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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파란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소나무가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소나무가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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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입니다. 밤에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큰아들이 제 방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엄마!"

엄마? 제 엄마는 안방에 들어가서 자고 있습니다. 아내는 밤늦게까지 드라마를 보다가 잠자리에 드는데, 오늘은 피곤한지 일찍 방으로 들어가고, 일찍 잠자리에 들던 제가 소파에 앉아 TV를 봅니다. 큰아들은 엄마를 한 번 더 부르더니 대답이 없으니까 제 방 문을 열고 내다봅니다.

"아… 아빠구나."
"응, 엄마는 자는데……."
"저… 아빠… 면접 인강(인터넷 강의)을 들어야 하는데 수강료가 17만 원이래요."

한티재 고갯마루에서 낙동정맥 종주를 시작합니다. 한티재는 큰 고개라는 뜻입니다.
 한티재 고갯마루에서 낙동정맥 종주를 시작합니다. 한티재는 큰 고개라는 뜻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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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필기시험을 마친 큰아들은 시험 점수가 합격선은 넘었다고 판단했는지 면접 준비를 하려는 모양입니다. 학원에 다니지 않고 인터넷 강의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아들은 면접 역시 인터넷 강의로 준비를 하겠다는 생각이고, 교재 구입비를 포함해 비용이 17만 원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아빠인 저한테 직접 얘기하면 되는데 그런 얘기가 제 엄마한테 전달됐다가 다시 저한테 전해집니다. 결국은 아빠 주머니에서 돈이 나온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은 아빠한테 스스럼없이 얘기할 만큼 친밀도가 큰 부자지간은 아닌가 봅니다.

하나 둘 단풍이 들며 산속에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 둘 단풍이 들며 산속에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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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서먹서먹한 부자지간

여러 해 전 사업을 벌였다가 적지 않은 빚을 남기고 접은 이후 오래도록 경제적으로 팍팍한 생활을 해 왔기에, 학생 신분인 큰아들은 당연히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면서도 조금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큰아들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들과 좀 더 친근하게 지내지 못한 게 안타깝기도 합니다.

가정의 행복은 가족 간에 오고가는 대화의 양에 비례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밥상머리에서 나누는 시시콜콜한 얘기, 차 한 잔을 함께 마시며 주고받는 부부 간의 대화, 부모님께 여쭙는 안부인사… 이 모든 대화의 총량이 행복을 결정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대화가 많은 집은 그만큼 삶의 만족도가 크고 행복지수가 높을 것입니다.

낙동정맥 27개 구간 중 오늘은 22번째 구간을 걸어갑니다. 봉우리 몇 개를 넘고, 또 고개 몇 개를 지나갑니다.
 낙동정맥 27개 구간 중 오늘은 22번째 구간을 걸어갑니다. 봉우리 몇 개를 넘고, 또 고개 몇 개를 지나갑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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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특히 큰아들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눠 보려고 합니다.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얘기도 일부러 더 해 볼 생각입니다. 그렇게 한마디라도 더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조금씩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정은 조금씩 더 도타워지지 않을까요? 틀림없이 그러리라고 믿습니다.

결심 22 / 아이들, 특히 큰아들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누자. 시시콜콜한 얘기라도 더 많이 나누자. 그러면서 행복과 정을 쌓아 가자.

낙동정맥 오솔길이 벌목지대를 지나갑니다.
 낙동정맥 오솔길이 벌목지대를 지나갑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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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27구간 중 오늘은 22구간을 종주하는 날입니다. 한티재라는 고개에서 남쪽 방향으로 산행을 시작해 봉우리 몇 개를 넘고 고개 몇 개를 지나 검마산자연휴양림까지 갑니다. 지난번에는 아랫삼승령에서 시작해 북진하여 검마산자연휴양림까지 왔습니다. 이번에 남진하면서 굳이 검마산자연휴양림을 도착지로 정한 것은 거기에는 땀에 젖은 몸을 씻을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겨울을 빼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산행 뒤에 몸을 씻어야 합니다. 개울이 있으면 더없이 좋고, 없으면 물통에라도 물을 담아가 대충이라도 씻어야 합니다. 땀을 흘린 뒤에 씻지 못하는 상황은… 그 자체가 견디기 힘든 고문입니다.

한티재는 큰 고개라는 뜻입니다. '한'은 '크다'는 뜻을 지닌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한글, 한길, 한가위, 한겨레에서 '한'은 모두 크다는 뜻입니다. '한' 뒤에 따라오는 낱말도 모두 순우리말입니다.
  
가을꽃에 시선을 빼앗기며...

산에는 가을꽃이 한창입니다. 진달래, 제비꽃이 봄을 느끼게 하는 꽃이라면 이즈음 피어나는 구절초와 쑥부쟁이는 가을 냄새를 물씬 풍기는 꽃입니다. 구절초와 쑥부쟁이는 꽃만 봐서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줄기에 붙은 잎을 들여다보면 구절초는 넓적하여 작은 손바닥 같은 느낌이고, 쑥부쟁이 잎은 개울에 사는 송사리처럼 뾰족한 모양새입니다. 구절초는 음력 9월 9일에 꺾어서 잘 말려 한약재로 썼던 데서 이름이 유래했고, 쑥부쟁이는 '쑥부쟁이'라는 처녀에 얽힌 옛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처녀의 애틋한 이야기를 지닌 쑥부쟁이입니다. 진달래가 봄을 전하듯 쑥부쟁이는 가을을 전합니다.
 처녀의 애틋한 이야기를 지닌 쑥부쟁이입니다. 진달래가 봄을 전하듯 쑥부쟁이는 가을을 전합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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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언 옛날 '쑥부쟁이'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처녀는 불쟁이(대장장이)의 딸이었는데, 어린 동생들을 먹이기 위해 봄이면 쑥을 캐러 다닌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처녀를 '쑥부쟁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처녀는 열매를 찾기 위해 산속을 다니다가 멧돼지를 잡기 위해 파 놓은 함정에 빠진 총각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처녀와 총각은 사랑에 빠졌지만,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고 떠난 총각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총각을 기다리던 처녀는 결국 실의에 빠져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졌고, 처녀가 떨어져 죽은 자리에서는 가을이 되면 예쁜 꽃이 피어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처녀를 생각하며 이 꽃을 쑥부쟁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나라 야생화 이야기 / 제갈영 / 이비락 / 308쪽)

담배 수확을 끝낸 밭에 뒤늦게 담배꽃이 피어났습니다. 담배가 몸에 해로운 것에 비하면 담배꽃은 제법 예쁘다는 생각입니다.
 담배 수확을 끝낸 밭에 뒤늦게 담배꽃이 피어났습니다. 담배가 몸에 해로운 것에 비하면 담배꽃은 제법 예쁘다는 생각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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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한 전설 지닌 쑥부쟁이

꽃에 눈길을 주며 오르막내리막을 이어 가다가 추령으로 뚝 떨어집니다. 추령은 한자로는 '楸嶺'입니다. '楸'는 가래나무 추… 옛날에는 이 고개 주위에 가래나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가래나무와 호두나무는 사촌간입니다. 열매도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다만 가래나무 열매는 호두나무 열매보다는 작아서 딱딱한 속껍질 속에 먹을 게 별로 들어 있지 않습니다. 옛사람들은 딱딱한 씨앗 두 개를 손에 넣고 달그락거리면서 재미삼아, 귀신 쫓는 부적 삼아 갖고 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추령이라는 고갯길입니다. 가래나무 추(楸) 자가 들어간 걸로 봐서 옛날 이 고개 주위에 가래나무가 많았을 거라고 추측해 봅니다.
 추령이라는 고갯길입니다. 가래나무 추(楸) 자가 들어간 걸로 봐서 옛날 이 고개 주위에 가래나무가 많았을 거라고 추측해 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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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은 왕릉봉으로 향합니다. 이렇게 외딴 산속에 왕릉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봉우리 생김새가 왕릉처럼 둥그스름하게 생겨서 왕릉봉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숲속은 우거질 대로 우거져서 봉우리에 오르기 전에도, 또 봉우리를 지나온 다음에 되돌아봐도 봉우리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에 들어선 뒤에야 우뚝 솟은 봉우리 모습도, 꿈틀거리며 흘러가는 낙동정맥 모습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리가 떨리고 쥐가 나려고만…

산행 거리가 10㎞를 넘자 다리에 힘이 부치기 시작합니다.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에서는 다리가 후덜덜~ 떨리기까지 하고, 쥐도 자꾸만 나려고 해서 잠시 쉬어 가기도 합니다.

멀리 우뚝 솟은 일월산이 보입니다. 높이가 1,218m...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멀리 우뚝 솟은 일월산이 보입니다. 높이가 1,218m...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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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연습을 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 하지 않으면 친구가 알며
사흘 하지 않으면 청중이 압니다."

폴란드 음악가 루빈스타인이 했다는 유명한 말입니다. 운동을 하루만 건너뛰어도 몸이 알 터인데, 근래 두어 달쯤 산행과 걷기 운동을 게을리 했으니 다른 날에 비해 비교적 수월한 오늘 구간에서도 힘이 들어 고통스러워하는 제 모습은 그간의 당연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숨을 헐떡거리고 눈이 게슴츠레해질 만큼 힘이 든 산행을 하면서도 저는 산행이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산악인 박정헌이 쓴 책 <끈>을 최근 읽고 나서입니다.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한 흔적입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물자가 부족했던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송진을 채취하게 하여 연료로 썼다고 합니다.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한 흔적입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물자가 부족했던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송진을 채취하게 하여 연료로 썼다고 합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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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과 목, 다리, 가슴, 어느 곳 하나 성한 데가 없었다. 입이 돌아갔는지 말을 할 때마다 발음이 자꾸 샜다. 가장 통증이 심한 곳은 피켈에 맞은 왼쪽 어깨와 갈비뼈가 부러진 가슴이었다. 그래도 강식에 비하면 나는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 이제 강식의 (부러진) 두 다리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퉁퉁 부어올랐다."(끈 / 박정헌 / 황금시간 / 123쪽)

박정헌과 후배 최강식은 히말라야 촐라체에 오르고 나서 하산하다가 최강식이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져 생긴 깊은 틈)에 빠진 뒤 기적적으로 빠져나오긴 했으나… 그들은 발목이 부러지고 갈비뼈가 나가고, 설맹(눈밭에 오래 노출되어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증상)에다가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에 장비 없이 비박을 하며 기어서 내려와 생존했습니다. 사람 목숨이 질기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냥 한 편의 드라마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산에 다니면서 힘든 건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의 투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책을 읽고 나서부터 저는 산행하면서 힘들다는 얘기는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도토리가 보입니다. 겨울을 날 산짐승들의 먹이입니다.
 여기저기 도토리가 보입니다. 겨울을 날 산짐승들의 먹이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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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아내와 고생하며 내려온 임도를 걸어 검마산자연휴양림에 도착합니다. 집행부에서 입장료를 지불했으니 샤워 시설을 이용해도 된다 합니다. 산속에서 샤워까지… 이게 무슨 호사인지 모르겠습니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따뜻한 물에 온몸을 맡깁니다. 땀이 씻겨 나간 몸에 다시금 생기가 솟아납니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지금, 바로 여기가 천국인 듯합니다.

♤ 낙동정맥 22구간 종주
날짜 / 2017년 9월 23일 (토)
위치 / 경상북도 영양군
날씨 / 구름 많고 기온은 20~22도, 바람은 불 듯 말듯
산행 거리 / 15.5㎞
소요 시간 / 5시간 20분
산행 코스(남진) / 한티재 → 추령 → 왕릉봉 → 덕재 → 검마산자연휴양림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태그:#낙동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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