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프랑스 서부, 낭트(Nantes)의 구시가는 중세시대부터 보존되어온 건축물들이 차분한 스카이 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낭트의 거리를 걷다 보면 이 안정적인 구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뚫고 하늘로 상승하는 듯한 인상적인 건축물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중세시대 유적들이 밀집해 있는 뷔페 지구(Bouffay Quarter)의 생 피에르 광장(Place Saint Pierre)에 세워진 이 압도적인 건축물은 낭트의 중세를 풍미했던 대성당이다. 이 멋진 대성당은 생 피에르 생 폴 대성당(La Cathédrale Saint-Pierre et Saint-Paul)이라는 아주 긴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나는 대성당 외부의 네 면을 한 바퀴 삥 둘러본 후에 대성당의 정문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대성당의 북쪽부터 먼저 둘러보았다. 대성당의 북문이 있는 벽면은 복원을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세월의 이끼를 뒤집어쓴 벽면 사이 사이에 새하얀 새 석재를 블록 맞추듯이 끼워 넣고 있었다. 확연히 눈에 띄는 새 석재들은 1943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과 화재로 인해 무너져 내린 것을 최근에 복원한 부분이다.

확연히 눈에 띄는 흰 석재들은 최근에 복원된 부분이다.
▲ 생 피에르 생 폴 대성당. 확연히 눈에 띄는 흰 석재들은 최근에 복원된 부분이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세월이 다른 두 벽면은 안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색상의 대비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선조들이 남긴 유산은 석재 하나 버리지 않고 그대로 보존한 채 사라져버린 석재만을 다시 만들어 정성스레 끼워 맞추는 낭트 사람들의 정성이 마음에 와 닿는다. 낭트인들의 피땀이 어린 이 새하얀 외벽은 종교적 건축물답게 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건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이 대성당은 전형적인 고딕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이 대성당의 외관을 보고 있으면 바로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떠오른다. 이 대성당은 파리의 노트르드 성당 등 프랑스 북부지방의 다른 성당들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외양의 고딕 성당이다. 이 대성당은 건립 당시에 유행했던 프랑스 후기 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아 웅장하고 화려하다. 마치 불꽃이 피어 오르는 듯한 수많은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이 장식되어 있다.

유럽의 오랜 도시들이 그러하듯이 낭트의 생 피에르 생 폴 대성당도 온 낭트 시민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도시의 랜드마크이다. 이 대성당은 브르타뉴(Bretagne)의 대공과 낭트 주교가 브르타뉴 공국 최고의 대성당을 만들기 위해 1434년부터 건립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성당 건립 공사가 1891년까지 457년 동안 진행되었으니, 이 성당 건립의 역사가 바로 낭트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성당 건축물을 457년 동안 만들었다니 낭트 인들의 종교적 신심이 얼마나 깊은지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불꽃이 피어 오르는 듯한 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장식되어 있다.
▲ 생 피에르 생 폴 대성당. 불꽃이 피어 오르는 듯한 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장식되어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이 대성당 바로 앞에서 성당의 모든 외관을 사진 프레임 안에 담기는 불가능하다. 나는 이 대성당을 사진 속에 담기 위해 뒤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순간 성당의 첨탑 쪽에서 영화에서나 들었음직한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용한 낭트의 구시가 광장 속으로 흘러가는 종소리는 참으로 운치가 있었다.

나는 광장에 서서 대성당의 정면 파사드를 바라보았다. 성당 입구 양 옆에는 긴 첨탑으로 연결된 높이 약 63m의 사각 탑 두 개가 성당 정면을 호위하듯이 하늘 높이 솟아있다. 그리고 성당 입구 하단에는 화려한 플랑부아양(Flamboyant) 양식으로 조각된 세 개의 아치 문이 나란히 서 있었다. 성당의 아치 문은 마치 타오르는 불꽃 모양으로 굴곡을 지며 상승하고 있었다.

붉은 성의를 입은 천사들이 브르타뉴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을 들고 서 있다.
▲ 천사 조각상. 붉은 성의를 입은 천사들이 브르타뉴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을 들고 서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대성당 외벽에는 기독교 성경과 낭트 역사를 상징하는 석제 조각들이 장엄하게 조각되어 있다. 붉은 성의를 입은 천사 조각상은 천상의 악기를 연주하는 천사들에게 동그랗게 둘러싸여 있다. 붉은 성의의 두 천사는 브르타뉴 대공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을 양 옆에서 들고 서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앙증맞다.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에 대공 가문의 문장을 자랑스럽게 장식한 것은 이 성당의 대공의 성당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순백색의 비가 내리는 듯한 하얀 석재 기둥들이 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 대성당 내부. 순백색의 비가 내리는 듯한 하얀 석재 기둥들이 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서쪽의 구시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성당의 3개 정문 중에서 가장 오른쪽 문이 다행히 열려 있었다. 나는 계단 몇 개를 올라 성당의 출입문을 통과한 후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성당 내부는 순백색의 석재로 만들어진 순백색의 환한 세상이었다. 석회암 동굴의 석주 같은 성당 기둥에서는 마치 순백색의 비가 내리는 듯 했다. 성당 천장에는 흰색 실 매듭이 포개진 듯한 석조 아치가 연속되며 아름답게 포개져 있었다.

성당 내부는 굉장히 조용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선 낭트 시민들은 말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곤거리고만 있었다. 대성당 출입문 앞에 초를 밝혀 놓은 곳에 낭트 시민들은 하나 둘씩 초를 켜고 있었다. 짙은 주황색 예쁜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불빛이 흔들리는 소리만이 성당 안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성당 측면의 석벽에는 여러 종교화들이 걸려 있는데 뜻밖에도 그림 한 점이 눈길을 잡아 끈다. 그림 속의 생 피에르 생 폴 대성당은 큰 화재로 성당의 지붕 전체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대성당이 2차 세계대전 후 기나긴 복원 과정 중이던 1972년에 작업자 실수로 큰 화재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실화로 인해 4백년 넘는 세월 동안 지어진 대성당이 파괴되는 대참사를 겪은 것이다.

4백년 넘는 세월 동안 건설된 대성당이 한 순간의 화재로 파괴되었다.
▲ 대성당의 화재. 4백년 넘는 세월 동안 건설된 대성당이 한 순간의 화재로 파괴되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당시의 대화재로 대성당의 탑과 스테인드 글라스도 큰 피해를 입었다. 지금 밝게 빛나고 있는 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모두 2차 복원작업으로 다시 만들어진 것들이다. 복원 당시 성당 상부의 창문들과 스테인드 글라스까지 모두 섬세하게 과거 모습 그대로 세밀하게 복원되었다. 여러 차례 다시 태어난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서 지금도 강한 햇빛이 성당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다른 성당의 종교화들과 달리 추상적인 문양이 그려진 이 스테인드 글라스는 마치 붉은 화염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 했다.

성당의 내부는 고딕 건축물답게 천장도 높고 공간이 넓게 트여 있다. 멈춰 서서 성당 내부를 보면 성당은 안으로 깊고 시원스럽게 펼쳐져 보인다. 성당을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날개 부분의 좌우 외벽에서 밖으로 돌출되는 별도 공간이 없이 길쭉한 구조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시원스런 공간 구조 덕에 사람들이 내는 조그마한 소리는 성당 내부에서 길게 울렸다. 성당 안에서 보니 왜 낭트 시민들이 성당 입구에서부터 입을 가리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지 이해가 됐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이 대성당에는 암굴의 성모상과 함께 낭트의 역사적인 대항해 시대를 기록한 많은 미술품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 낭트의 대성당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술품들은 많지 않다. 대성당이 파괴된 후 국보급 유물들을 모두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옮겼기 때문이다.

과거 유물은 원래의 장소에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인데 아쉽게도 낭트 대성당의 유물들은 루브르 박물관에 이사 가 있는 것이다. 나는 세계적인 유물이 모인 루브르 박물관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낭트의 보물들을 눈 여겨 볼지 의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나도 루브르에서 낭트 대성당의 보물들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낭트의 대성당에는 낭트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유물들은 남아 있다. 대성당 북쪽에 남아 있는 낭트 출신의 라모르시에르 장군 석관(Cénotaphe du général de Lamoricière)은 19세기 낭트의 역사적 줄기를 보여준다. 라모르시에르 장군은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에 공헌한 장군이자 아랍계 식민지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정치인이었다. 그는 나폴레옹 3세(Napoléon Ⅲ)의 떠오르는 권력에 대항하다가 체포되고 추방되기도 하였지만 그 후 프랑스로 돌아와 고향인 낭트의 이 대성당에 묻히게 되었다.

알제리를 지배하였던 이 장군은 낭트인들이 사랑하는 군인이다.
▲ 라모르시에르 장군의 석관. 알제리를 지배하였던 이 장군은 낭트인들이 사랑하는 군인이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그의 새하얀 대리석 석관 주변으로 강렬한 검은 색의 청동인물상 4개가 둘러싸고 있다. 이 인물상들은 다름 아닌 라모르시에르 장군의 4가지 미덕을 상징하고 있다. 존경 받는 장군의 일생을 글로 남기지 않고 석관 주변 조각상으로 상징하여 표현한 것이 아주 흥미롭게 보인다.

양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동상은 '믿음'을 나타내고, 깊은 고뇌에 빠진 사상가는 '지혜'를 상징하고, 두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범세계적인 자비'를 나타내며, 왼손에 칼을 들고 있는 병사는 '군인의 힘'을 상징한다. 그는 알제리를 지배할 당시에도 아랍인들을 애정을 가지고 대했던 탁월한 장군이었다.

석관의 청동상 같이 4가지 미덕을 한 인간이 완벽하게 함께 갖추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라모르시에르 장군은 낭트 인들의 마음 속에 미덕을 갖춘, 존경 받는 장군으로 현재도 남아있다. 낭트의 심장인 대성당에 시신을 모실 정도로 라모르시에르 장군은 낭트인들의 정신적 지주이다.

이 낭트의 대성당에는 한눈에 봐도 더욱 압도적인 흥미로운 유물이 있다. 성당 남쪽에 자리한 이 유물은 하얀색과 검은색 대리석을 사용한 르네상스 양식의 장식 속에 숨어 있다. 이 놀라운 유물은 대성당 내에 안치된 브르타뉴 대공 프랑소아 2세(François II de Bretagne, 1433~1488)와 그의 부인인 대공비 마르그리트 드 프와(Marguerite de Foix, 1458~1486)의 아름다운 석관이다.

이 아름다운 석관은 딸인 안느 드 브르타뉴가 주문하여 제작되었다.
▲ 프랑소아 2세 부부 석관. 이 아름다운 석관은 딸인 안느 드 브르타뉴가 주문하여 제작되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나는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의 프랑소아 2세 석관(Tombeau de François II de Bretagne)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 석관 옆에는 계단을 올라가 석관을 위에서 조망할 수 있는 시설까지 만들어져 있고, 대성당을 구경 온 프랑스 가족 몇 명이 계단 위에 올라가서 석관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계단 위에 올라가 위에서 석관의 여러 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석관 주변에는 성당 내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 관심 있게 석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수많은 낭트 시민들이 드나드는 넓은 대성당 안에 있으니 도굴 걱정은 전혀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석관 안에 잠들어 있는 프랑소아 2세는 프랑스로부터 브르타뉴의 준독립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힘쓴 대공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에게 저항하던 프랑소아 2세는 1488년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지배기반이 무너지고 브르타뉴 공국을 프랑스 왕의 속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후 프랑소아 2세는 승마를 하던 중에 말에서 떨어져 몇 달 만에 사망을 하고 말았다. 브르타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프랑소아 2세는 이 낭트 대성당의 정교하게 설계된 석관 안에 안치되었다.

프랑소아 2세는 프랑스로부터 브르타뉴의 준독립을 유지하려고 힘을 썼다.
▲ 프랑소아 2세 부부. 프랑소아 2세는 프랑스로부터 브르타뉴의 준독립을 유지하려고 힘을 썼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프랑소아 2세 옆에는 프랑소아 2세의 두 번째 부인인 대공비 마르그리트 드 프와가 나란히 누워있다. 그녀는 스페인 바스크 지역에 있던 나바라(Navarre) 왕국의 공주였다. 그녀는 프랑소아 2세와의 사이에 자식 2명을 두었는데, 그들 사이에 태어난 첫째 딸이 프랑소아 2세의 유일한 합법적인 후계자였던 안느 드 브르타뉴(Anne de Bretagne)였다. 현재 이 부부는 성당에 성스럽게 함께 누워 있지만, 프랑소아 2세가 샤를 7세(Charles VII)의 옛 정부와의 사이에도 몇 명의 사생아들을 두었을 정도로 외도를 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생전에 속 좀 썩었을 것 같다.

이들의 시신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석관은 딸인 안느 드 브르타뉴가 주문하여 1507년에 제작되었다. 이 석관은 브르타뉴의 자치와 프랑소아 2세의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싸웠던 안느 드 브르타뉴가 최고의 정성으로 부모를 모신 석관이다. 당시 이 석관은 묘비 제작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장 페레알(Jean Perréal)이 디자인하고, 프랑스의 조각가 미쉘 콜롱브(Michel Colombe)가 조각하였다.

이 석관은 미쉘 콜롱브의 대표작이라고 불릴 정도로 프랑스 초기 르네상스의 훌륭한 조각품이다. 이 석관의 네 모서리에 네 여신들의 미덕상(美德像)을 세웠는데, 이러한 양식이 바로 이탈리아에서 도입된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양식이다.

석관 네 모서리를 돌면서 둘러보니 지혜의 여신, 정의의 여신, 절제의 여신, 용기의 여신들이 석관을 보호하듯이 둘러싸고 있다. 이 네 여신들은 바로 기독교 윤리에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룩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덕(德)을 의미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 미덕을 갖추어야 에덴 동산과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니, 이 여신들은 프랑소아 2세와 대공비 마르그리트 드 프와를 상징하는 상징물인 동시에 그들이 좋은 길로 인도되기를 바라면서 만들어진 상징물이다.

프랑소아 2세의 석관을 지키고 있는 사자와 그레이하운드 조각상이다.
▲ 사자와 그레이하운드 석상. 프랑소아 2세의 석관을 지키고 있는 사자와 그레이하운드 조각상이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나는 석관을 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르그리트 드 프와 대공비의 발 아래에 그레이하운드 한 마리가 배를 바닥에 대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리석 그레이하운드는 가슴팍에 문장(紋章)을 꼭 안고 있는데, 이 문장은 바로 브르타뉴 대공 프랑소아 2세의 문장이다.

문장을 놓치지 안으려고 안으로 오므린 개의 앞발을 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이 그레이하운드 석상이 마르그리트 드 프와 대공비가 기르던 개를 모델로 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이 그레이하운드는 당연히 충절의 상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수호견이 마치 대공 가문의 일원인 양 고개를 빳빳이 들고 위엄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수호견 옆에는 프랑소아 2세의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도 함께 석관을 지키고 있으니 이 석관에서 그레이하운드는 사자와 동급인 셈이다.

프랑소아 2세 부부의 발 밑에 앉아있는 그레이하운드는 마치 프랑소아 가문의 가족같이 보인다. 현재도 지구촌에서 가장 높은 반려견 문화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답게 과거의 프랑스도 개를 사랑하는 문화는 남달랐던 것 같다.

나는 석관 주변을 보다가 석관의 북서쪽에 자리잡은 지혜의 여신(La Prudence)을 보고 다시 한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금방 휘날릴 것 같이 섬세한 머리카락을 지닌 지혜의 여신 뒤편에 또 한 개의 얼굴이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여신 얼굴 뒤편에 마치 아수라 백작 얼굴처럼 남자 노인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었다. 노인의 얼굴 밑으로는 가슴 아래까지 길다란 수염이 자라 있었다.

마치 아수라 백작처럼 남자와 여자가 함께 양면 인물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 지혜의 여신. 마치 아수라 백작처럼 남자와 여자가 함께 양면 인물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이 조각상을 조각한 미쉘 콜롱브는 왜 지혜의 여신 뒤에 수염 무성한 노인의 얼굴을 함께 조각하였을까? 아름다운 지혜는 오랜 세월 쌓인 연륜에서 나온다는 것인가? 지혜로운 늙은 여성을 상징하는 것인가? 여성의 내면에 잠재된 강력한 에너지를 설명하려는 것인가? 마치 긴 고통의 세상을 거쳐온 여성들이 비로소 지혜를 깨닫는 것으로도 느껴졌다.

나는 석관 주변에서 석관 설명문을 읽고 있던 아저씨에게 이 두 얼굴의 여신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이 지혜의 여신이 기독교인의 신중함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16세기의 유럽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이러한 두 얼굴 묘사는 지혜가 성숙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성숙한 사람들은 과거의 노인을 통해 현재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청년과 같은 미래를 준비하지요."

신비롭게 묘사된 이 양면 얼굴은 아수라 백작이 아니라 지혜가 성숙된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 아저씨의 한 마디에 여신의 석상은 깊은 철학적 의미를 가지고 다가왔다. 여신의 대리석 석상은 무서우면서도 아름다웠다. 쳐다볼수록 계속 빠져들게 되는 신비한 만남이었다. 나는 노인과 여인의 얼굴이 함께 보이는 방향에서 계속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태그:#프랑스, #프랑스 여행, #브르타뉴, #낭트, #생 피에르 생 폴 대성당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