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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차별' 사업장, 국가인권위원회

여기, 대한민국에 한 사업장이 있습니다. 이 사업장에서 비정규직은 최저임금에 준하는 급여를 받고, 정규직이 받는 식대와 상여금, 각종 수당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업무와 관련한 회사 명의의 문서를 작성할 수 없음은 물론, 상사에게 직접 결재를 요청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업장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돈이 많이 든다'며 비정규직에게는 신분증을 발급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직원이라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인트라넷 역시 비정규직에게만 별다른 이유 없이 접근을 허가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 쯤 되면 노동자의 손발을 모두 묶어놓고 일하기를 바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요.

이처럼 노골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차별한 사업장의 이름은 과연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국가인권위원회입니다. 국가인권기구이면서 차별시정기구라고 잘 알려진, 바로 그 기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권위는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기대와 달리, 상시·지속적 업무에 대해 해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채용해 헐값에 부리다가 내보내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동, 장애인, 이주민, 노인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정책 및 현장 모니터링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의 상당수는 1년 미만 계약직으로, 극심한 저임금·고용불안에 시달리며 매일을 버텨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일하면서, 정작 자신의 인권은 보장받지 못하는 인권위 직원'이 2017년 대한민국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불과 며칠 전까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한 사람입니다. 당사자, 전문가와 함께 아동의 인권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조사하면서, 어느 누구 못지않은 자부심과 열정을 가슴에 품고 헌신을 다하여 일했습니다. 동료 직원들은 그런 저를 존중과 격려의 자세로 대해주셨고, 그렇게 힘을 받아 다음 날의 업무도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권옹호자의 인권을 지키지 못하면서,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찢어지는 듯한 마음의 고통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인권위가 '돈' 때문에 '평등'을 포기하나

부끄럽게도 인권위는 이러한 관행에 대한 문제의식을 오랫동안 갖지 않아왔습니다. 이에 대해 인권위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는 말합니다. 지난 정권의 통제 야욕으로 인해 정규직인 공무원의 정원이 확연이 줄어듦에 따라, 점차 확장되는 사업을 담당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당사자가 차별 철폐를 요구할 때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곤 했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인권위의 예산을 꽉 쥐고 있어, 달리 방도가 없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저는 그런 류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실망과 분노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스스로를 독립기구라 일컫는 인권위가 정부부처의 주판알 튕기기에 손발이 묶여, 인권의 가치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수치스러운 '자백'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권위만의 잘못이라고만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상황에 대해 인권위가 점차 '적응'하는 듯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부를 비롯하여 다른 주체에 의해 좌절될 위기에 놓인 어떤 인권 가치의 실현에 대해 소극적이고 뒤늦은 대응을 보이거나, 심지어는 이러한 상황을 우려하여 일말의 저항조차 시도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은 그것의 대표적인 예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인권위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지름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비정규직 차별을 관행으로 여기고, 예산을 이유로 차별을 철폐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인권위가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하여 외부에 시정을 권고한다면, 피진정인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예산을 이유로 불수용'하겠다는 피진정인의 입장을 과연 인권위가 떳떳이 공표하며 압박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어느 누가 인권위의 노동 관련 결정을 존중하고 수용하겠습니까. 

'사용자 인권위'의 혁신을 위해 고함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대하여, 국가인권위원회 혁신위원회가 주요 과제로 인권위 내부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겠다 결정한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혁신위원회의 권고안이 제시하는 방향과 구체적인 내용, 이에 대한 인권위의 수용 여부와 실현 태도는 인권위 혁신의 성패를 가늠할 지표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혁신위원회에 전하고픈 이야기 많지만, 그 중에서도 꼭 전하고픈 이야기를 골라 적어보려 합니다.

하나. 위원회 명의의 '사과문'을 요구합니다.

비정규직 문제에 관하여 역대 정권 모두가 책임을 회피할 수 없듯, 국가인권위원회 비정규직 문제 역시 특정 위원장 재임 시절 벌어진 악행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또한 인권위 구성원 모두가 공범이며 방관자였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대표자인 위원장이 직접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내부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벌어진 차별과 모욕에 대해 위원회 명의로 분명한 사과의 뜻을 밝혀야 합니다. 사과하지 않는 조직은 다시금 그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고 인권위의 혁신을 모든 구성원이 함께 도모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업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혁신위원회가 이를 권고하여주시기 바랍니다.

하나.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요구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내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하여 소극적이고 추상적인 계획, 입장만을 내놓으며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인권위가 행정안전부와 기획재정부에 책임의 소재를 전가하는 동안 내부 비정규직 노동자를 둘러싼 차별과 배제의 폭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아야 합니다. 단기·중기·장기적 계획과 과제를 노사가 함께 수립하고 실천해나갈 수 있도록 권한을 갖춘 상시적 협의 체계를 다방면으로 마련하여, 대표자인 위원장부터 사무총장, 운영지원과장 등의 관리자 모두가 이에 대한 사명을 떨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혁신위원회가 이를 권고하여주시기 바랍니다.

하나. 계약직 고용의 근절을 요구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상시·지속적 업무에 대하여 1년 미만 계약직 고용을 지속적으로 확산시키면서, 사용자로서 노동자에 대한 일말의 고용안정 책임을 지지 않아왔습니다. 상시·지속적 업무에는 반드시 정규직인 공무원을 채용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권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국가인권위원회부터 지키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현행 '기간제근로자 관리규정'을 개정하여야 합니다. 일시·간헐적 업무에 대하여 긴급한 수요가 발생하였을 때만 계약직을 고용할 수 있도록 사용 조건을 엄격히 제한하는 한편, 사무총장이 계약직 고용 계획을 승인하기 이전, 노동조합이 의견을 제출할 수 있도록 제도적 창구를 반드시 마련하여야 합니다.

혁신위원회가 이를 권고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국가인권위원회의 혁신과 위상 강화에 관련된 소식을 들으며, 나름의 기대와 응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권위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구습을 밟아 반인권의 길로 향한다면, 이는 결코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선언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내부 비정규직 차별 철폐에 대해 적극적이고 선제적이며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혹은 그것을 최선을 다해 쫓지 않는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위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국가인권위원회의 비정규직 차별에 대하여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비정규직 차별적 처우 시정 신청'을 제기할 계획이 있습니다. 이것은 최후의 경고입니다. 차별시정기구인 인권위가 노동위원회의 심판정에서 '피신청인'으로 기록되는 오욕의 역사를 생산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까지의 과오를 분명히 되돌아보고 혁신(革新)의 본뜻을 발음하며 실천에 나서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단지 '맹랑했던 청년'으로 기억되며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남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일터를 바꾸는 노동자로, 세상을 바꾸는 인권활동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저의 유일한 사명이고 보람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저는 비록 떠났지만, 끝내 남아 싸울 동료들이 있음을. 그리고 그들은 결코 지지 않을 것임을. 


태그:#인권위, #국가인권위원회, #비정규직,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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