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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취향 좀 존중해주시면 안 되나요?

먼저 나는 희석식 소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로 이 기사를 쓰지 않았음을 말해두고 싶다. 내가 전문 소믈리에도 아니고(물론 소믈리에라도 그럴 권리는 당연히 없다), 남이 멀쩡히 잘 마시고 있는 술을 폄훼하며 고급 와인이나 비싼 위스키에 대한 본인의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것도 분명 문화 파시즘이라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은 이 술을 격렬히 디스해보고 싶었다. 우리 사회의 주(酒)류 기득권은 희석식 소주가 꽉 잡고 있지 않는가? 한국에서 1년에 팔리는 희석식 소주의 양은 거진 40억 병이다. 이런 사회에서 나 같은 변방인이 이 술을 깐다고 해서 별 문제가 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소수의 취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늘 핍박받아야 했으니 어느 정도는 비판할 자격도 있다고 생각한다. 소주가 싫다고 말하면 어린 시절 돌아도는 대답은 늘 똑같았다.

"네가 아직 어려서 인생을 잘 몰라서 그래."
"술 마시는 법 좀 배워야겠다."

나이가 좀 든 지금은 레파토리는 바뀌었지만 한 소리 듣는 건 여전하다.

"입이 고급이시네요?"

아니 똑같은 3000원짜리 국산 병맥주는 잘 마시는데 왜 제 입이 고급이죠?

우리가 마시는 희석식 소주의 정체

 소주 안 마시고픈 제 취향 좀 존중해주시면 안 되나요?
 소주 안 마시고픈 제 취향 좀 존중해주시면 안 되나요?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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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는 전통술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마시는 참이슬이나 처음처럼의 정체는 소주가 아니다. 소주(燒酒)란 한자로 태워서 만든 술이라는 의미다. 발효 후에 열을 가하여 불순물을 거르고 높은 알코올 도수를 얻게 만드는 전통적인 증류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위스키나 코냑 역시 엄밀히 말하면 소주에 해당한다.

안동 소주나, 문배주 같은 격조 있고 전통적인 소주가 원래 그 '소주'였고, 많은 양의 쌀을 투입해도 적은 양의 알코올만 나오는 소주는 있는 집만이 마실 수 있는 고급 술이었다. 그런 술이 어떻게 싸구려 서민 술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마시고 있는 소주는 원래 소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색 무취의 에틸 알코올에 화학물을 섞은 '희석식 소주'이다. 희석식 소주에서 쓰는 고순도 에틸 알코올의 순도는 95% 정도. 당연히 냄새도 지독하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 싸구려 감미료(주로 아스파탐이나 구연산 따위 등의 합성감미료)를 사용한다. 빼갈이나 위스키가 희석식 소주보다 훨씬 독해도 다음 날 숙취가 덜한 것은, 그게 고급술이어서가 아니라 희석식 소주만큼 화학물이 잔뜩 들어가 있지 않아서다.

TV에서 소주 광고를 보면 "자연필터로 정제를 했다", "자일리톨을 넣었다"며 자신들이 제조한 소주의 우수성(?)을 자랑한다만 사실 희석식 소주의 원료인 에틸 알코올은 대부분 동일한 전문 주정회사에서 구입하고, 얼마나 물이나 첨가물을 넣느냐는 작은 차이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박정희가 끊어버린 전통술 '소주'의 명맥

각 지역의 전통술이란 그 고장의 역사이자 문화이다. 한국의 전통술은, 사람들이 모여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 꽃을 피우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우리네 선조들이 살아가던 그 공간에서 자생해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럽이나 일본의 명주들 대부분은 그 명칭에 출신 고장을 알 수 있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또한 유명 양조장들은 그 공간 자체가 관광 명소로서 대접 받는다.

일제 강점기의 초기 통계를 보면, 당시 조선에는 지역색을 띈 전통 양조장의 숫자가 2만 8000여 곳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 주세법과 1916년 주세령을 통해 인가된 시설을 구비한 곳에서만 술을 만들 수 있도록 하였다. 표면적으로 위생 상의 이유 등을 들었지만 그럼으로 인해 일제는 용이하게 세수를 확보하고, 조선인들이 자연스레 뭉칠 수 있는 공간을 말살시킬 수 있었다.

한국 전통주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일제가 아니라, 일제를 충실히 배우고 모방했던 박정희이다. 1965년 박정희는 귀중한 식량인 쌀을 낭비한다는 전근대적인 발상으로, 전통술 생산에 쌀 사용을 금지하는 양곡관리법을 실시한다. 이 법은 일제 강점기에도 근근이 버터던 한국 전통술 '소주'의 명맥을 완전히 끊어 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를 우리가 알고 있는 희석식 소주가 대체하게 된다.

한때 탕수육 부먹이냐 찍먹이냐를 두고 귀여운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 논쟁을 두고 귀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보통은 부먹이냐 찍먹이냐를 가지고 사람의 인격적 성숙도를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걸 못 먹다니, 음식 먹을 줄을 모르네"라는 말도 웃긴데, "소주를 싫어하다니 인생을 덜 살았네"만큼 저급한 잣대가 어딨는지 궁금하다.

당신의 취향을 존중합니다. 당신이 드시는 것에 대해 전혀 상관 안 해요. 그치만 전 싫습니다. 송년회에서 희석식 소주 좀 안 먹게 해주세요.


변호사, 투자자, 소설가, 아마추어 기자. "삶은 지식과 경험의 보고(寶庫)이자 향연이다. 그러므로 나 풍류판관 페트로니우스가 다음처럼 말하노라." - 사티리콘 中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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