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수강 첫날이었다. 해당 교실에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나는 강의실 호수를 다시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그래도 석연치 않아 맨 앞에 앉은 남자 어르신께 물었다.

"여기 '글쓰기힐링' 맞아요?"

어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다고 했다. 제대로 찾아오긴 했는데 분위기가 경노당에 온 것처럼 모두 연배가 지긋해 보였다. 그 분들은 자리에 듬성듬성 앉아 있거나 뒤쪽에 모여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미 친분이 있어보였고 새해의 덕담들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가장자리 구석에 앉아 홀로 낯선 분위기를 살폈다. 경험대로라면 모임의 가장 '막내'가 총무를 맡는 경우가 있었기에, 내가 가장 나이가 어린(?) 축에 드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잠시 후, 내 옆자리로 여자 어르신이 다가왔다. 당신도 글쓰기는 처음인데 그동안 벼르고만 있다가 추첨이 되었다고 했다. 어르신은 소녀 감성으로 살짝 상기된 표정이 되었다. 가방 속에서 노트와 연필, 스테인레스 개인 컵을 꺼내며 자세를 가다듬는 어르신의 설레는 마음이 그대로 보였다.

3년 전, 집 근처 도서관 건물에 평생학습센터가 생겼다. 센터프로그램은 일 년에 3개월 씩, 분기별(4분기)로 모집하고 일정 기간에 수강신청을 하면 된다. 교육 과정 중에는 취미뿐만 아니라 창업이나 취업에 도움 되는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다. 나는 인문교양 '글쓰기도 힐링이다'와 건강 관련해서 '전신근력운동' 두 가지를 신청했다. 지난해 여름, 직장을 그만두고 나태해지는 나 자신에게 환기와 자극이 필요했다.

'글쓰기도 힐링이다' 수강 시작 5분 전, 담당 선생님이 들어오고 수강생들은 모두 제 자리에 앉았다. 출석체크를 하는 중에 30대로 어림되는 여성이 들어왔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 여성한테로 쏠렸다.

누가 봐도 이 교실에서 가장 '막내'였다. 내 마음이 왠지 편안해졌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첫 시간에 빠질 수 없는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20명 정원 중 15명은 그동안 공부를 같이 해온 사람들이고 나를 포함한 옆자리의 어르신, '막내'여성 등 5명 정도가 '신입생'이었다.

모인 사람들 반 이상은 공직생활을 끝내고 은퇴하신 분들이었다. 그 분들은 글쓰기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지만 머릿속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싶거나,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다. 맥고모자를 쓰고 맨 앞에 앉은 어르신은 올해 연세가 90세가 되었다고 한다.

그 분은 '책 없이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단순하게 들어 왔'단다. '나이는 먹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고, 글쓰기도 그래서 빠지지 않고 나온다. 강의를 들을수록 내 생각이 바뀐다'고 했다.

문을 열었을 때 '어르신 모임'처럼 여겨졌던 분위기는 한 분, 한 분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각자의 가슴에 품고 있는 열정이 드러났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지만 어쩔 수 없는 고령화시대를 실감했다.

연구소에서 50년 동안 한 분야의 최고 자리에서 퇴직한 어르신은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글쓰기를 하면서 내가 겪었던 부산거제도 피난생활을 소설로 형상화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학기술도 인문학이 뒷받침되어야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글쓰기도 힐링이다'라는 교육명이 무색하게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글쓰기가 힐링인 줄 알았는데 엄청난 스트레스다'라는 말로 소개를 하는 분도 있었다. 수강생들 거의 반 이상이 책을 냈거나 수필, 시로 활동 중이다.

내 옆의 어르신은 자기소개 순서가 다가오자 불안해하면서 나에게 속삭였다. '나 집에 갈래~. 여긴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아' 하면서 책상에 펼쳐놓은 노트와 필통을 주섬주섬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니, 그래도 이왕에 오셨으니 분위기 파악만 하고 가셔도 될 것 같아요'라고 말씀드렸다. 소곤거리는 말을 선생님이 들으셨고, 나와서 이름만 소개해보라고 했다.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앞에 나가 당신의 이름을 밝히고, 조금 전에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강조했다.

운동하기 전 몸풀기
 운동하기 전 몸풀기
ⓒ 한미숙

관련사진보기


'머신 없이 자신의 체중을 이용하여 근육의 힘 키우기, 건강하고 탄력 있는 몸만들기'라는 전신근력운동의 광고문구는 지금 나를 지목해서 하는 말 같았다. 걷는 것을 좋아해서 자주 걷기는 했다. 날마다 일정량을 정해놓고 걷는 게 아니어서 운동은 한계가 있었다. 의지도 그만큼 강해야 했다.

헬스클럽과 달리 머신 없이 자신의 체중을 이용하는 운동이란 것도 매력 있었다. 탄력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건강하고 싶었다. 오십 후반으로 가면서 몸 여기저기에 비명이 터졌다.

직장일의 특성상 한 달에 열흘 이상씩 당직을 하는 것도 내 건강에 무리를 보탰다. 통로와 같은 내 몸 어딘가 막혀서 순환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위협감이 몰려왔다.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먹고, 통증이 올 때마다 진통제로 다스렸지만 건강이 지속되지는 않았다. 병원에서 듣는 공통적인 말은 '근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꾸준한 운동을 권했다.

한여름, 특히나 더위에 약한 내 체력은 바닥을 기며 헐떡거렸다. 결단이 필요했다. 일을 잠시 쉬기로 했다. 걷는 것을 늘리고 산행도 했다. 잘 먹고 잘 배출하는 것 못지않게 잘 자는 기본적인 욕구충족이 안 된 상태에서 머리가 어지러워 일상이 혼곤하고 시야가 탁했다.

센터의 전신근력운동은 신청자가 워낙에 많아서 경쟁이 가장 치열하기로 소문이 났다. 처음 신청했는데 어쩌다 보니 추첨이 되었다. 내 몸의 근력을 키우는 운동이니 나는 주어진 시간에 충실히 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인용 매트와 실내화 수건 등을 준비하고 센터로 가는 걸음이 가벼웠다. 운동하는 교실은 지하에 있었다. 방음된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람들은 글쓰기교실에서 봤던 것처럼 한 구석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이미 프로그램에 익숙했고 주고받는 얘기만 들어도 서로 친분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벽의 두 면은 모두 거울이었다. 남녀 탈의실이 따로 있었고 간단하게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있었다. 시간이 되기 전, 모인 사람들은 전에도 그래왔던 것처럼 가장자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 눈에도 나처럼 처음 온 사람인지 아닌지가 구분되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서서 여기저기 둘러보다 걷는 사람들 틈에 들어갔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어떤 규칙이 있는지 팔꿈치를 뒤로 치면서 걷다가 다양한 스트레칭을 하면서 운동직전의 자기 몸을 점검했다.

출입구 쪽에서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짧은 펌에 머리카락이 불불이 일어나 솟은 머리, 소프라노의 경쾌한 인사, 담당 선생님이 들어왔다. 그녀가 뿜어내는 말투, 표정, 움직임 모두는 카리스마의 종합체인 것 같았다.

서두르지 않는 담백함. 절도 있는 움직임, 빨강과 검정 흰색이 어우러진 트레이닝복까지 앞에서 리드하는 몸짓 하나하나는 수강생들의 시선을 빨아들였다. 근력운동에 모인 사람들의 연령대는 글쓰기와 달리 육아중인 주부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고 비어있는 시간을 활용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나는 이곳에서 '어르신'축에 들었다.

빠른 음악에 맞춰 여러 가지 워킹을 하는데 몸은 생각과 달리 움직였다. 머리로는 쉬운 동작이었지만 나는 내 몸에 익숙해진 방향대로 가고 있었다. 두 팔을 위로 올려 만세 부르다가 한 발을 올림과 동시에 만세로 올린 두 손을 무릎에 닿는 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을 외치며 동작을 이어갔다.

뻣뻣하게 굳은 몸이 풀어지려면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따로 불러졌다. "처음이라 그래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선생님 앞에서 나는 어긋나는 동작을 제대로 맞추려고 애를 썼다. 처음 온 '신입생'들이 나를 중심으로 모이고 시선이 집중됐다. 동작이 얼추 맞춰지기까지 나는 교실에 남아 나머지 공부하는 초등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 순간, 글쓰기힐링의 내 옆자리 어르신 심정이 고스란히 내게 스몄다. '나 집에 갈래~'


태그:#글쓰기, #근력운동, #힐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