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회

포토뉴스

어느 해, 광화문 역사 안에서 해치마당으로 올라가는 어느 이의 모습. ⓒ 최인기
광화문 지하역사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농성 1842일째를 기록하던 지난 5일 밤, 우리는 농성 중단을 선언했다.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살자고 외쳤던 구호는 매순간 지하통로를 울렸고, 밖으로 번져 사람들을 울렸다. 그렇게 모두가 함께했던 광화문 농성은 자진 철거로 마무리됐다.

2012년 8월 21일 무더운 여름, 비가 많이 왔던 날. 텔레비전에서 사람들이 104년 만의 가뭄이라고 연일 떠들었던 그 때, 이곳엔 셀 수 없이 많은 가난한 이들이 있었다.

아이의 아비가 망치로 자신의 자녀를 때려서 죽이는 세상. 늙은 아내와 남편이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창을 넘고, 전동휠체어를 탄 이가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고, 외로운 할미가 제 입에 못 먹을 것을 털어 넣어야 할 만큼 단단한 죽음이 이어지던 사회. 그런 터전에서 우리는 농성을 시작했다. 답답한 여름에 저항이라도 하듯, 광화문 지하역사 2층에 농성장을 꾸렸다.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농성장은 쉬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12시간의 사투를 벌였다. 그해 당선할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곳에, 우리가 더 많은 시민들을 만날 수 있는 곳에 힘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 농성이 지금 끝날 줄 몰랐으나, 시작은 그랬다.

국가는 약속을 저버렸고, 희생자는 늘었다

2012년 8월 21일, 광화문 역사 안 광화문 농성장을 차리기 위한 12시간의 싸움. ⓒ 점좀빼
2012년 12월, 광화문광장에서 화마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장애등급제 희생자 김주영을 추모하기위해 모여있다. ⓒ 박나윤
그해 겨울, 장애 당사자이자 장애인권을 위해 활동해온 김주영씨가 화마에 휩쓸려 세상을 떠났다. 활동보조인이 떠나고 혼자 집에 있을 때 사건이 터졌다. 활동보조서비스는 장애등급에 따라 한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화재가 발생했지만 거동이 불편했던 김씨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는 질식사로 사망했다.

얼마 안 돼 파주의 어린남매 지우·지훈도 화재 사고로 인해 세상을 떠났고, 광화문 농성장에 영정사진으로 남았다. 광화문 농성장은 이런 복지 제도 희생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우리의 외침을 뚜렷이 새기는 공간이었다.

2013년 봄이 오기전 겨울, 화마로 휩쓸려간 어린 아이들. 지운 지훈의 추모제 ⓒ 박나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 농성장은 박근혜 정권과 모든 순간을 함께한, 어찌 보면 비운의 농성장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제도의 개선과 폐지를 말하며 출범했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우리는 죽은 약속과 함께 5년 동안 거리에 있었다.

2014년 송국현씨의 장례 모습이다. ⓒ 박나윤
농성 1주년을 맞았을 땐 장애인권리보장법제정연대가 출범했다. 이를 시작으로 장애등급제폐지에 대한 대안을 계속 만들어왔다. 가난한 이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며 부양의무제 폐지를 외쳤다.

하지만 농성과 함께 죽음도 이어졌다. 송파 세 모녀와 장애등급제 희생자 송국현의 죽음. 정부는 그들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제도를 잘 활용하면 됐다고 변명했지만, 이들은 분명 제도의 희생자였다. 그래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 농성장은 5년, 1842일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순간도, 단 하루도 쉰 적 없다.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단위 그리고 연대단체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2014년 4월 14일 송국현씨가 화재로 중환자실로 입원하였다. 화재사고 방조한 국민연금공단 규탄 긴금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박나윤
2014년 4월 14일 송국현씨가 화재로 중환자실로 입원하였다. 화재사고 방조한 국민연금공단 규탄 긴금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박나윤
일일이 슬로건을 하나씩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기자회견이 열렸다. 농성 초기에는 우리를 지지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30일간의 릴레이 캠페인을 진행했다. '박근혜정권 뻥이야!' 퍼포먼스도 있었다.

차디찬 겨울을 깨고 봄을 부르는 각얼음 깨기,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오복(복주머니)터 트리기 행사, 대시민 선전전인 분홍종이배 접기, 박근혜정권 퇴진역 현판식, 길바닥 낙서 등의 퍼포먼스, 95일간의 출퇴근길 기습도로 점거 그린라이트 선전전, 30여 명이 함께 했던 9박 10일간의 전국순회 투쟁단 차차차, 정당인 듯 정당 아닌 폐지당이라는 창당대회까지. 정말 안 해본 것 없는 농성이었다.

농성은 끝나지만, 싸움은 계속 된다

꽁꽁 얼어붙어있는 이 시대의 절망을 깨자, 장애인차별 철폐하라! ⓒ 최인기
박근혜 당신의 장애인 공약은 '뻥'입니까? 박근혜 복지 '뻥'이요? ⓒ 박나윤
2014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고속터미널에서 진행했던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경찰이 최루액을 쏘고 있다. ⓒ 박나윤
2014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고속터미널에서 진행했던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경찰이 최루액을 쏘고 있다. ⓒ 최인기
광화문 지하역사 농성장은 매 순간 우리가 싸운 기억이 되었고, 일상으로 남았다. 사람들의 손때가 켜켜이 묻은 선전물이 증명하듯, 우리는 참 오랜 시간 거리에서 외쳤다.

이 5년의 세월 동안 박근혜 정부는 '함께 살자'는 우리의 외침에 어떠한 응답도 해준 적 없었다. 우리는 그 시간을 버텼고, 또 싸웠다. 그렇기에 광화문 농성장은 힘을 가졌다. 그 힘 덕에, 이번 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광화문 농성장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송국현 동지를 떠나보내고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집과 서울대병원 앞에서 두 달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도 받지 못했던 사과를 받았고, 95일간의 전국 도심 방방곡곡에서 진행한 기습선전전으로도 하지 못했던 면담이 성사됐다. 우리가 5년간 싸워던 광화문 지하역사 농성장, 18명의 영정사진 앞이었다.

2014년, 광화문광장에 9개의 영정사진이 놓여있다. ⓒ 최인기
2014년, 광화문 광장에 9개의 영정사진이 놓여있다. ⓒ 점좀빼
물론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의 완전한 폐지가 성사된 건 아니니, 모두에게 저마다의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투쟁의 성과가 아쉬운 것은 아니다. 광화문 농성장에서 우리가 만났던 인연들과 울고 웃었던 기억들이 이 공간에 서려 있다. 비록 '최고' 시점에 이르진 못했지만, '최선'의 시기에 농성을 마무리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로 중단한 것도 아니었고 물리적 탄압을 받아서 강제적으로 닫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 시작을 우리가 정했듯 지금의 끝도 우리가 선택했다. 그 사이의 모든 날을 우리가 직접 채웠다. 여기서 받았던 힘과 기억들을 잊지 않는다면, 우린 앞으로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큰 한 챕터가 잘 마무리될 수 있길 바란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8월 25일 오전 서울 광화문역 장애인단체 농성장을 찾아 묵념하고 있다. 서울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5년간 농성했던 장애인들은 9월 5일 농성을 해제했다. ⓒ 연합뉴스
이번 정부에서 장애등급제폐지·부양의무제폐지·장애인수용시설 폐지가 실현될 수 있길 바란다. 그 일이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 정말 '함께' 살기 위한 일임을 모두가 동의할 수 있길 바란다. 이런 바람을 위해,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공동행동은 1842일간의 힘을 받아 여전히, 거리에서 외칠 것이다.

2012년 첫 명절. 홈리스 행동과 노들야학이 광화문 농성장에서 만나 즐거운 추석을 보내고 있다. ⓒ 점좀빼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한명희씨는 노들장애인야학 사무국장입니다.

태그:#장애인투쟁,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광화문농성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