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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1일 오후 2시, 마지막 사법시험 2차 합격자가 발표되었다. 50여 명의 합격자가 있을 것으로 예상됐던 가운데 55명은 예상보다는 많은 수준. 3차 시험에서는 전원이 합격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이들이 실질적으로 마지막 사시합격자가 되는 셈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3대 고시 중 외무고시에 이어 사법시험이 폐지되고 행정고시만이 남게 된다.

1962년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장 모습. 남성수험생들 사이로 양장차림의 여성수험생이 눈에 띈다.
▲ 1962년, 제14회 고등고시 사법과가 치러지고 있는 서울대 법대 시험장 1962년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장 모습. 남성수험생들 사이로 양장차림의 여성수험생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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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주변엔 사시합격자가 몇 명 있는 편이다.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의 아주 가까운 혈연의 이야기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고 여겨지는 대학의 법대에 입학했다. 원래 외교관이 꿈이었던 그가 그날은 운이 좋았는지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았던 모양이다. 당시 학력고사에서 전국 20등 안에 들었다. 담임교사의 조언으로 원래 지망하던 정치외교학과를 포기하고, 법대에 진학했다.

1980년대는 혁명의 도가니였다. 가족들의 다소 강압적인 만류에도 그는 학생운동에 나섰다. 이 이야기를 들을 당시 어린아이였던 필자는 "왜 그랬어요?"라고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민주주의 하자고."

그도 남들이 하듯 똑같이 했고, 남들이 그러하듯 똑같이 잡혀갔으며, 남들과 똑같이 옥살이를 했다. 1989년 서울대 법대 졸업식. 재학 중 군대를 다녀온 동기들과 같은 시기에 그는 졸업했다. 그는 병역 대신 옥살이를 했지만.

사법연수원 도서관 열람실
 사법연수원 도서관 열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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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제나 물렀다. 서울대 출신의 학자 분위기 풍기는 외모,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많은 흰머리, 조용하고 느린 말투. 모두가 가난하고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고시생들이 거기에 있었고, 고시생들은 마치 언제나 그렇게 생겼을 것 같은 이미지를 준다. 그는 명절 때면 홀로 아이를 데리고 여기저기 친척 집을 전전하곤 했다. 차도 없어서 기차에, 고속버스에 시내버스에 지하철에 온갖 교통수단을 다 이용했다. 택시 빼고. 그때는 항상 명절이 길었고, 들러야 할 친척집, 인사드려야 할 친척들이 많았다. 긴 명절은 지치기도 했지만, 그 안에서 재미와 인간미를 느끼기도 하고, 추억들을 아로새기기도 했다.

어느 날, 그가 시골집에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다. 일자리도 없는 그였다. 90년대엔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열심히만 일하면 벌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던 시대였다. IMF가 터지기 이전까지 말이다.

누구도 IMF가 터지리란 예상은 못했고, 그는 고시공부 중이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합격하지 못했다. 이른바 1차 합격자였을 뿐이다. 그런데 뜻밖에 행운이 찾아왔다. 매년 1천명의 합격자를 뽑기로 결정하면서, 합격자 수를 급격하게 늘리기 시작했고, 1995년 300명이던 합격자수가 이듬해엔 500명, 그 다음해엔 600명, 700명, 800명으로 늘어나면서 그도 비로소 40의 나이에 가까스로 사법시험 합격의 영예를 안게 된다.

그는 시골의 산골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로 농부의 아내였을 따름이다. 물론 그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를 팔았으며, 논도 팔고, 밭도 팔았지만, 농부의 자식인 그는 오로지 그 자신의 노력 하나로 성공을 거머쥘 수 있었다.

1962년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장 모습. 모두가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이라서였을까. 곳곳에 메리야스 차림의 수험생들이 눈에 띈다.
▲ 1962년, 제14회 고등고시 사법과가 치러지는 중인 시험장 두번째 사진 1962년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장 모습. 모두가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이라서였을까. 곳곳에 메리야스 차림의 수험생들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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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용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

50명, 300명씩 뽑던 시절의 사법시험은 행정고시, 외무고시 등과 함께 조선시대의 과거급제에 비견되기도 했다. 특히, 50명씩 뽑던 시절에는 합격자 전원이 판사 혹은 검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변호사가 되는 것이 용이 되는 그런 시대는 지났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의 최종결정권자가 되는 것, 대통령을 구속하는 권한, 누군가를 징역에 보내는 일 등 우리 사회의 가장 막강한 권한을 쥔 자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이 바로 변호사자격증인 것이다. 비록 변호사가 용인 시대는 지나갔을지라도, '변호사 자격은 용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인 것은 맞는 것 같다.

모두가 살기 어려웠던 시절, 모두가 먹을 것조차 구하기도 힘들던 시절, 그런 시절에 그는 태어났고, 비록 부패하고 부당한 권력과 싸우다 옥살이를 하는 등 갖은 험난한 고비를 겪었지만, 그 안에서 그는 성장했고 그는 오직 자신의 노력 하나로 성공할 수 있었다. 사법시험으로 1000명씩 뽑던 시절, 사법연수원에는 마흔이 넘는 사람들이 한 반에 한 명 이상씩은 꼭 있었다고 한다. 모두가 어려웠고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그들은 늦은 나이에도 결국 성공했고, 거기엔 웃음도 있고 슬픔도 있었지만, 언제나 이야기꽃이 피었고, 스토리가 있었으며 인간미가 넘쳤고, 사람이 중심에 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엔 그랬고, 그런 "사람냄새 나던 시절이 있었다"라는 다소 아재스러운(?) 말로 이 글을 마치고 싶다.


태그:#사법시험, #사법시험의추억, #사법시험폐지, #사시폐지, #개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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