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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는 해당지역 주민들이 화장터, 장례식장, 공동묘지 등의 혐오시설, 원자력 발전소, 고압선 등의 위험시설, 각종 공장, 오폐수 처리장 등의 환경오염시설에 대해 거부하던 것이 일부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는 이러한 경향이 널리 퍼져 전국의 거의 모든 주민들이 제각기 다 거부하는 식으로 보편화돼 있다. 이로 인해 정부 혹은 지방자치단체와 주민들 간에 벌어지는 싸움은 도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됐다.

지금까지 새만금 방조제, 경주방폐장, 동해, 영덕 원자력발전소 등등의 유치 혹은 건설을 둘러싸고 얼마나 많은 갈등이 벌어졌는가? 갈등과 대립은 지금 이 시각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 서울 강서구엔 장애인을 돌보는 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결사반대하는 주민시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우리는 이러한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했으며, 서로 간에 없어도 될 반목과 질시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공동체의 존립이 휘청거리게 된 지 오래고, 이미 해체가 진행되고 있는 곳도 한둘이 아니다.

과연 우리에게 이 같은 일이 반복되는 원인이 뭘까? 단순히 주민들의 욕심이나 지역이기주의 때문만이라고는 할 수 없는 뭔가 근원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 의문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다.

과연 자신이 사는 지역에 혐오 및 위험 시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일본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일본에서도 한국처럼 이러한 시설에 대한 반대 혹은 거부하는 주민들의 움직임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대의 정도와 거부의 행태는 한국과 많이 다르다. 특히 한국인들에게 혐오시설로 인식되고 있는 묘지에 대해선 특별히 반응이라고 할 거까지도 없을 정도로 대단히 관대하다. 이글에선 혐오시설 중 일본인들이 인식하는 묘지에 국한해서만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30여 년 전 대학 시절, 배낭 메고 부산에서 배로 시모노세키(下關)로 들어가 일본 땅에 처음 발을 디딘 후 약 한 달간 이곳저곳을 여행한 적이 있다. 난생 처음 간 일본이라 당시 두드러지게 한국과 다른 광경이 눈에 들어온 게 많았다. 그 가운데 퍽 인상적이었던 광경은 도쿄(東京) 같은 대도시에 까마귀들이 많았다는 점, 도시든, 농촌이든 어디를 막론하고 시내와 하천의 물이 깨끗하고 물고기들이 노니는 곳이 많았다는 점, 대도시든 농촌 마을이든 간에 묘지들이 마을 주변이나 동네 안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일본에선 어디를 가든 이러한 풍광들은 바뀐 게 없이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한 묘지들은 보통 부모형제를 장사지내고 묻은 것이다. 한 집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 주민들이 제각기 조상들을 모신 묘소들이니 일종의 공동묘지인 셈이다. 이 점이 한국과 아주 많이 다른 특이한 광경이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 안에, 심지어 바로 주택들 옆에 묘지가 조성돼 있는 점을 상상해보라. 한국이라면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일본인들은 주택가에 있는 묘소에 대해 조금도 혐오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이는 이 점이 우리와 크게 다르다. 관련 연구서를 통해 알고 있던 사실을 지난 9월 초 일본여행 시 직접 여러 사람의 일본인들에게 주택지 공동묘지와 시신 및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실증적으로 확인해보게 됐다. 내가 물어본 이들 중엔 나이 든 중년과 노인도 있었지만, 30대 초반의 젊은이도 있었다.

한국에는 전국 어디를 가도 묘지, 납골당 등의 혐오시설에 대해서 일본인처럼 거부감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주민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현지 주민들은 단호히 용납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곳엔 절대 안돼!"라고 외치는 이른바 '님비'(NIMB, Not in my backyard)현상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장례라는 동일한 사안임에도 그걸 받아들이는 한일 양국인의 수용태도가 극명하게 다른 이유가 뭘까? 이것은 한 마디로 시간관과 생사관의 차이와 깊이 연관돼 있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일본인의 시간관과 생사관을 알게 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고, 그들로부터 문제해결의 실마리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어떤 시간관과 생사관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고 다음 단계의 논의로 들어가는 게 바른 순서다.

시간관과 삶 및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생사관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보편 일본인들은 시간의 추이를 원형으로 본다. 시간은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점은 인도인, 네팔인, 티베트인 그리고 같은 동양인인 중국인, 한국인과 동일하다. 무릇 생명체는 모두 생과 사를 반복한다고 설하는 불교의 윤회적 시간관의 영향을 일본인도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에선 하루, 일주, 일년처럼 반복되는 가역적인 시간(reversible time)으로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의 죽음처럼 한 번 흐른 시간은 뒤로 불가역적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게 사실(엔트로피 법칙을 상기하면 될 것임)이다. 하지만 그 시간의 원이 너무나 거대해서 전혀 감지될 수 없는 윤회의 틀 속에 있다는 게 불교의 시간관이다. 이는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서 하나님이 주재하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나면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끝나는 식의 직선으로 흐른다고 보는 기독교 역사관의 영향 속에 살고 있는 서양인들의 시간관과 다른 점이다.

하지만 동양인들 사이에는 시간관이 동일한 듯이 보여도 미시적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서로 다름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일본인이 인식하는 시간의 원은 인도인, 네팔인, 티베트인과 중국인이 인식하는 시간의 원 보다는 규모가 작다. 예컨대 겁(劫)이니, 찰나(刹那)니 하는 광대한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는 인도인의 시간관 속에서는 돌고 도는 시간의 원은 너무나 큰 원이다. 또 인도인, 네팔인, 티베트인들 가운데는 일부 기독교 신앙을 두텁게 믿는 소수 외에는 모두 부지불식간에 사람이 죽으면 내세(來世)에 다시 태어난다고 믿고 있는 것도 공통적이다. 내세란 다음에 오는 세상이라는 말이 아닌가?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고인이 된 이를 위해 흔히 빌어주는 '왕생극락'(往生極樂)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극락에 태어나길 빈다는 뜻이지 않는가? '삼가 고인의 명복(冥福)을 빕니다'라는 말도 같은 의미다. '명복을 빈다'에서 명복은 '저승에 가시거든 복을 받으시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도 천국에 가라고 축도한다. 결국 이 말들은 모두 이곳 현세 외에 내세가 있다는 걸 전제하고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점에선 불교나 기독교나 모두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인들의 경우 종교인들은 죽음을 삶의 연장으로 보고, 비종교인들은 영면(편안하고 깊은 잠을 영원히 자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일본인들은 다른 동양인들과 달리 보편적으로 죽음을 두려운 것으로 인식하면서 인간은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인간 세상에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생사관을 가지고 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죽음을 또 다른 삶의 연장으로 이해하는 한국인들과 달리 일본인들은 종교인들이든 비종교인들이든 공히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높다. 물론 소수 기독교나 천주교를 믿는 일본인 신자를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즉 크게는 돌고 도는 원을 나타내면서도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일직선으로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이 같은 시간관은 동양의 불교적(혹은 힌두교적) 시간관과 서양의 기독교적 직선 시간관이 결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선 결혼식은 교회의 목사나 신부가 주재토록 하고, 사람이 죽으면 장례는 스님에게 주재토록 하는 게 일반적인 관습이다. 일본에도 유교가 실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작지 않음에도 왜 장례만은 거의 불교식으로 행하는지 일반인들은 의문이 들 것이다. 불교엔 윤회가 설정돼 있어 내세에 대한 희원(希願) 때문이다.

일본인은 장례시 시신을 수습하는 것도 다른 동양인들과 다르다. 인도인, 티베트민족, 몽골민족, 중국인, 한국인의 화장 습속 이면에 배태돼 있는 생각을 보면, 그들이 화장을 하는 이유가 망자로 하여금 원래 태어난 광대한 대지로 돌아가도록 하려는 데에 있다. 화장하여 납골당에 모시기를 선호하는 일본인들은 불교식으로 장례를 지내면서도 분골은 땅에 묻거나 대지나 바다에 흩뿌리지 않는다. 굳이 분골이 썩지 않는 항아리에 담아 보관해두다가 조상들의 분골을 담은 용기들이 납골묘소 안에 가득 차면 모두 한 곳에 담아 한꺼번에 합장해서 보관한다. 왜 그렇게 하는지 의문이 든다. 납골을 하면 인간이 사후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인데, 이것이 진정 망자가 원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고 행하는 습속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매장이든, 납골이든 장례의 형식은 다를지라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일본인들은 시신과 묘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산다는 점이다. 또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듯이 일본인들 또한 죽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다만 기왕에 죽은 시신에 대해서는 그다지 혐오스럽게 생각지 않는다는 점이 한국인과 크게 다른 점이다. 일본인들의 인식 속에는 망자와 시신에 대해 혐오하기는커녕 자연스레 망자와 같이 공존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인들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식과 태도에 다분히 모순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가적(二價的, ambivalence) 정서인 셈이다. 말로는 죽는 게 "두렵지 않다"고 여기고, 죽음을 자연스런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듯해도 죽음엔 차별 의식이 존재하는 듯하다. 정작 부모가 사망하면 슬퍼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면서도 타인의 죽음과 그 시신에 대해선 재수없다는 식으로 대단히 혐오스러워 한다. 전국 곳곳의 도처에서 영안실, 납골당, 묘지와 화장시설이 자기 동네나 마을에 들어오는 걸 극구 반대하는 심리도 이러한 모순된 심리 그리고 경쟁이 일상화된 체제 속에서 형성된 '돈이 최고'라는 배금주의와 결합된 데에 뿌리를 두고 있어 보인다.

전국 곳곳에서 장례식장, 영안실, 화장터, 묘소 등의 이른바 '혐오시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과 반목을 최소화 하는 데는 일본인의 망자에 대한 태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죽음을 두려운 것이라고 하면서도 망자의 시신에 대해 혐오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식으로 우리도 인식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죽음을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생사가 하나임을 성찰하고 죽음이 삶의 종결이 아님을 깨달을 필요가 있겠다.

죽음에 대한 잠정적인 답을 찾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종교 보다는 차라리 현대 과학에 답이 있다. 현대과학에선 내세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건 없고 인간은 죽으면 한 줌 재만이 남는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지 오래다. 따라서 피할 수 없이 언젠가는 다가올 숙명적인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선 지금부터라도 의식 속에서 죽음을 연습함으로써 죽음에 대해 혐오하는 정서를 내면 깊숙한 데서 털어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자신의 죽음이든, 타인의 죽음이든 무릇 죽음 자체와 친밀한 친구가 돼야 하지 않을까? 죽음마저도 '소비'가 되는 이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 차원에선 혼을 뺏기지 않고 살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불필요한 갈등, 대립, 반목을 줄이려면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서상문씨는 고려대학교 연구교수입니다.



태그:#한일 사생관 비교, #한일 양국의 혐오시설 인식, #일본의 매장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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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국립 정치대학 역사연구소 역사학 석사, 박사(중국근현대사, 중국공산당사, 중국-외국관계사, 한국전쟁 전공), 경향신문 기자(출판국), 중앙대학 강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책임연구원, 해군발전자문위원 역임, 현재 중국공산당 창건사 연구중심(중국 상해) 해외특약연구원, 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경희대학교 지역연구원 중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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