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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가을비가 내린 지난 2016년 9월 12일. 오후에 비가 그치며 팔공산 능선에 구름이 이불처럼 모여들며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대구에 가을비가 내린 지난 2016년 9월 12일. 오후에 비가 그치며 팔공산 능선에 구름이 이불처럼 모여들며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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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은 오늘날 행정구역으로는 대구와 칠곡, 군위, 신녕, 하양 등지에 걸쳐 있다. 동시에 팔공산은 신라시대 오악(五岳)의 하나로, 토함산, 지리산, 계룡산, 태백산과 함께 나라에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삼국사기> 잡지 제사조 참고). 이처럼 신라인들은 팔공산을 영험한 산으로 받들었다. 그런 탓일까. 신라인들은 이 산을 '아버지 산'이라는 의미를 가진 '부악(父岳)'이라 불렀다. 그리고 실제 오늘날 팔공산에서는 신라인들의 숨결과 자취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신라 불교신앙의 중심지였던 만큼 신라시대에 조성된 여러 사찰들이 이 산의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다. 파계사, 갓바위, 동화사, 부인사, 송림사, 북지장사 등 팔공산에 자리 잡고 있는 고찰과 불교 유적의 거의 대부분은 신라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져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번 가을, 나는 옷깃을 여미고 팔공산 기행에 나섰다. 비록 팔공산 굽이굽이마다 살아 숨 쉬고 있는 그 수많은 이야기들을 모두 보고 듣고 느낄 수는 없었지만,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 한다.

채 영글지 않은 가을, 파계사를 찾다

아직 가을이 채 우러나지 않았는지 단풍을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저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마시며 가을을 들이키는 듯했다. 길을 올라가면 갈수록 나는 팔공산의 많은 고찰 중 그 계절의 영근 모습에 젖어들기에는 파계사만큼 좋은 곳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직 가을이 완전히 영글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현재 시점에서 가을이 어느 정도 우러났는지는 파계사의 풍경이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파계사로 들어가는 길 양 쪽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비롯해 이름 모를 나무들이 여느 때처럼 서 있었다. 어느 정도 올라가자 250년 묵었다고 하는 높이 15m의 느티나무가 나타났다. 이 나무에는 한 가지 재미있는 전설이 서려있었는데, 조선후기 파계사를 삼창했다는 현응대사가 출타할 때면 항상 이 나무 아래에 커다란 호랑이가 스님을 기다렸다 태워 다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응대사 나무'라 부른다고 했다. 이 나무는 크게 굵은 두 가지가 양쪽 위로 솟아있고 잔가지들이 넓게 퍼져있는 형상이었다.

여기서 좀 더 올라가자 파계사 매표소가 나왔고, 이어 완연한 숲길이 펼쳐졌다. 양 가의 나무들은 서로 키 재기 경쟁을 한 탓인지, 저 하늘 꼭대기에 닿으려는지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솟아있었다. 그리하여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위쪽을 바라보면 하늘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나뭇가지와 잎들만이 보였다. 주변의 고요함은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곁에서 들려오는 계곡 물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했다. 계곡의 소리는 처음엔 오른 편에서 들려오다 일주문을 지나고 나면 왼편에서 들려왔다. '파계사'란 이름은 바로 이 계곡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홉 갈래로 흩어져 있는 물줄기를 모은다는 뜻이라 했다.

우리나라 사찰은 대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흔히 '명산대찰(名山大刹)'이라 일컫는데, 파계사의 경우 '대찰'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역시 그러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어 아홉 계곡의 물줄기를 한 곳으로 모았다고 하는 못이 나타났다. 이 못에 이르자 저 쪽에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파계사의 유래가 담긴 못과 파계사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의 묘한 조화라고나 할까. 그런데 무엇보다 못 주변의 운치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곧장 파계사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한때 성철스님이 수행했다는 성전암 쪽으로 길을 잡았다.

사실 이 길은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파계사 왼 편으로 비껴난 길이 바로 성전암 가는 길이었다. 이 길로 돌아가자 마치 다른 세계가 펼쳐질 법한 신비로운 느낌이 어디선가 묻어왔다. 계속 길을 걸어 올라가자 솔향이 사방에서 진동했다. 그리고 배초향이라는 보랏빛의 야생화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던 도중엔 돌담에선 다람쥐가 튀어나와 어디론가 재빨리 숨었다. 그런데 문제는 가도 가도 성전암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하기야 성철스님께서 수행한 장소가 그리 가깝게 나타날 리가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되돌렸다. 발길을 되돌려 바라 본 먼 산은 군데군데 빨강, 주황, 노란빛을 뿜으며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포근히 안아주는 느낌이었다. 산이 감싸준 탓인지 바로 정면의 밭에선 아늑함이 베어났다. 고요한 가운데 바람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옛 사람들은 흔히 '승지(勝地)'를 말했다 하는데, 이곳이 바로 그런 승지가 아닐까 생각됐다.

대웅전을 두지 않은 파계사

이내 파계사 경내에 이르렀다. 바로 앞 정면의 왼편에 '진동루(鎭洞樓)'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이 누각은 우리 전통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이층 구조로 예전엔 이곳에서 불전 행사가 이루어졌다고 했다. 실제 위층은 전체가 마루로, 때로 무대의 기능을 했던 것 같다. 아래층에는 출입통로와 창고가 있었다. 무엇보다 종횡으로 기둥과 기둥사이를 끼워 맞춘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조립부분을 공포(拱包)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기둥과 기둥을 종횡으로 끼워 맞추고 공포를 조립함으로써 이층구조를 지탱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사찰의 누각 이름에 방비하다는 의미의 '진(鎭)'자가 들어있어 약간 의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에도 나름의 뜻이 숨어있었다. 파계사의 지기(地氣)를 방비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누각 이름 하나에도 자연의 조화를 중시했던 전통정서가 반영되어 있는 셈이었다.

진동루 맞은편엔 '영조(英祖) 나무'라 불리는 250년 된 느티나무가 서있었는데, 이 나무의 이름은 후대에 붙인 것이지만 조선 후기의 임금인 영조와 파계사의 인연을 나름대로 말해주고 있다. 입구의 현응대사 나무와 함께 짝을 이루고 있는 나무인데, 그만한 사연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파계사와 영조의 인연은 숙종 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파계사에 주석하던 현응대사는 왕자의 탄생을 바랬던 숙종의 부탁을 받아 정성껏 백일기도를 올렸고 마침내 이듬해 영조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한편, 진동루 오른 편에는 범종각(梵鐘閣)이 있고 그 내부에는 범종과 법고(法鼓), 목어(木魚)가 걸려있었다. 진동루 왼편의 계단으로 올라가자 원통전(圓通殿)과 설선당(說禪堂), 적묵당(寂黙堂)이 ㄇ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원통전을 중심으로 설선당과 적묵당이 마주보는 구도였다. 사실 파계사에는 여느 사찰과 달리 대웅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두루 통한다는 의미의 원통전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원통전의 의미에 걸맞게 실제 전각의 배치구도 역시 진동루까지 포함하면 ㅁ자 형으로 되어있는 셈이다.

설선당은 본래 강당으로 사용되었는데 색을 입혔음에도 화려해 보이기보다 정갈한 분위기의 건축물이다. 적묵당은 말 그대로 수행의 장소인데, 그 기능답게 외관 역시 소박하면서도 차분하게 보였다. 안내판에 따르면 설선당과 적묵당은 ㄱ자형의 건물이라 하나, 관람객 눈에는 ―자형으로만 보였다. 아마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까지 포함해 'ㄱ'자 형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태그:#팔공산, #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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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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