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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이라는 조직은 사회에서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은 말해준다.

아직 20대 초반의 새파랗게 젊은 군인들 사이에서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있어 동료들 사이에서 노망난 늙다리 취급받는 엘리엇은 그런 사실을 증명하는 사람이다. 그는 왕립수의사협회 회원이며 조종사 훈련을 받은 엘리트다. 그런데도 군율이 엄격한 대한민국 군대를 경험한 예비역의 눈에는 흠씬 두들겨 패야 정신 차릴 것 같은 소위 '고문관'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밉지가 않다.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3>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주)아시아 출판
▲ 책 표지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3>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주)아시아 출판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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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제임스 엘리엇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 공군으로 복무한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요크셔 푸른 초원의 순박한 사람들과 더불어 산 수의사다. 헤리엇은 50세 때부터 <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가 쓴 책들은 지금까지 26개국 언어로 번역돼 50여 년간 1억 부 이상 팔렸다. '현대의 고전'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 시리즈는 저자 특유의 유머와 여유 있는 위트, 삶에 대한 정감어린 시선과 통찰을 보여준다. 특별히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은 세 번째 시리즈로 순박한 농부들을 벗어나 '군'이라는 조직에 몸을 담던 시절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이 책은 마침 박찬진 대장 부인의 갑질 논란으로 군 특유의 폐쇄성과 폭력성이라는 문제가 불거진 요즘 같은 시기에 다른 나라 군대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한편으로는 우리와 너무나 똑같은 모습에 낄낄거리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모습에 이럴 수도 있구나 하면서 부러워할지 모른다.

군이라는 조직은 얼굴조차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높은 지위의 군인들이 생각해내는 엉뚱하고 허황된 생각에 좌우되는 하급 병사들의 고단한 일상으로 채워진다. 졸병들이 보기에 별들이 내리는 결정은 대부분 어리석고 무분별해 보인다. 우리는 그것을 '삽질'이라 하는데, 영국군도 별 수 없는지 병사들을 굴리기 위해 '삽질'한다.

"나는 삽자루에 기댄 채, 눈으로 땀을 훔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백 명의 사내들이 먼지투성이 풀밭에 흩어져서 땅을 파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강화훈련' 과정을 밟고 있었다. 적어도 교관들은 우리한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들이 훈련을 받고 있는 그 많은 항공병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이런 방법을 궁리해낸 게 아닐까 하고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이것은 성가신 훈련병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 234쪽

이렇듯 군이라는 조직은 나라를 불문하고 불합리한 공통점이 있음을 헤리엇은 말해준다. 준만큼 본전을 뽑고, 병력을 통제하기 위해 쓸데없는 일을 시키는 점은 닮아도 너무 닮았다. 신기하게도 그 쓸데없는 삽질의 결과, 군인은 건강해진다. 의무 복역을 마친 예비역의 입장에서 보건대 군이 안겨준 유익이 있다면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이 가져다 준 강철 같은 체력이다. 영국군도 그 점에 있어서 똑같았다.

"지금까지도 나는 내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준 영국 공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공군에 소집되었을 당시, 헬렌의 애정 어린 보살핌 때문에 내 몸이 조금 약해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고, 소파의 매력을 새로 발견했다. 그래서 점점 살이 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 공군은 그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고, 그 후 다시는 체력이 쇠퇴하지 않은 것 같다." - 239쪽 

'신사의 나라'로 불리는 영국의 군대도 졸병생활은 고달프고 서럽긴 마찬가지다. 그들의 지위를 반영하는 호칭은 "이봐 너!"(98쪽)이고, 어느 누구도 떠받들어주지 않는다. 졸병들은 친절하고 정중한 태도 대신 무뚝뚝한 태도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나마 영국 군대는 구타는 물론 하사관이 부하들에게 욕하는 것조차 금지돼 있다. 그 점은 우리와 너무나 달라 부러움을 안겨준다.

"'너는 구제불능이야!' 그는 돌아서서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어가 버렸다. 그 순간에는 중사도 졸병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게 분명하다." - 128쪽

제국주의 군대였다면 조용히 끌려가 총살이라도 당했을 '고문관', 졸병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간부들의 모습은 오히려 처량해 보일 정도다. 그러나 자신의 적성이나 능력과 아무런 상관없이 나라의 부름을 받고 복무하는 군인에게 신체적으로나 언어적 공격을 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도 '민주 군대'를 외치는 요즘, 2차 대전 당시의 영국군이 부러운 이유는 뭘까? 아직도 대한민국 군대에 일본 제국주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명, '군기'라는 이름으로 구타와 얼차려가 지금도 암암리에 행해지고, 언어와 정서적 폭력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문화 말이다.

재수 없게 '엿 같은' 고문관 졸병을 만났을 때, 투덜투덜 불평하는 게 고작인 군대라면 생떼 같은 자식을 군에 보내놓고 잠 못 이루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은 대한민국 군대도 그럴 수 있기를 소망하게 한다.

저자는 군 생활과 인심 좋은 농부들의 이야기를 오가며 '생명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있는 법'(198쪽)임을 알려준다. 그 가운데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과장하려거나 미화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뭔가를 훈계하려 들지도 않는다. 어찌 들으면 구시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좀 얼뜨고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이 투덜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대목들이 배꼽을 잡게 한다. 지나치게 심각하는 법이 없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장난으로 대하는 것 같지만 진솔하게 다가가는 태도는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삶의 자세였다.

<헤리엇 시리즈>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도서출판 아시아(2017)


태그:#제임스 헤리엇, #수의사, #김석희, #영국군, #고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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