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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 (지금도 세워지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답사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필자만의 평화적인 방법이다. 또한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이 사회의 여러 노력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단,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봤다. 가능하면 소녀상이 세워진 지역의 역사성과 소녀상 건립이 갖는 의미, 소녀상의 모습과 상징성 등을 다양하게 알아보고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단순한 평화의 소녀상 답사를 넘는 지역 답사의 의미도 갖게 됨을 의미한다. - 기자 말

일반적인 소녀상과 제법 다른, 개성 있는 얼굴과 모습을 하고 있다
▲ 안동 평화의 소녀상 일반적인 소녀상과 제법 다른, 개성 있는 얼굴과 모습을 하고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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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부공원 앞을 지나는 도로가에 붙어 있다.
▲ 안동 평화의 소녀상 웅부공원 앞을 지나는 도로가에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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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소녀가 왜 이렇게 작아?"
"워낙 어릴 때 끌려가셔서 그래. 그리고 그때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키가 작았어."

쌀쌀한 바람이 소란을 떨며 만만치 않게 뺨을 스치는 12월의 겨울날, 안동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어느 모자가 남긴 대화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이렇게 몇 마디 대화를 하는 것도 정겹다.

경상북도 북부 내륙의 중심에 들어앉아 경상도 전체를 굽어보는 고장, 토착성이 강한 보수의 성지 혹은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불리는 안동시. 지난 2017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룡 집안과 임청각을 언급하면서 한때 대중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그 고장의 독립운동 기념관이 있는 곳(현재는 경상북도 독립운동 기념관으로 확대됐다). 대궐 같은 99간 임청각에서 편안하게 사는 삶을 팽개치고 재산을 모두 처분한 다음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고 그 집안에서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석주 이상룡으로 대표되는 고성 이씨 집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돋보이는 고장. 장엄한 목소리로 <광야> <청포도> 등의 시를 써 일제에 직접 저항한 이육사의 고향. 일제 강점기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고 자부하는 고장.

인재의 고장, 안동

전재산을 처분하고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내기도 했던 이상룡과 시 '광야'로 이름난 항일 민족 시인 이육사는 모두 안동 출신이다.
▲ 이상룡(좌)과 이육사(우) 전재산을 처분하고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내기도 했던 이상룡과 시 '광야'로 이름난 항일 민족 시인 이육사는 모두 안동 출신이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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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은 고려를 세운 왕건이 처음 붙인 이름이다.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군과 결전을 벌인 고창전투가 바로 이 안동의 풍산 벌판 일대에서 벌어진 격전이며, 이 전투에서 토착 세력가들의 지원에 힘입어 승리를 거둔 왕건이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키며 지금까지 그 이름을 이어오고 있다.

견훤과의 맞대결에서 항상 열세였던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이 전투에서 승리한 기쁨이 꽤 컸던 것일까. '동쪽을 편안하게 하다' 혹은 '동쪽을 안정시키다'라는 안동(安東)의 이름을 부여하면서 자신을 도운 세 토착 세력가들에게 각각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성을 내려주고 이 지역을 우대했다.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 때 이곳 안동으로 피신한 이유도 고려 왕실과 안동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다. 고려 왕실의 입장에서 '믿을 만한 고장'이었던 셈이다.

안동은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거장 퇴계 이황과 조선 후기 남인의 뿌리가 되는 이황의 제자들을 배출한, 성리학적 전통이 강한 가장 보수적인 고장이 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전후 국가의 위기에 처해 혁신 유림이라 할 공화주의자·민족주의자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도 골고루 배출한, 좌우익을 망라한 인재의 고장이 안동이기도 하다.

웅부공원 입구를 지키고 있는 누각. 소녀상 바로 옆에 우뚝 서 있다
▲ 대동루 웅부공원 입구를 지키고 있는 누각. 소녀상 바로 옆에 우뚝 서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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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본류와 반변천의 두 강줄기가 만나 비로소 제대로 강이 돼 동네 앞을 흐르는 면면한 기상이 안동에 서려 있다. 퇴계 이황의 사상, 이기일원론으로 근본을 따지는 철저한 성리학 이념의 전통이 살아 있어서일까. 30여 년 전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길거리에서 여성이 담배를 피우면 어르신들이 달려가 뺨을 쳤다는, 지독할 정도로 보수적인 고장이지만, 필요하면 보수를 버리고 혁신과 개혁의 길을 갔던 그 담대함과 용기도 서려 있다.

말로만 떠들다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뒤로 발을 빼는 비겁한 사람과 집단들이 많은 시대일수록 그들의 용기와 기개에는 감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언제나 주목해야 할 고장이다.

이 고장에 2017년 8월 15일, 경상북도에서는 군위, 포항, 상주에 이어 네 번째로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섰다. 보수의 고장이지만, 큰 어려움이나 갈등 없이 세워졌다.

"평화의 소녀상이 올바른 역사관 잡아주길"

바위 위에 꼿꼿이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뒤편에 그림자가 보인다
▲ 평화의 소녀상 측면 바위 위에 꼿꼿이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뒤편에 그림자가 보인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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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웅부공원.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안동대도호부가 자리했던 곳으로, 2006년 안동시가 영가헌과 대동루 등을 복원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조성된 공원이다. 안동 시민들에게는 경상도를 대표한다는 자존심의 상징이 되는 장소다. 

시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안동 평화의 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가 주축이 돼 안동 시민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벌였고, 안동미술협회에 소녀상 제작을 의뢰했다. 총 모금액은 5572만 원으로, 모금 목표액인 6000만 원에 조금 모자랐지만, 안동미술협회 회원들의 재능 기부 형식으로 비용을 절감해 만들어져 웅부공원 앞에 세워졌다. 권택기 추진위(전 18대 국회의원) 공동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전국에서 독립운동 유공자, 지정 순국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 안동에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매우 뜻 깊다. (중략) 오늘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이 올바른 역사관을 잡아주게 되길 바란다. 이를 통해 역사를 왜곡하고 반성이 없는 일본의 그릇된 행태를 알 수 있게 해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소녀상 건립의 의의다."

안동은 몇몇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증언 채록집 <내가 어떻게 말을 해요. 어무이 가슴에 못 박을라꼬>를 낸 고 김옥선 할머니, 11세 어린 나이에 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김외한 할머니 등이 안동 태생이다.

이들의 증언을 없는 듯 싹 무시하며, 본인들의 자율적 의사에 의해 위안소에 갔고, 이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며 위안소를 운영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일본 정부, 일본 우익의 태도이다.  

치맛자락 잡아 쥔 왼손, 그 뜻

보자기를 꽉 잡은 손은 다시는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 소녀상의 손과 보자기 보자기를 꽉 잡은 손은 다시는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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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은 일반적인 평화의 소녀상과 조금 다른 모습이다. 청동(브론즈)으로 제작된 소녀상은 155cm 정도의 키에 52kg 정도의 체중을 가진 당시 평균치 소녀의 모습으로, 일본에 끌려갔다 돌아올 때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그래서 다른 소녀상과 달리 손에 작은 보자기를 들고 있다.

그녀가 앉은 황금색 바위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언덕 위에서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며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치맛자락을 잡고 있는 왼손은 다시는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의미한다고 한다.

앞으로 내딛은 왼발은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현실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를, 뒷꿈치를 든 오른발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다급한 심정을 표현했다. 뒤편 바닥의 그림자는 시대와 사회와의 단절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며, 소녀와 고향을 이어주는 고리의 역할도 한다.

가장 일반적인 소녀상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안동 평화의 소녀상은 좀 더 풍부한 상징성과 의미를 담고 웅부공원 앞 길가를 바라보고 있다.

웅부공원 옆에는 문화공원이 있고, 공원에 기와지붕을 한 안동 전통문화 콘텐츠박물관이 서 있다. 정면에 보이는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안동역에 닿는다. 차량이나 사람의 통행이 그리 많지 않지만, 도로를 지나가면 실수 없이 소녀상을 볼 수 있다.

도로에 가까이 붙어 있어 차량 소음과 먼지가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다른 소녀상과 다른,  개성 있는 소녀상의 얼굴은 뚝심 있게 '난 괘안타'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소녀상뿐만 아니라 안동 출신 위안부 할머니들이 마음의 위안을 얻고 평화롭게 여생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길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안동 문화의 거리를 비롯하여 갈비골목, 찜닭골목 등이 이어진다
▲ 소녀상 정면 길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안동 문화의 거리를 비롯하여 갈비골목, 찜닭골목 등이 이어진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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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정보]
* 안동시 서동문로에 위치. 내비게이션으로는 웅부공원을 검색해서 찾아가면 된다.
* 대중교통으로 접근할 경우, 일단 안동역으로 간 다음, 역 앞 광장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도로를 따라 300m 걸어 올라가면 웅부공원에 닿는다.
* 소녀상 길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안동 문화의 거리다. 이 거리에는 전국적으로 소문난 빵집 맘모스베이커리가 있고, 역시 소문난 갈비골목과 찜닭골목으로 사통팔달 이어진다.
* 아이와 함께 가는 부모라면 소녀상 옆 문화공원의 전통문화 콘텐츠박물관에 들러보면 좋다. (전통문화 콘텐츠박물관 054-843-7900, www.tcc-museum.go.kr)

[지난 기사]
[부산] 소녀상에서 본 일본 영사관, 그래서 여기 세웠구나


태그:#안동 평화의 소녀상, #웅부공원 , #영가헌 , #대동루,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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