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글을 가다듬는 일을 퇴고(推敲)라 한다. '밀 퇴'와 '두드릴 고'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퇴고에는 중국 당나라 때의 유명 시인 한유(768~824)와 가조(779~843)의 고사가 얽혀 있다.

당나라의 서울 장안 거리를 오가던 가조가 어느 날 문득 시상을 얻어 즉흥시 초고를 지었다. 그런데 가조는 글자 한 자 때문에 아래의 ①과 ② 중 어느 쪽이 더 훌륭한 작품으로 완성될지 최종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① 한가로이 지내니 이웃도 없고
(閑居隣竝少)
풀속 오솔길은 황량한 정원으로 이어지네
(草徑入荒園)
새는 연못가 나뭇가지 위에 잠들어 있는데
(鳥宿池邊樹)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미네'
(僧'推'月下門)

② 한가로이 지내니 이웃도 없고
풀속 오솔길은 황량한 정원으로 이어지네
새는 연못가 나뭇가지 위에 잠들어 있는데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네'
(僧'敲'月下門)

스님이 문을 '미는(推)' 것과 '두드리는(敲)' 것 중 어느 행동이 새가 나뭇가지 위에 잠들어 있는 상황과 더 어울릴까? 소리가 나지 않게 살그머니 '미는' 것과 똑똑똑 소리가 나게 '두드리는' 것 중 어느 쪽이 조용한 상태를 더욱 극적으로 형상화해내는 표현일까? 가조는 그것을 두고 고심하느라 길 가운데에 멈춰 서 있었다.

그래서 고위 관리인 한유의 가마가 지나가는 데 방해가 되었다. 한유의 호위 관리들이 가조를 붙잡아 문책했다. 그때 한유가 가조에게 길을 막은 까닭을 물었고, 가조는 '퇴'와 '고' 중 어느 글자를 선택할지 고민하느라 그렇게 되었노라 대답했다. 한유는 '고'를 권했다. 그 이후 글을 가다듬는 일을 두고 '퇴고'라 부르게 되었다.

소설에서 '허구'가 아니라 '사실'임을 강조하는 수법

소설 <로스쿨교수 실종사건>
 소설 <로스쿨교수 실종사건>
ⓒ 문예바다

관련사진보기


소설은 흔히 허구라 한다. 지어낸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러나 있을 법한 이야기라야 소설로 인정 받는다. 현실 세계의 실상을 지나치게 벗어난 이야기는 '공상' 소설로 격하된다. 연속극도 '막장' 드라마로 분류된다. 앞에 수식어가 붙으면서 '본격' 문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공표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가는 자신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기법을 동원한다. 압축의 미학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 위해 시인이 글자 한 자에 노심초사하듯이, 소설가는 살아움직이는 리얼리티를 획득하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김동리가 1966년에 발표한 <까치소리>도 소설가의 그같은 고뇌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나는 서점에서 <나의 생명을 물러 다오>란 책을 구입했다. "살인자의 수기"란 부제가 붙어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로 시작된다. 수기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니 허구로 여기지 말고 실제 사실로 보아달라는 주문이다. 독자는 김동리의 이 주문에 빨려들어 더욱 소설을 실감나게 읽는다.

김명조의 장편 <로스쿨 교수 실종 사건>은 소설 본문이 아니라 '작가 후기'에 '이 작품은 실존하는 인물의 삶을 소재로 하였으나 대부분 작가의 창작물이며 각 상황은 픽션으로 구성됐다'라고 천명한다. 작가는 스스로 그렇게 밝힌 일을 두고 '실존 인물을 허구 상황에 접목할 때 발생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미리 지적해 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독자는 '실존하는 인물의 삶을 소재로 하였다'는 대목에 각별히 주목하게 된다.

소설의 모델 인물이 누구일까? 독자는 그것이 궁금하다. 다만 기자는 <로스쿨 교수 실종 사건>을 그저 장편소설로 오늘 읽으려 한다. 작가가 이미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하여 작품을 썼다고 말한 상황에서, 한 사람의 독자인 기자가 소설의 모델이 누구인지까지 밝혀야 할 의무는 없는 까닭이다.

아내에게도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린 로스쿨 교수

소설은 '모든 상황을 종합해 봐도 한명수 교수의 잠적은 도대체 설명이 되지 않았다'라고 시작된다. 사연이 복잡하다는 사실을 간결하게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서두 문장이다. 한 교수의 부인인 이유정과 오랜 지인인 작중 화자 '나'는 '도대체 설명이 되지 않는 잠적'을 실행한 행방불명자를 찾아나선다. 이유는 가늠할 수 없어도 아내와 지인이 행불자를 찾아나서는 것은 현실 세계의 상식이고, 그것이 곧 소설이기 때문이다.

한 교수의 재직 학교인 배문대 법학전문대학원이 첫 수색 지역이다. 교수 연구실 건물에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다른 교수님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마치 우리 로스쿨의 입시에 엄청난 부정 행위가 있는 것처럼 조작된 내용을 퍼뜨린 한명수는 자결하라!' 등의 내용이 적힌 대자보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작가는 한명수 교수가 '오래전부터 각 신문에 부실한 로스쿨 제도의 운영에 대하여 지적하는 칼럼'을 썼고, '최근에는 면접 부정을 폭로하여 신문과 방송에 큰 이슈가 되었다'면서 그가 그렇게 행동한 데에는 '학생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스승의 아프고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옹호한다. 소설의 기본 구조가 대략 헤아려지는 부분이다.

한 교수와 '다른 교수님들' 사이에 로스쿨 운영과 입시에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인식의 차이에서 갈등이 빚어졌다. 갈등은 명예훼손 사건으로 번졌다. 로스쿨 개혁이라는 본질은 온데간데 없다. 조직 내부의 허점을 사회구조적 해결 과제로 제기한 장본인에 대해 위해를 가하려는 집단 구성원들의 잘못된 공동체 의식만 난무한다. 이에 저항하던 한명수 교수가 2심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라진 것이다.

추리소설의 기법을 활용한 흥미진진한 전개

지금까지 소개만으로도 <로스쿨 교수 실종 사건>이 추리소설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설명되었다. 로스쿨 교수라는 전문 직업인을 등장시킨 '지식인 소설'임에도 평범한 스토리 전개를 선택하지 않고 추리소설 형식을 원용하여 읽는 재미를 배가하고 있다.

물론 주인공이 지식인이라고 해서 이 소설을 지식인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로스쿨 교수 실종 사건>의 핵심 내용은 로스쿨 교수의 연애 등 단순한 사생활이라 아니라 법조 개혁, 로스쿨 개혁과 같은 전문 영역을 둘러싼 갈등이다. 그래서 지식인 소설이다.

초평 저수지 방문도 혹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닌가 하고 주변을 수색하는 차원에 멈추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나는 한명수 교수가 예전에 이곳에서 들려주었던 사법 제도의 문제점과 개혁 방안을 회상한다. 독자는 한 교수의 행방도 궁금하지만 우리나라 법조계의 현실과 해결 과제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얻게 된다. 지식인 소설답다는 말이다.

<로스쿨 교수 실종 사건>이 지식인 소설다운 면모를 획득하게 된 데에는 작가의 전문성도 크게 한몫을 했다. 작가는 1992년 서울신문 제 1회 계간문예 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등단한 소설가이지만, 법원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검찰과 법원에서 간부로 근무해온 법조인이다. 작가의 그러한 경력은 작품을 법률 소설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현상 광고를 내어 한명수 교수를 찾는 가족들

'실종 당시 한명수 배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동료교수에 대한 명예훼손 사건으로 형사재판을 받고 있었고, 로스쿨의 문제점과 그 부작용 현상 및 운영상의 비리 등을 지적하고 이 제도의 개선방안을 주장하면서 여러 곳으로부터 공격과 비난을 당해 왔습니다. (중략) 한명수 교수의 생사에 관한 제보를 해주시는 분은 금 5천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며 사회공익의 실현에 헌신한 이 사람에 대하여 사회적 관심을 구합니다.'

가족들은 마침내 신문에 현상금 5천만 원을 내걸고 한명수 교수를 공개적으로 찾아나선다. 소설은 가족들이 심인 광고를 내고, 한명수 교수의 실종에 대한 기획 기사가 게재되면 '수사 기관을 자극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현실에서는 로스쿨 입시 비리 수사가 미진하다는 뜻이고, 소설에서는 대단원이 눈앞인데도 아직 한명수 교수의 행방이 오리무중이라는 뜻이다.

역시 소설이 막을 내려도 한명수 교수는 어디에 있는지 밝혀지지 않는다. 자신이 바라는 '사법부 개혁'과 '법조인 선발 방법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사실 돌아올 곳이 없다. 그가 대학과 가정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우리 국가, 사회, 구성원 모두의 몫이다.

덧붙이는 글 | 김명조 장편소설 <로스쿨 교수 실종 사건>(문예바다, 2017년 9월 30일), 305쪽, 1만2천 원.



로스쿨 교수 실종사건

김명조 지음, 문예바다(2017)


태그:#로스쿨교수실종사건, #김명조, #로스쿨, #김동리, #까치소리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