수, #도전, #스리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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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핑계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넘나드는 조금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오지레이서라고 부르지만 나는 직장인모험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난 19년 넘게 사막과 오지에서 인간의 한계와 사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인생의 희노애락과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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