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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왔다

최소 30년 이상 된 녹색어머니회
▲ 등교길 풍경 최소 30년 이상 된 녹색어머니회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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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이었다. 저녁을 먹던 아내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 주 월화수요일 3일 동안 까꿍이 학급의 녹색어머니회 당번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내가 국민학생일 때도 존재했던 바로 그 녹색어머니회였다.

아내는 자신이 월요일 밖에 시간이 안 된다며 내게 화, 수요일 나갈 수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기꺼이 알겠다고 했다. 비록 이름은 어머니회지만 어쨌든 아버지도 똑같은 부모 아니던가. 자식 일에 아빠, 엄마가 따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다행히도 나의 직장은 집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월요일 녹색어머니회를 마치고 온 아내는 학교에서 받아온 물품들을 이것저것 내게 건넸다. 녹색어머니회가 적혀 있는 모자와 노란 깃발, 입으로 부는 대신 손으로 버튼을 누르면 소리가 나오는 호루라기, 날씨가 추운지라 두터운 점퍼와 스키장갑, 거기에다 마지막으로 주머니에는 핫팩까지 들어 있었다.

아내는 거기에다 덧붙여 녹색어머니회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해줬는데,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어떤 학교에 관한 것이었다. 그 학교는 녹색어머니회 활동을 하는 학부모, 특히 어머니들에게 정장에 하이힐까지 신고 오랬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입고 있는 대로 나오면 운전자들이 무시한다나. 도대체 이게 언제 적 사고방식인지.  

아빠가 제복 입은 게 웃긴 막내
▲ 작은 모자와 점퍼 아빠가 제복 입은 게 웃긴 막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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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아침. 녹색어머니회 복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아내가 가져온 점퍼나 모자 모두 작았기에 겉옷 위에 녹색어머니회 조끼를 걸치는 게 다였지만, 그 조끼와 깃발만으로도 왠지 큰일을 하러 나서는 장수의 기분이었다. 아이를 대신해서 뭔가를 해서일까? 초등학교 때 주번이나 반장의 마음가짐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녹색어머니 활동 시간은 8시 10분에서부터 40분까지. 지정된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등에 맞춰 깃발을 움직였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들이 하나하나가 마치 내 자식 같았다. 살을 에는 찬바람 때문에 30분도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막중한 책임감 때문인지, 아니면 어쨌든 내가 교통을 통제한다는 쾌감 때문인지 추위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체육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내 옆에 왔다. 뭐지?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그가 이윽고 자기소개를 했다.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저는 00초등학교 교감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교감 선생님이 매일 이렇게 순시를 도시는가 보네요."
"예. 제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돼서요."

교통통제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 복잡한 건널목 교통통제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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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뒤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 다행히 신호등이 바뀌었고 교감선생님은 총총 길을 건너갔다. 기분이 묘했다. 학창시절 때는 그리 싫었던 교감선생님의 순시였건만, 이제는 그런 교감선생님의 뒷모습이 짠하게만 보였다. 어쩌면 그 뒷모습에서 학교보안관을 서시는 아버지가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40분. 혹시나 길을 건너는 아이들이 더 있을까 확인한 뒤 건너편 녹색어머니와 눈인사를 나누고 회사로 발길을 옮겼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녹색어머니회를 고수하고 있는 이 사회도 웃겼지만, 거기에 아무 반론 없이 따르고 있는 내 자신도 웃겼다. 과연 이 녹색어머니회가 정상적인 것일까?

산업근대화의 산물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 녹색어머니회 깃발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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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어머니회를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불편했던 것은 역시 그 명칭이었다. 도대체 왜 아직도 '녹색어머니회'를 쓰고 있는 것일까? 이는 단순히 내가 아버지여서 갖는 의문이 아니었다. 녹색어머니회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 가까웠다.

어머니가 나가서 우리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깃발을 든다는 행위. 그것은 결국 우리의 산업근대화와 관계가 깊다. 처음 녹색어머니회가 등장했을 때 우리 사회는 대부분의 가정이 아버지가 돈을 벌어오는 구조였을 것이다. 아니,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던 가부장적인 사회였다. 그래서 사회와 학교는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가 학교를 가면 어머니의 시간이 남을 것이라 가정하고 그들을 불러내어 자원봉사단을 조직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바라왔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국가는 많은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맡을 수밖에 없었던 집안일을 하나의 정당한 노동으로 보지 않았고, 여성은 언제나 학교나 사회가 요구하면 불러내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라고 간주했다. 국가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았던 사회에서 남성은 군대나 기업을 통해 조직됐다면 여성은 지역에서 학교를 매개로 조직됐던 것이다.

따라서 녹색어머니회의 '녹색'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녹색운동의 녹색이 아니라 새마을운동의 녹색과 같은 계열이다. 국가가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고 국가의 필요에 의해 조직될 수 있는 개인들의 조직. 실제로 지역 선배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녹색어머니회를 거쳐 새마을부녀회나 새마을문고로 활동범위를 넓힌 사람들도 많았고, 지금까지도 구의회나 구청 등은 이 녹색어머니회를 반(半)직능단체로 간주한다고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녹색어머니회

묘한 쾌감
▲ 깃발신호를 따르라 묘한 쾌감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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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연 그와 같은 녹색어머니회가 지금 이 시대에도 유용할까? 박근혜 정부 당시 새마을운동의 부흥이 너무도 촌스럽고 구렸던 것은 그것이 시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인데 과연 녹색어머니회는 어떨까?

녹색어머니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제도 자체가 현재 사회 구조 속에서 전혀 맞지 않다는 점이다. 어쨌든 그 시작이 남성의 외벌이가 다수였던 시기였던 만큼, 지금처럼 맞벌이나 한부모가 많아진 시대의 녹색어머니회는 그것 자체가 폭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아침에 도저히 시간이 안 되는 가정의 아이는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한단 말인가.

실제로 아내의 말에 따르면 녹색어머니회 때문에 학교 앞 문구점에는 알바가 있다고도 했다. 가끔 초등학교 등교시간을 지나다녀보면 나이 많은 어르신이 깃발을 들고 위험하게 서 있기도 한다. 모두 제도가 현실에 맞지 않아 벌어지는 촌극이다. 시대는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데 아직도 우리의 교육행정은 과거의 관행을 버리지 못한 채, 아니 버릴 생각도 못한 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게다가 더 심각한 사실은 현재 초등학생 숫자가 급감하고 있고, 그에 맞추어 폐교될 학교도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한 아이가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길을 건널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녹색어머니회를 할 수 있는 부모들은 계속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수요일. 녹색어머니회 활동을 마친 뒤 관련된 기구들을 학교에 반납하고 다시 회사로 향한다. 발걸음은 가볍지만 머릿속은 복잡하다. 산업근대화와 가부장적인 사회의 산물인 녹색어머니회. 이제는 다시금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 혹시 내가 속해 있는 사회적경제의 방법으로 이를 해결할 수는 없을까?

많은 학부모들이 함께 고민하기를 바란다. 집단지성이 모이면 초등학교의 학교보안관들처럼 큰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참신하고 훌륭한 정책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태그:#육아일기, #녹색어머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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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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