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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 인물의 삶을 통해 내 삶을 이해하고 싶었던 적이 많다. 하지만 내가 재미있다고 손꼽는 소설 속 주요 인물은 거의 다 남성이었고, 그들의 삶과 내 삶에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책을 읽을 때면 애써 내가 좋아하는 인물과 나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 시도했지만, 아마 완벽히 성공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씨네 21 이다혜 기자가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에서 한 이 말을 이해한다.

"내가 읽은 것과 경험한 것, 배운 것, 느낀 것 사이에는 늘 이해할 수 없는 틈이 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페미니즘 담론이 형성되고 그에 따라 '틈'을 더 자주 의식하게 되면서 내 독서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예전보다 더 많이, 여성 작가들의 책에 손이 가고 여성 소설가들이 섬세하게 만들어낸 여성 인물들에 관심이 간다. 나와 같거나 비슷한 고민에서 출발해 여성이라서 겪어야 하는 인생을 살다가 끝내 원하는 목적지에 가닿은 그녀들의 모습에 힘을 얻기도 한다.

한국 여성 소설가 일곱 명의 단편을 묶은 페미니즘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에서는 특히 손보미 작가의 <이방인>에 자꾸 생각이 머물렀다. 표제작인 조남주 작가의 <현남 오빠에게>를 포함한 다른 소설들은 독자에게 어렴풋이나마 맨스플레인,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방인>은 아니었다. 도리어 독자에게 '응? 이게 왜 페미니즘 소설이지?' 하고 생각하게 한다.

여성의 삶이 정가운데에

조남주, 최은영 외 <현남 오빠에게>
 조남주, 최은영 외 <현남 오빠에게>
ⓒ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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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은 폐인이 된 경찰이다. 2년 전에 벌어진 어떤 사건 때문에 경찰복을 벗고 도시를 배회하며 죽은 듯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 근처엔 주인공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후배가 한 명 있고, 또 이 도시에선 2년 전 그 사건과 연관이 있는 듯한 사건이 벌써 몇 번째다. 뿌리치고, 고뇌하고, 망설이다가 다시금 총을 손에 든 주인공. 소설은 주인공이 다시 경찰로 복귀하며 끝이 난다.

이 소설이 페미니즘 소설인 이유는 뭘까. 주인공이 여성이기 때문이며, 이 여성 주인공이 수많은 누아르 영화나 소설 속 남성 주인공들처럼 자기답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손보미 작가는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성녀와 창녀 사이에서 허둥거리게 하는 대신, 여성혐오에서 깔끔하게 벗어난 인물을 그려냈다. 주변 인물들 역시 주인공을 경멸해야 할 인간, 가까이하기 싫은 인간으로 볼뿐이다.

"세상에, 이방인이 납시었구만"이라는 마지막 대사는 그래서 매우 의미 있고 인상 깊다.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하는 동시에, 주인공이 이야기 속에서 한 명의 인간(이방인)으로 철저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민하는 캐릭터를 유독 좋아하는 나 같은 여성 독자에게는 주인공과 나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이 책을 기획한 출판사 편집자는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겐 이제 이야기가 필요하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페미니즘 언어는 충분해진 데 반해, 그 언어에 맥락과 감각을 입혀주는 이야기는 부족했다는 뜻의 말이었다. 실제로 <현남 오빠에게>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집이다.

여기에 더해 여성의 삶이 정가운데에 당당히 자리 잡은 이야기가 필요한 건 여성 독자가 말 그대로 즐겁게 책을 읽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근미래의 독자가 더는 "내가 읽은 것과 경험한 것, 배운 것, 느낀 것 사이에는 늘 이해할 수 없는 틈이 있었다" 하고 말할 필요 없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남 오빠에게> 같은 책이, <이방인> 같은 소설이 앞으로 꾸준히 더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소설 속 인물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특정 성을 인식하며 한계를 맛보는 대신 기분 좋게 이야기를 즐기는 경험을 여성 독자라고 못할 이유는 없으니까.

덧붙이는 글 | <현남 오빠에게>(조남주, 최은영, 김이설 외/다산책방/2017년 11월 15일/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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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어나더커버 특별판)

조남주 외 지음, 다산책방(2017)


태그:#페미니즘, #페미니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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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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