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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부터 22일까지 열리는 <세계의 젊은 작가들, 평창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다> 국제인문포럼에서는 세계 문학의 미래를 맡게 될 젊은 유망 작가들을 초청하여 우정과 연대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국내외 참여 작가들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포함한 우리 삶의 전 방면에 걸친 다양한 종류의 억압과 분쟁, 그로 인한 고통을 문학을 매개로 조망한 후 이러한 시대에서 ‘평화’의 가치를 논합니다. 시와 분쟁에 대한 진은영 작가의 글을 싣습니다.[편집자말]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주 돌아가 보는 삶의 시기가 있다. 어떤 무용수는 빨간 철봉이 있는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던 유년시절로 돌아가곤 한다. 어떤 음악가는 처음 갖게 된 '워크맨'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쏘다니던 청소년시절을 자주 떠올린다. 시인으로 등단한 이후로 내가 가장 많이 회상하는 시기는 대학시절이다. 그 시절에 나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1980년대의 마지막 해에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무렵 '분쟁'과 '시'는 내 삶으로 함께 들어왔다. 봄의 캠퍼스에는 등록금인상반대 투쟁과 같은 학내 이슈들과 파쇼악법철폐 투쟁 같은 과격한 정치 구호들이 가득했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내게 싸움은 비현실적인 단어였다.



어린 시절 두 살 차이나는 여동생과 마론 인형을 서로 갖고 놀겠다고 다투거나 엄마가 간식으로 해주신 사과파이의 크기를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는 정도가 싸움이랄까. 가족 간의 갈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지만 그건 어른들의 문제였고 어린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87년에는 범국민적인 민주화 투쟁이 있었지만 그때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한양대학교 후문이 보이는 여고의 교실 창문으로 멀리서 색색의 깃발들을 들고 행진하는 시위대가 보였다. 하지만 그 풍경은 거리를 화판으로 삼아 여기저기 찍힌 낭만적이고 신기한 판화를 감상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좋은 시인은 잘 싸우는 사람이고 그의 시는 분쟁으로 가득한 장소이다.
 좋은 시인은 잘 싸우는 사람이고 그의 시는 분쟁으로 가득한 장소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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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문학 동아리에 들어가면서 나는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펼치는 시집마다 아름다운 것들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다. 싸우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오고 있었다. 물론 70, 80년대 선배들이 겪었던 것만큼 무시무시한 싸움은 아니었다. 87년 민주화항쟁 이후 분위기는 유화적이었고 그 때문에 우리는 싸운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세대였다.



주점에 모여앉아 술을 마시며 '너는 무엇으로부터 운동의 세례를 받았냐'는 다소 젠체하는 질문을 서로에게 던지곤 했다. 어떤 친구는 광주에서 학살당한 친척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선배는 자기는 제주도 출신이라며 우리에게 제주4.3항쟁을 아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사랑의 하나님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천사같은 친구도 있었다. 내 안에는 신이나 고향이나 가문에서 물려받는 혁명의 피가 흐르고 있지는 않았기에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詩)요"라고.





아주 단순한 논리였고 복잡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시인이 되고 싶다. 시는 순결한 것이고 모든 불의에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싸워야 한다. 안 그러면 시인이 영영 못 될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게 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옆 학교의 어느 선배가 서정시를 쓰기 위해 총대를 멘다는 시를 쓰고 문학회를 뛰쳐나가 학생운동에 투신했다는 이야기가 우리 신입생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떠돌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런 생각의 원조가 브레히트의 '서정시가 어울리지 않는 시대'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 이런 논리는 너무 단순하고 과하게 심각하며 쉽게 공격받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세월이 흘러 나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을 만큼 영리해졌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주장할 만큼 나는 치열하게 싸우지도 순결하게 시를 쓰지도 않았다. 그저 오염된 사물들과 순결한 사물들 사이에서, 아니 어쩌면 부분적으로 오염되기도 하고 순결하기도 한 사물들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변치 않는 사실은 시가 싸움을 불러일으키며 내게로 왔다는 점이다.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 속에 등장해서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칼을 주러 왔다'고 뜻밖의 선언을 하신 예수님처럼 말이다. 시는 내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스무 살 이후로 계속 그랬다. 나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이들에게 그랬다.





시는 평화로운 정체성에 늘 분열과 갈등을 가져온다. 남성 시인 안에서 시는 가부장적인 남성과 싸운다. 백인 시인 안에서 시는 백인 인종주의자와 싸운다. 중산층 시인 안에서 시는 허위의식과 싸운다. 여성 시인 안에서 시는 절망이나 체념과 싸운다. 물론 시가 패배할 때도 있다. 가부장적이거나 인종주의적인 목소리, 허위나 안온함, 편견에 젖은 목소리들이 시인 안에서 승리를 거둘 때 우리는 그런 시에 대해 실망스럽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좋은 시인은 잘 싸우는 사람이고 그의 시는 분쟁으로 가득한 장소이다. 사실 시는 평화와 가장 먼 단어인데, 시가 가끔 고요해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시적 고요는 야전침대의 고요함이다. 누구에게나 다시 싸우기 위해서 잠깐 눈을 붙여야 할 때가 있듯이 말이다. 만일 한 시인의 시가 영원히 고요하다면 그 시인은 야전침대 위에서 죽어버린 군인과 같다.



이런 비유들이 부적절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전쟁의 위험으로 가득한 나라의 시인이 평화의 비유 대신 굳이 이런 전투적인 비유를 쓰다니…. 그러나 위태로운 공간을 조금 덜 위태로운 공간으로 만드는 방식은 싸움이다. 우리가 나라 안팎의 시대착오적인 전쟁론자들에 맞서 싸워왔기에 2018년 이 땅은 그나마 덜 위태로운 곳이 되었다. 만일 지난 1년 동안 많은 시민들과 예술가들이 밤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이지 않았다면, 그래서 호전적이고 부패한 정권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면 이곳은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위험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혹시 우리가 더 잘 싸웠다면 완전한 평화가 찾아왔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완전한 평화를 가져오기에는 우리의 힘이 역부족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완전한 평화는 없으며 그것은 거짓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팍스 로마나'나 '팍스 아메리카나'처럼 평화로 가장된 상황 속에서 부당하게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는 관념 속에서 평화로운 세계나 무탈한 사회를 가정하기보다는 현실의 분쟁을 촉진하고 그것을 삶의 긍정적 양식이 되도록 만든다. 이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분쟁의 현장들이 극한의 장소가 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은 분쟁의 중지가 아니다. 늘 평화를 주러 왔다고 말하는 자들이 분쟁의 장소를 더 큰 지옥으로 키운다. 가장된 평화를 위해 소수자들의 고통스런 목소리를 지워버리는 대신 그 목소리들을 더 크게 들리게 하고 더욱 시끄럽게 만드는 것이 시이다. 문학은 완전한 평화를 상상조차 하지 않기에 문학의 자리에서 보면 우리의 미래는 늘 어둡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반딧불의 잔존'에서 우리의 미래를 어두운 숲을 지나가는 것으로 비유했다. 그에 따르면 시의 진리는 어두운 숲에서 만나는 반딧불의 미광(微光) 같은 것이다. 그는 시의 진리를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철학자들에 대해 불평한다.


 
"철학자들은 약한 '진리의 미광들'—마치 반딧불처럼 영락없이 한시적이고, 경험적이고, 산발적이고, 미약하고, 잡다하고, 일시적인 것—보다는 강한 진리의 빛을 더욱 좋아한다."
 

철학을 전공한 내가 보기에 모든 철학자에게 이런 공격이 타당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유행하는 몇몇 이론에는 그런 측면이 있다.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지속되는 어둠이 아니라 완벽하게 밝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가정이다. 그런 것을 가정하고 나면 어둠 속에서 잠시 반짝이는 이 약한 빛으로 어느 세월에 완벽하게 밝은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문학이 만들어내는 분쟁들은 얼마나 시시하고 사소한가?'처럼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물음들. 문학의 쓸모없음을 인정하라는 이 강요된 물음들에 대해 '그대들이 몰라서 그렇지 문학은 모든 것을 환히 계시하는 서치라이트의 눈부신 빛, 구원의 약속을 지니고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닌 것 같다.



현실의 크고 작은 분쟁들과 한 사람의 죽음 혹은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문학적으로 기록하는 일, 민주주의를 위한 움직임 속에서 들리는 다양한 목소리를 시 속에 담는 일, 획일화된 언어를 분열시키는 수많은 방식의 문학적 실험을 수행하는 일들은 모두 "한시적이고, 경험적이고, 산발적이고, 미약하고, 잡다하고, 일시적인" 미광으로 반짝거리며 오래도록 어두운 숲을 지나가는 것이다.



이 숲을 무사히 통과하면 환한 곳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 대신, 어두운 숲에서도 시의 미광은 내내 사라지지 않는다는 황홀한 희망을 지니고서.



[작가소개]

1970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0년 계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2009년 제14회 김달진문학상 젊은 시인상, 2010년 제56회 현대문학상, 2013년 제15회 천상병 시문학상, 2013년 제21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등의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현재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에서 문학 및 인문상담학 교수를 맡고 있다.
 

태그:#세계작가대회, #진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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