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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살인 사건은 면식범에 의해 저질러집니다. 평소의 인간관계에서 생긴 원한이나 갈등이 살인의 동기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살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저질러진 비극이지만, 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도 일정 부분 반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어떤 식으로든 그가 속한 사회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니까요.

<검은 강>은 대만에서 실제 있었던 '카페 살인 사건'을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이 사건은 강변 옆에 자리 잡은 카페의 점장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단골손님 부부를 살해하고 강에 버렸다가 발각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수사 결과 가해자인 젊은 여성은 노년의 피해자 남편과 육체 관계가 있었으며 부부의 재산을 노리고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건 당시 언론에서 '뱀과 전갈처럼 남에게 해를 가하는 여자'라는 의미의 '사갈녀(蛇蝎女)'라는 딱지를 붙였고, 인터넷 게시판 등에는 가해자에 대한 무차별적 비난의 목소리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 책을 쓴 대만 소설가 핑루는 가해자 여성과 피해자 여성의 관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합니다. 가해자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 피해자 남성과 관계를 맺게 된 사연, 평소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피해자 여성의 이야기를 번갈아 가며 제시합니다. 여기에 사건 관련자 및 일반인들의 인터뷰를 사이사이 삽입하여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합니다.

작가는 이미 쑨원의 아내 쑹칭링이나 대만 국민 가수 덩리쥔 같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여성 인물들의 삶을 바탕으로 한 소설로 명성이 높은 인물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내면 풍경을 통해 대만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지방에서 올라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이인 가해자의 모습,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혼기를 놓쳐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와 결혼해야 했던 중년 여성 피해자의 모습을 통해서요.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두 여성을 이용했던 이기적인 남성 피해자의 민낯입니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서 돈을 취했고, 그 돈으로 젊은 여성을 유혹해 그 육체를 탐했습니다. 어쩌면 이 살인 사건의 진짜 원인은 그의 끝 모를 탐욕, 그리고 언제나 남성이 칼자루를 쥐게 돼 있는 사회 분위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대만 사회는 한때 독재를 겪었지만, 그 이후 민주화 운동을 통해 성공적으로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유교의 영향력이 큰 남성 위주의 사회라는 것도 유사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이 다루는 사건과 인물들의 내면 풍경은 그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 놓아도 별 위화감이 없습니다.

<검은 강>의 표지
 <검은 강>의 표지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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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대리 체험해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자기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완전히 터놓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이들은 서로 통하는 데가 많아 오랜 친분을 다진 경우입니다. 이래서는 새로운 경험을 하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검은 강> 같은 소설을 통해서는 평생 마주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의 속 얘기를 듣고 그가 겪은 일들을 곱씹을 수 있습니다. '그저 그런 치정 사건이네' 하고 지나쳤을 사건 속 가해자와 피해자의 삶과 심리적 정황을 돌아보는 과정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알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더듬어 이만한 작품으로 내놓은 작가의 노력에 감사를 전합니다.

덧붙이는 글 |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현대문학 펴냄 (2017. 8. 18.)



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현대문학(2017)


태그:#검은 강, #핑루, #허유영,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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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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