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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 1000일이라니. '연애도 1000일을 못해 봤는데'라는 말에 말한 나도 크게 웃고 듣는 이도 웃었다. '웃프다'는 말이 딱 맞는 말인 거 같다.

하이디스에서 해고당하고 길 위에서 싸워온 지 벌써 1000일이 지났다. 솔직히 처음엔 이렇게 긴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해고 통보를 받고 아직 회사 세미나실에 모여 있을 때, 이런저런 교육을 받았었다. 그때 어디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몇 년째 싸우고 있다는 투쟁사업장 얘기를 들었다. 얘기를 들으면서 '아이고, 어쩌다가 몇 년을 저렇게 싸우셨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이젠 내가 그런 말을 듣고 있다.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텨서 여기까지 왔냐고 물으면 확실하게 무엇 때문이라고는 대답할 수가 없다. 처음엔 내가 왜 정리해고를 당해야 해, 억울해서 이렇게는 못 나간다 남았고, 배재형 열사가 죽고 나서는 끝까지 싸워서 꼭 이겨서 열사 무덤 앞에 부끄럽게 서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투쟁했다.

공동투쟁을 시작하면서는 하이디스 문제뿐만이 아니라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노동탄압과 손배가압류 문제까지 부당한 문제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됐다. '여기서 우리가 물러서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고 또 다른 일로 투쟁하는 사람들이 계속 생기겠구나. 그건 지금 우리가 같이 싸워 막아야하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싸워왔다. 내 옆에서 함께 싸우는 동지들과 이제 정말 싸움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 웃고 싶다는 마음으로 싸웠다. 지금까지 하이디스 투쟁에 함께 연대해주시고 마음써주신 모든 분들에게 반드시 우리 승리로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버텨왔다.

하루는 천억 흑자에도 정리해고 당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화가 났고,
하루는 한국 기술을 대만자본이 털어가려는 데도 가만히 있는 정부 때문에 분노했다.
하루는 대만 원정투쟁을 갔다 사진에 신발 한 짝 던졌다고 벌금 100만 원에 손해배상 250만 원이래서 어이없었고,
하루는 국회의원실을 찾아가 하이디스 상황을 알렸지만 돌아오는 무반응에 '뭐가 달라지긴 하는 건가' 우울했다.
하루는 '하이디스의 해고는 무효다. 복직할 때까지 임금 지급하라'라는 판결을 받고 드디어 인정받아 기뻐했고,
하루는 하이디스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한 문재인 씨가 대통령이 됐는데 대체 언제 약속을 지키나 답답했다.
하루는 뜨거운 햇빛 아래 피케팅하면서 나 이러다 쓰러지는 것 아닌가 괜한 걱정했고,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그냥 누워서 가만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는 옆에 나보다 힘든 사람들 지켜보면서도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끔찍하게 괴로웠고,
하루는 사람들과 별 재미도 없는 실없는 농담하면서도 좋다고 깔깔대며 웃었다.
하루는 이제 그만 좀 하라는 말에 상처받아 울었고,
하루는 자기일도 아닌데 도와주는 사람들이 너무 고마워서 코끝 찡했다.
하루는 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이제 금방 끝날 거야. 기대도 가져봤고,
하루는 이 투쟁 끝나긴 하는 건가. 대체 어디까지 가야하나 절망에도 빠졌다.
하루는 내가 이렇게 힘든데 이 사람은 괜찮나, 저 사람은 안 아픈가 걱정했고,
하루는 그래도 이렇게 버텨왔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했다.

이런 저런 하루하루가 쌓여 1000일이 되었다.

1000일. 길 위에서 보내기엔 긴 시간이지만 또 긴 인생에서 보면 짧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간을 결코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쉬운 날은 없었다. 그냥 지나간 날도 없었다. 하루하루가 소중한 날이었다. 이 날들이 모여서 결국은 우리가 이길 것이라 믿기 때문에 1000일 중에 덜 중요한 날은 하루도 없다. 1000일이 지나고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지만, 함께 싸우는 동지들이 옆에 있고, 마음 모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무리 힘들어도 웃을 수 있다. 나는 오늘 하루도 승리를 향해 소중한 한걸음을 내딛는다.

한편 하이디스 해고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투쟁 1000일을 맞아 오는 27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연대의 날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하이디스 투쟁 일지
지난 2014년 하이디스는 기술료 수익으로만 천억 원의 수익을 냈다. 그러나 2015년 1월 회사는 공장을 급작스럽게 폐쇄시켰고 전직원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2015년 4월 1일 해고당하지 않은 시설관리 인원 30명과 희망퇴직을 거부하고 정리해고 당한 79명이 남았다. 109명이 '먹튀자본'에 저항하며 투쟁을 시작했다. 이후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오랜 노숙을 해야 했다.

2015년 5월 해고자가 아니었던 배재형 열사를 먼저 하늘로 보내야만 했다. 전 지회장으로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투쟁을 했었다. 조합원 신분으로 대만 원정투쟁도 두 차례나 다녀왔다. 자본의 탐욕에 저항하며 꼭 이겨달라는 말과 함께 노동탄압, 착취가 없는 세상으로 먼저 간다며 '천사불여일행'을 남기고 하늘로 올랐다. 남겨진 이들은 슬픔을 뒤로 한 채 약 2개월간의 열사투쟁을 통해 열사의 가족대책방안과 장례절차에 합의하고 열사를 모란공원에 모셨다.

하이디스 정리해고 1000일을 맞아 오는 27일 오전 11시 하이디스 해고노동자들은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연대의 날 행사를 갖는다.
▲ 하이디스 투쟁 연대의 날 하이디스 정리해고 1000일을 맞아 오는 27일 오전 11시 하이디스 해고노동자들은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연대의 날 행사를 갖는다.
ⓒ 하이디스 해고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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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하이디스 해고노동자 김혜인씨입니다.



태그:#하이디스, #하이디스 투쟁, #하이디스 노조, #하이디스 해고, #신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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