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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완도극장 개관(위 사진)과 1981년 완도극장 폐관, 2017년 완도빙그레시네마 개관(아래 사진)까지 오는데 36년이 걸렸다.
 1966년 완도극장 개관(위 사진)과 1981년 완도극장 폐관, 2017년 완도빙그레시네마 개관(아래 사진)까지 오는데 36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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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6일 전라남도 '작은영화관' 4호점인 완도빙그레시네마가 개관하자 유수 언론에서는 완도가 36만년에 영화관이 생겼다고 대서특필했다. 1981년 '완도극장'이 폐관했으니 36년만에 완도에서 영화관이 생긴 것은 맞다. 그런데 '완도극장' 폐관의 역사가 완도 영화 또는 영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일까?

2007년 위경혜 영화사 연구가(당시 전남대 호남학연구단 소속)가 쓴 '호남의 극장문화사(영화 수용의 지역성)'에 따르면 완도극장은 1965년에 상영관 허가를 받아 1966년 8월 15일 개관했다. 평소 '문화사업을 하고 싶어 하던' 최동렬씨(전 완도여성단체연합회장 서수복 씨 시아버지)가 건립하였는데, 그는 완도극장 개관에 앞서 당시 공회당을 임대하여 3년간 영화를 상영했다. 2007년 현재 완도군의회가 당시의 공회당 자리인데, 최씨는 양화는 물론 방화와 대한뉴스를 상영했다.

 해방 후 최초의 영상 상영 공간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완도군해태어업조합 건물 모습.
 해방 후 최초의 영상 상영 공간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완도군해태어업조합 건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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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호남의 극장문화사' 기록엔 나와 있지 않지만 해방 후 완도의 영상기록은 공회당 영화 상영 전으로까지 올라간다. 정영래 완도문화원장은 "공회당에서 상영 전에 완도군해태어업조합 건물에서 3~4년간 상영한 후 공회당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또 공회당에서 상영도 1950년쯤으로 확인된다. 서옥현(82) 전 경우회 회장은 "내가 중학교 때부터 공회당에서 상영을 했으니까 1950년쯤부터 시작된 것 같다"고 짐작했다. 공회당에서 상영도 1966년 무렵까지 시기가 확인되고 있다. 이승창 전 완도어촌민속전시관 관장은 "1965년 공회당에서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가 나온 영화를 봤다. 박치기로 끝마무리가 되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1966년 최동렬씨가 완도극장을 신축개관했다. 최씨의 며느리 서수복씨에 따르면 완도극장은 밖에서 보면 단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2층 구조였고, 200평 정도의 규모에 498석을 갖추고 있었다. 서씨는 "500석이 넘으면 세금을 더 내야 하는 등 제약사항이 많았다"며 좌석이 500석을 넘길 수 없었다고 전했다.

 완도극장의 신축개관 기념 상영작은 신성일·남정임 주연의‘학사와 기생’이었다.
 완도극장의 신축개관 기념 상영작은 신성일·남정임 주연의‘학사와 기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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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와 기생'의 줄거리는'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홧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병상에 누운 어머니와 진학을 앞두고 있는 남동생을 위하여 여대생인 그녀가 기생이 되어 직업전선에 뛰어든다. 젊고 예쁜 그녀는 이후 애인이 생활기반을 잡게 되자 그녀는 그와 결혼하고 새생활을 설계한다'는 내용이다.

계속된 서씨의 말에 따르면 1960~70년대 완도극장은 군내 최고의 문화공간으로 다양한 연령층이 부담없이 만나서 여흥을 즐겼다고 한다. 완도 읍내에서 젊은이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딱히 없던 차에 등장한 완도극장은 청춘남녀는 물로 장년층과 노년층에게도 만남의 광장으로 이용된 것.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 자동차를 이용하거나 도보로 오기 어려운 다른 면민들은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와서 영화를 관람했다고.

 1960~70년대 완도극장은 군내 최고의 문화공간으로 다양한 연령층이 부담없이 만나서 여흥을 즐겼다고 한다.
 1960~70년대 완도극장은 군내 최고의 문화공간으로 다양한 연령층이 부담없이 만나서 여흥을 즐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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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극장의 흥행대박은 신영균·문희 주연의 1970년 개봉한 '미워도 다시 한번'이었다. 영화의 극중 아들과 엄마의 애절한 이별장면이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 들어 극장은 입석까지 관객으로 가득 찼었다고 서씨는 아직도 당시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완도극장의 영화상영은 주로 야간에 이루어졌다. 학생들의 단체관람은 수업이 끝나는 오후시경에, 일반민 대상의 영화는 저녁 7시나 7시반에 상영을 시작했다. 완도극장은 당시 공짜영화를 관람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영화상영 후 일정시간이 지나면 출입문을  개방했다.

또한 완도극장은 서울에서 다녀가지 않은 배우가 없을 정도로 영화배우와 가수들의 쇼 단체 공연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지난 가던 개도 500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수산물 수출로 호황을 이뤘던 완도는 흥행을 원하는 쇼 단체가 선호하는 지역 중의 하나였다.

쇼 단체를 따라 완도극장을 방문한 연예인들은 이예춘, 신성일, 신영균 등이었으며 매년 가수 남진이 다녀갔다. 완도극장을 가장 많이 찾았던 사람은 배우 박노식과 가수 하춘화였다. 이들의 공연은 매번 극장 만원 사례를 기록했는데, 한마디로 "오면 돈벌어 갔던" 연예인들이었다.

1966년 신축 개관 이래 대략 15년의 세월동안 운영이 좋았던 완도극장은 TV가 보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관람객 감소와 고가의 필름 대여료, 그리고 직원 월급 등 극장 운영의 문제가 예전과 달리 만만치 않았다고 '호남의 극장문화사(영화 수용의 지역성)'에는 기록돼 있다.

이책에는 운영이 어려워진 완도극장이 결국 1981년 폐관하고, 건물을 임대해 주다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완도극장을 넘기게 됐다고 완도극장의 마지막을 담고 있다. 완도극장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청해진사우나' 목욕탕 건물이 들어서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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