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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답사'라는 표현보다 '역사기행'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왜냐면 답사는 특정한 역사 유적에 대한 관찰만을 의미하지만, 역사기행은 역사 유적에 이르는 여행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모습을 통해 역사의 일차적 조건이자 터전이었던 우리 땅이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또 현재를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은 삶을 어떻게 영위하고 있는지 등등을 관찰하는 전 과정이 '역사기행'에 해당하는 것이다.

태안으로 가는 길

아파트와 빌딩숲, 자본의 욕망이 넘쳐나는 '거대한 서울'에서 벗어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버스를 타고 45분쯤 지나 화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논과 밭이 듬성듬성 목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구지천'이라는 하천이 나타났다. 이에 나의 시선은 갈수록 차창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얼마간의 정체를 겪은 뒤 평택쯤에 접어들자 논밭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도시의 욕망에 질려버린 도시거주민으로선 귀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어 버스는 평택항에서 당진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다리 아래로는 바다가 펼쳐졌다. 그 직후 행담도 휴게소에 내려서야 나는 버스가 건너온 곳이 서해대교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좀 더 바다를 가깝게 보고 싶은 마음에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서해대교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을 찾아 감상에 빠졌다. 바람을 타고 진한 바다내음이 전해져왔다. 이후 휴게소를 출발한 버스는 내게 서해바다를 좀 더 가깝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차창 밖으로 비치는 서해는 옅은 흙빛을 띠고 있었다. 멀리서볼 때는 파란 빛깔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서해가 '황해(黃海)'로도 불리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산에 접어들었다. 서산의 산세는 비교적 낮은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동글동글했다. 그 산자락 아래에는 거무튀튀한 흙 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은 대부분의 논밭이 쉬고 있었다. 다만 간간이 녹색으로 물든 밭이 보였다. 이제 막 심겨진 파 등의 작물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달려 태안에 접어들자 이번에는 시뻘건 흙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리고 저 멀리 뼈다귀가 많은 산이 자웅을 드러내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알고 보니 그 산이 태안마애삼존불이 있는 백화산이었다. 대개의 바위산이 그러하듯 백화산 역시 신비스런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백제인들은 이 산에 마애불을 조각했던 것이다.

중국 석굴사원 풍의 태안마애삼존불

버스는 기우뚱거리며 백화산을 올라갔다. 태안마애삼존불을 관람하려면 그 아래에 있는 태을사(太乙寺)를 먼저 만나게 된다. 이 절은 최근에 지어진 절이었다. 그리고 절 한 켠 마애삼존불을 만나기 위해 들어가는 길목의 입구에는 산죽이 자라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자 곧 마애삼존불을 품고 있는 전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흔히 태안마애삼존불은 그 특이한 배치구도로 인해 주목받고 있지만, 불교미술에 대해 무지한 나로선 그보다 자연석을 다듬은 것으로 보이는 광배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토록 웅장한 느낌을 주는 광배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광배의 전체 형상은 일단 뫼 산(山)자 혹은 연꽃무늬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입체감이 있었다. 좌우로 봉긋이 솟아있는 광배의 배후에 또 하나의 큰 암석면이 광배 좌우 사이의 허전한 부분을 메우며 홀로 솟구쳐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통돌이 산자형(山字形)의 물결모양으로 다듬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암석면이 각기 광배의 좌우와 가운데를 구성하고 있는 형태여서 볼록함과 오목함이 동시에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점은 광배의 입체감을 살려낼 뿐만 아니라 마애불 전체의 무게감을 자아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 마애불 조성에 소요되었을 공력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애불의 얼굴은 마모가 심하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부처의 발가락까지 묘사되어 있었다. 하단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마애불의 옷깃 역시 섬세한 묘사가 돋보였으며, 가운데의 관세음보살은 관모(冠帽)를 쓰고 있었다. 보살과 여래상의 귀는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측면에서 보니 우측의 약사여래불은 웃는 인상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받아주겠다는 인자한 표정이었다. 정면에서 볼 때는 곧잘 눈에 띄지 않는 점이었다.

한편, 이 마애삼존불을 관찰하며 몇 가지 의문스런 점이 눈에 띄었다. 첫째, 마애삼존불의 몸통과 광배의 면이 붉은 색을 띠고 있는 점이었다. 이것이 자연적인 현상 탓인지 인위적으로 칠을 한 흔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연적인 현상이라면, 이곳의 암석에 철분 성분이 많거나 혹은 다른 이유가 작용했을 터인데, 마애삼존불은 화강암 재질이라고 하니 암석의 성분으로 인한 현상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둘째, 우측 광배 한 켠에 파여 있는 홈의 용도가 의문스러웠다. 이 홈은 직사각형으로 파여져 있었는데 그 용도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 촛불을 켜두던 곳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셋째, 좌측 석가여래의 가슴 옷깃 사이에 새겨져 있는 조각의 정체였다. 얼핏 보면 동자상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형상이었다. 그런데 가까이서보니 그 얼굴로 추정되는 부분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이것이 과연 동자를 조각해둔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안내표지판을 보니 높이394cm, 폭 545cm의 감실모양 암벽에 새겨진 점, 일반적 삼존불과 달리 중앙에 보살상을 조각하고 좌우에 각기 석가여래와 약사여래불을 배치한 점, 그리고 좌우 여래상보다 중앙의 관세음보살이 작아 특이한 구도를 이루고 있는 점이 이곳 마애삼존불의 특징으로 꼽히고 있었다. 또 퉁견의 불의(佛衣)가 두껍고 힘차게 처리되어 있으며 옷자락도 묵직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6세기 중국 석굴사원의 양식을 수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설명을 보고나서야 내가 마애삼존불의 광배를 보며 받았던 인상이 중국의 석굴사원이 주는 느낌과 오버랩 되며 양자 간의 유사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마애불이 모셔져 있는 전각 건너편 암벽에는 태을동천(太乙洞天)이 크게 새겨져 있고, 계해년 등의 간지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마 근대 민족종교의 흔적일 것이다. 실제 이 일대는 19세기와 식민지 시기 후천개벽을 염원하던 이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절간 마당으로 내려와 보니 대웅전 뒤편 바위산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이목을 끌었다. 점심식사 뒤 대웅전 앞뜰 측면으로 걸어 나오자 확 트인 전망을 볼 수 있는 바위가 있었다. 태안, 서산 등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저 멀리 낮은 산이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다 바다에 잠시 막힌 후 다시 흘러가고 있었다. 왼쪽으로는 시가지가 보였다. 과연 저 바다가 태안반도의 해안일까? 이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전경이 마애삼존불과 관련을 맺고 있음이 분명했다.

폐사지에 부는 세찬 바람

다음으로 찾은 곳은 보원사(普願寺) 터였다. 태안에서 보원사터로 가는 길은 땅이 평탄하고 멀리 산이 보이지 않았다. 또 그 도중에 찐빵으로 유명한 안흥을 지났다. 보원사는 의상이 세운 화엄 10찰(刹) 중의 한 곳이다. 이때는 백제병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으니, 이곳에 사찰을 건립한 것도 신라의 백제고지 지배정책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니 보원사지는 4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깊은 산 속에 이와 같이 넓은 터가 있었던 것이다. 그 터는 '옛 터'이자 '빈 터'였다. 바람이 아주 세차게 불고 있었다. 세찬 바람 앞에 폐사지가 주는 아련함과 숙연함은 소실된 채 황량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5층탑과 당간지주, 부도 그리고 넓은 사찰터는 과거 이곳의 영광을 되새김질 해보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법인국사 보승탑(寶乘塔)'이라 불리는 부도가 걸작이었다. 풍만한 느낌을 자아내는 이 부도는 그 조각 솜씨의 섬세함과 꼼꼼함에 탄성을 자아냈다. 곁의 언덕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지붕돌의 안쪽까지 조각이 일일이 이루어져 있었다. 안내표지판에 따르면,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으로서 백제계양식이며 상대석의 난간이 특이하다고 하였다. 조성 연대는 975년이었다. 한편 부도 곁에 있는 탑비는 받침돌의 사자가 인상적이었다. 이빨까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었고, 구슬을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 이곳이 폐사되지 않고 온존되어 있었더라면 과거 이 지역의 응축된 문화적 역량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유적이 되었을 것이다. 저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5층탑과 탑비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태그:#태안마애삼존불, #보원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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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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