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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경상북도구미도서관에서 진행한 '우리 지역 역사 인물을 찾아서' 행사에 다녀왔다. 이번 탐방을 통해서 왕산 허위 선생의 발자취를 살펴보았다.

왕산 허위 동상
 왕산 허위 동상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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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는 호가 왕산(旺山)이다. 왕산 허위는 조선 말기인 1855년 태어나서, 일본이 대한제국 내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을 간섭하던 시절인 1908년에 순국했다.

왕산 허위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정치범으로 사형이 집행된 최초의 사형수였다. 현재의 구미시 임은동에서 출생한 왕산 허위는 유학자였으며, 큰 형인 방산 허훈과 숙부로부터 유학을 공부했다.

김산향교
 김산향교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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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의하고자, 왕산 허위는 지방 유학생들을 규합해서 의병전쟁을 벌인다. 당시 왕산 허위는 김천에 있는 김산향교에서 의거한다. 1899년 고종은 허위를 성균관박사로 발탁한다. 평리원과 의정부, 승정원에서 근무하던 왕산 허위는 시종일관 일본에 강경한 입장을 취한다. 1904년 일본이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하자, 허위는 공직에서 사직한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의거한다. 왕산 허위는 정미의병 당시에 13도창의군 군사장을 맡은 이후, 13도창의군 의병총대장을 역임한다. 왕산 허위는 13도창의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에 체포된다. 왕산 허위는 190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한다. 당시 13도창의군의 서울진입작전 길을 따라서, 청량리역에서 동대문역까지의 길을 '왕산로'라고 이름 붙였다.

왕산 기념관
 왕산 기념관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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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 허위가 순국한 후에도, 왕산 허위의 형제들과 자손들은 간도와 연해주로 망명을 한 후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특히 왕산 허위의 종질인 허형식 장군은 독립전쟁 과정에서 혁혁한 공헌을 세운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 왕산 허위의 직계 자손들은 우리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현재도 국외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는 왕산 허위의 생가 터에 기념공원을 조성했으며, 왕산 허위의 묘와 유허비가 있다. 그리고 2009년에는 왕산 허위를 기리는 기념관이 설립되어 있다. 유학자 출신의 의병 활동가인 왕산 허위의 삶을 통해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과정과 이에 항거한 의로운 선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태그:#왕산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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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힘이 되는 생활 헌법(좋은땅 출판사) 저자, 헌법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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