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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일까? 정의는 보편적이며 명확한 관념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의에 대해 철학자들의 견해도 엇갈린다. 그러나 대부분 옳다고 생각하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거나 선을 행하는 행위야말로 정의라 여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란 항상 옳다고 생각하기 쉽다. 정의로운 마음이야말로 누구나 가져야 할 덕목이며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현실 세계에서 정의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선을 위한 행위가 오히려 악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때론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의란 이름으로 둔갑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믿는 정의의 실체가 때론 군중심리에 휩쓸려 무작정 정의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스티스맨>표지
 <저스티스맨>표지
ⓒ 나무옆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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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맨>은 인터넷 속 군중심리에 초점을 맞춘 소설이다. 또 다수의 여론이 곧 정의로 둔갑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해 수많은 정보를 접하게 된다. 단순한 가십부터, 사건사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까지 생생히 바라볼 수 있고, 인터넷 속에서는 다양한 갑론을박이 오간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갈수록 어떤 정보를 걸러 듣거나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군중심리에 휩쓸려 거짓 정보를 진실로 판단하거나, 그릇된 정의를 정의로운 행동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저스티스맨>은 이러한 정보사회의 맹점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희생자의 이마에는 두 발의 총상이 나 있고, 범인이 사용한 흉기는 명백히 총이다. 총기 사용이 금지된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총기 살인 사건은 화제가 되지만, 수사의 진전은 없고, 경찰은 질타의 대상이 된다.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스티스맨'이란 닉네임을 가진 누리꾼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가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다.

저스티스맨은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데 그가 올리는 게시물은 경찰에서 발표하지 않은 사건의 이면을 드러낸다. 물론, 그것은 저스티스맨에 의해 각색된 사건의 재구성이다. 그러나 그가 세운 가설과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살인 사건이 가진 이면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그럴듯한 증거와 정황, 그보다 완벽할 수 없는 인과관계를 지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게 된다.

처음 누리꾼들은 저스티스맨이 재구성한 사건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하고, 그럴듯한 분석에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살인사건은 새로운 사건과 연결되고, 오히려 희생자들이 범한 범죄행위가 드러나면서 희생자들은 명백히 죽어 마땅한 '악의 축'이 된다. 그러면서 살인마는 죽어 마땅한 죄인을 단죄하는 영웅으로 변한다. 마치 <데스노트>의 '키라'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세 가지 측면의 폭로를 이어나간다. 하나는 인터넷의 속성이다. 세 명의 희생자와 연결되는 일명 '오물충 사건'은 대중이 가십이라 여기는 사건이 당사자에게 어떤 고통을 안겨주는지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또 그것이야말로 범죄행위임을 부각시킨다. 우리가 인터넷 속에서 누군가에게 가하는 '마녀사냥' 말이다.

마녀사냥이야말로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의 표본은 아닐까 싶다. 당사자가 입을 피해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해자는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또 군중심리에 휘말려 무작정 비난하거나 악플을 달기 바쁘다. 그것이 누군가를 망가뜨릴 수 있는 행위라는 사실은 망각한다. 정의란 선을 행하는 행위이지만, 그 순간, 악플이야말로 정의며, 마녀사냥의 대상은 정의롭지 못한 죄인이다. 마녀사냥에는 과연 진정한 대의가 존재할까?

두 번째 폭로는 가려진 희생자들의 이면이다. 희생자들은 점차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그 속에 드러나지 않은 사건의 이면이 드러난다. 우리가 접하는 뉴스나 정보들은 언제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그 이면의 모습인 본질은 망각하기 쉽다.

최근 들어 고속버스의 대형사고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지만, 그 책임을 운전기사에게만 전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운전기사의 잘못은 명백하지만, 운전기사들의 과한 노동시간과 사측의 이윤 추가가 가져온 불상사란 사실은 들여다보지 못한다. 모든 사회문제는 그 이면을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근본적인 원인에 접근할 수 없고, 해결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 번째 폭로는 다수가 옳다고 믿으면 그것이 정의가 되는 대중의 속성이다. 살인마가 영웅이 된 것은 희생자들의 드러나지 않은 죄가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수의 여론이 살인마를 옹호하면서 형성되었다. 살인마는 죄인을 단죄했고, 그는 하늘을 대신해 천벌을 내린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살인사건이라는 본질은 잊혀졌고, 살인은 명백히 정의와 어긋나지만, 대중은 오히려 살인마를 지지하는 이상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지막 희생자가 사회적인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대중은 혹시나 입을 잘못 놀렸다가 자신에게 피해가 갈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곧 대중이 지지했던 영웅은 사라지고, 팬카페는 안티카페로 변한다. 다수가 옳다고 믿은 정의가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져버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가장 큰 폭로는 소설 속 화자 즉, 작가의 비판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독백 부분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럼에도, 자발적으로 신문 한 장도 사 읽는 법이 없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꼭두각시처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뜨는 기사만 수동적으로 클릭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좋아하는 기사만 취향대로 골라서 읽다 보니 그것이 오로지 그들이 아는 세상의 전부가 되었을 따름이었다. 타자의 숨겨진 사생활을 파헤쳐 먹고사는 자들이 키보드를 두들겨 올리는 활자가 곧 이 세계의 실체라고 믿고 사는 붕어 인간들. 

누구와 있든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걸으면서도, 조만간 전자기기 화면 속에 대가리를 처박고 사는 그들은 무엇을 판단하는 기능도 상실해버렸다. 마치 어느 시대엔 가는 존재했었을 신체 일부가 퇴화해버린 진화생물처럼 그들은, 그런 능력 자체가 있었는지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타자의 삶,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온 명사들의 개인 가치관에 기대에 자신의 현실을 위로하고 무의미한 미래를 설계했다. 말하자면 그저, 남이 살아온 발자취에 ctrl+c를 클릭하고 다시 자신의 삶에 ctrl+v를 끊임없이 붙여 넣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241쪽).

지나치게 노골적인 비판의식은 이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가짜 뉴스가 판치고, 잘못된 정보가 진실인 양 둔갑하는 경우가 많고 우리가 가진 지식도 백과사전식 지식이 되기 일쑤다. 작가의 비판처럼 지나치게 타인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해 모든 걸 판단한 것은 아닌지, 또 그것이 진실이자 정의로 착각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는 진정한 정의일까?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 역시 내가 판단하고 내린 생각일까? 아니면 타인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은 아닐까? 인터넷 세상이 가속화될수록, 나라는 '자아'의 개념이 희박해지고 있다. 좀 더 비판적으로 자신만의 줏대를 갖고 진실을 판단하는 능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가 정의라 외치는 일들이 사실은 부조리로 가득 찬 일이 될 수도 있고, 한 개인을 파멸로 몰아갈 수도 있으며, 정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많은 일과 그 속에 가려진 이면, 다수가 옳다고 믿으면 그것이 곧 권력이 되는 사회현상까지, 많은 것들을 고민해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인터넷 속에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를 구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모바일과 인터넷 속에 갇혀 사는 우리에게 더더욱 요구되는 능력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정의의 실체.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나무옆의자(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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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저스티스맨, #도선우,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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