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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배낭에 눌려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신발을 끌 때마다 푸석한 흙먼지가 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노력할 필요도 없고, 자신과 아등바등 싸울 이유도 없다. 그냥 주어진 여건에 맞춰 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이며 살면 된다. 남들 하는 대로, 남들 하는 만큼만 따라가면 무난하게 살 수 있다. 나를 비난할 사람도 없다. 그런데 왜 나는 이 먼 호주까지 와서 거지꼴을 한 채 며칠 밤낮을 달리고 있는 걸까. 발을 땅에 댈 때마다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을 참아가면서 왜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내 한계의 경계에서
▲ 호주 대륙 530km를 달리다 내 한계의 경계에서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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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지난 8일 동안 호주 엘리스스프링스를 출발해 400km를 넘게 달렸다. 전 세계에서 모인 23명의 선수는 전사처럼 때로는 야수처럼 호주의 산야를 누볐다. 레이스 9일째, 호주의 정중앙 에어즈 록(Ayers Rock)이 있는 피니시 라인을 향한 마지막 무박 2일간 129km의 주로 위에서 온 힘을 쏟았다. 종아리는 돌부리에 부딪혀 살이 찢기고, 신발 속 돌 알갱이가 온 발바닥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새벽 5시부터 마지막 사투가 시작됐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내 인생에서 한 번쯤은 목숨 걸고 찾아야 할 나만의 가치가 있다.

노출된 살갗이 익어갔다
▲ 작열하는 대륙의 열기 노출된 살갗이 익어갔다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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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를 벗어나 사구 지역으로 접어들자 신발 속에 가득 찬 모래가 발바닥에 쇠붙이를 붙인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났다. 몸통에 붙어 있는 다리도, 팔도, 어깨도, 내 머리까지 모든 게 무거웠다. 5kg도 안 되는 배낭이 어깨와 허리를 짓눌렀다. 어떻게 해서라도 무게를 줄여야 했다. 우선 옷과 배낭에 붙어 있는 것부터 떼서 버렸다. CP를 거쳐 갈 때마다 옷핀부터 실오라기까지 버릴 수 있는 건 낱낱이 버렸다. 그렇다고 무게가 줄어들 리는 없었다.

경기가 시작될 때는 거침이 없다. 배낭이 식량과 장비로 꽉 찼지만 어깨의 하중도, 주로의 돌부리도, 발바닥의 통증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어지간한 산 능선이나 협곡은 너끈히 넘나들었다. 하지만 레이스가 중반을 넘어 들자 늘어나는 부상과 허기가 선수들을 기진맥진하게 했다.

버리자, 버리자, 뭐든 버리자! CP(체크포인트, check point)에 도착하자마자 배낭을 내려놓았다. 내일이면 레이스가 끝나니 이제 필요 없을 치약과 칫솔을 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시 또 몇 걸음 가다 주저앉았다. 이걸로 어깨의 부담을 줄이기엔 역부족이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는 내게 소중한 것, 아까운 것들을 버려야 했다. 배낭 속에 암벽과 나뭇가지에 찢긴 바지가 보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나의 힘든 레이스를 같이한 추억이 깃든 바지였다. 아깝지만 바지마저 다음 CP에서 던져버렸다.

엘리스스프링스에서 에어즈록까지
▲ 지구상 최강자들의 역주 엘리스스프링스에서 에어즈록까지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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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시작과 끝
▲ 흐물거리는 발톱 고통의 시작과 끝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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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배낭 무게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대체 뭘 얼마나 더 버려야 할까. 아니, 그게 아니다. 나는 무엇이 아까워서 무게 때문에 걷지도 못하는 이런 상황에서도 버리지 못하는 걸까. 결승선까지 꼭 안고 가야 할 만큼 내게 중요한 것들이 무엇일까? 배낭을 거꾸로 뒤집었다. 꾀죄죄하기 그지없는 물건들이 모래 위로 쏟아졌다. 사흘 동안 신은 더러워진 양말, 레이스 중에 먹으려고 남겨둔 건조 비빔밥, 기름때가 덕지덕지 낀 코펠까지 모두 드러냈다.

레이스를 멈추고 다시 배낭 속을 들여다봤다. 이젠 더는 덜어낼 것이 없었다. 아니 없는 것이 아니라 외면했나 보다. 몇 년 동안 나의 이부자리가 되어준 침낭과 묵직한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 결승선을 밟을 때 세리머니를 하려고 준비해 온 대형 태극기였다. 둘 중 하나를 버려야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것 같았다. 인생 역시 선택의 연속이라지만… 선뜻 결정할 수 없었다. 침낭을 버리면 분명 CP에서 덜덜 떨며 추운 새벽을 보내야 한다. 태극기를 버리면 출발할 때부터 계획한 멋진 세리머니를 접어야 한다. 그래도 절망 속에는 늘 숨겨진 희망이 있다.

살아남기 위해 달렸다
▲ 선수들은 질주 본능 살아남기 위해 달렸다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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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달리고 싶다'
▲ 캥거루의 호기심 '나도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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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그깟 완주 세리머니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막 레이스를 시작한 지 8년, 8박 10일간 530km라는, 지구상 최장의 레이스에서 나는 태극기 세리머니를 꼭 하고 싶었다.

한편으론 어려운 환경 때문에 원하는 것을 끝까지 해본 적 없는 청춘을 보냈기에 나는 늘 완주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태극기 세리머니를 통해 가슴 속 열망을 현실로 끌어낸 나에게 멋진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런 태극기를 버리고 가야 한다니….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무게로 따지면 침낭만큼이나 무거웠지만, 그 양자택일의 갈림길에서 나는 침낭을 마지막 CP에서 내려놨다.

24명 전사들
▲ 전 세계에서 모인 24명 전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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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발화로 인한 화재
▲ 불타는 호주 대륙 자연발화로 인한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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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선택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고, 먼 길을 돌아 인생을 허비하기도 한다. 철없던 고교 시절 학교를 중퇴하고, 길도 아닌 길을 쫓아 방황하다 다시 교정을 밟는 데 30년의 세월이 걸렸다. 어른이 돼서는 부와 권력과 학벌이 성공의 척도, 전부가 돼버린 이 사회에서 헛손질하고 때론 숨죽이며 살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던 공직에 사표를 던진 후의 결과는 나를 한동안 지각 인생으로 살게 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먹었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 그 길이 가능한 길이든 불가능한 길이든 간에 말이다.'

가장 소중한 것들과 결별의 대가는 가혹했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그 힘든 단계를 견뎌 이겨낼수록 나는 더욱 강해졌고, 더 큰 시련 앞에서 나는 더욱 대범해져 있었다.

끝없는 고속도로 위에서
▲ 행진 끝없는 고속도로 위에서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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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박10일 530km 레이스의 피날레
▲ 한계를 넘어선 자의 환희 8박10일 530km 레이스의 피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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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품고 다시 일어나 뛰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았다. 발가락은 감각을 잃었지만 가슴은 여전히 뜨거웠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갈지 결정해야 하는 절박한 순간을 경험하면서 내가 이 미친 짓을 계속하는 이유도 알게 된 것이다. 가슴 속에 담아둔 열망을 현실로 끌어내는 일, 내가 가장 원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의 열망은 무엇인가? 분명 당신에게도 끝까지 가보고 싶은 열망이 있을 것이다. 


태그:#사막, #오지, #도전, #모험, #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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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핑계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넘나드는 조금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오지레이서라고 부르지만 나는 직장인모험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난 19년 넘게 사막과 오지에서 인간의 한계와 사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인생의 희노애락과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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