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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3. 소련 모스크바. 소련 제5차 최고회의장을 둘러보는 김일성(오른쪽)과 박헌영(왼쪽 안경 쓴 이). ⓒ NARA
소련군의 철수

1948년 8월 15일 한반도 38도선 이남에는 대한민국이, 그리고 9월 9일 이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해방 후 3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양식 있는 백성들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끝내 하나의 통일정부를 세우지 못했다.  

38 이북에 친소정권이 들어서자 소련은 느긋하게 북한에서 철수하면서 38 이남의 주한 미군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소련은 그해(1948년) 연말까지 미국보다 먼저 철수하면서 그들 장비 상당수를 북한에게 넘겨주고 떠났다.

이처럼 당시 소련은 미국에 견주어 한반도에 친소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는데 한결 자신감 보였던 것은 그 무렵 조선 백성들의 민의를 정확히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6. 8. 13. 동아일보 제2면 보도다.

군정청 여론조사국에서는 조선인민이 어떤 종류의 정부를 요망하는가를 규찰하기 위하여 30항목의 설문을 열거하고, 여론을 조사하였는데 설문에 반영된 민의는 다음과 같다.

……
[문 2] 귀하께서 찬성하시는 일반적 정치형태는 어느 것입니까?
(가) 개인독재(민의와는 무관계) 219인(3%)
(나) 수인독재(민의와는 무관계) 323인(4%)
(다) 계급독재(타 계급의 의지와는 무관계) 237인(3%)
(라) 대중정치(대의정치) 7,221인(85%)
(마) 모릅니다 453인(5%)

[문 3]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가) 자본주의 1,189인(14%)
(나) 사회주의 6,037인(70%)
(다) 공산주의 574인(7%)
(라) 모릅니다 653인(8%)
……

곧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피압박 식민지 백성들은 자본주의 국가보다 사회주의 국가 체제를 더 선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현상은 식민지 기간 민족해방 투쟁의식이 고양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알고 있는 소련은 장차 조선에 친소 사회주의국가 수립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런 점은 미국도 이미 읽고서 그 무렵 한반도에 친미 국가 수립에 전전긍긍했으며, 이미 세운 이승만 정부에 대해서 상당히 불안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으로 헤아려진다.

1946년 대구에서 10.1 항쟁, 1948년 제주에서 4.3 항쟁, 1948년 여수 순천에서 국군반란사건, 그 반란군들이 지리산으로 잠입하여 항쟁하는 등의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는 등 연일 정국이 불안했다. 미국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승만 정부를 믿고 한국을 떠나기에는 불안했지만 명분에 떠밀려 1949년 6월 일부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했다. 그러자 마침내 한반도에 힘의 공백이 생겨났다.
1948. 5. 10. 새 정부 수립 총선거를 방해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 주민들. ⓒ NARA
1946. 날짜 미상. 평양. 평양시민들의 김일성과 스탈린 원수에 대한 환영 지지대회 후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북한은 그때까지 태극기를 썼다). ⓒ NARA
김일성의 소련 방문

그 무렵 김일성은 소련의 군사 원조로 해방전쟁(남침)에 더욱 자신감을 얻었고, 1949년 3월에 박헌영, 홍명희 등을 대동하고 소련으로 갔다. 그들은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 스탈린을 정중히 알현한 뒤 무력으로 남조선을 접수할 뜻을 넌지시 내비쳤다.

노회한 스탈린은 그런 김일성의 그런 발상이 '불감청고소원'으로, 아주 귀여웠을 테지만, 역전의 노장답게 다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김일성의 남침 의도를 만류했다.

그 첫째는 북한 인민군이 남한 국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월치 못하다는 점이요, 그 둘째는 그때까지 남한에 미군이 남아 있단 점이요, 그 셋째는 38선에 관한 미소협정이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 측이 그 협정을 파기하면 미국이 개입할 빌미를 주게 된다.
-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160쪽
1947. 5. 7. 전북 군산. 시민들이 브라스 밴드를 동원하여 주한 미 주둔군사령관 하지중장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 NARA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묵묵히 좀 더 때를 기다리라고 충고했다. 사실 그 무렵 스탈린은 미국의 원자탄 위력에 잔뜩 주눅 들어있었다. 이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복심을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일성은 소련에서 돌아온 뒤에도 계속 군사원조를 받으며 군비를 착실히 증강해 나갔다.

게다가 중국의 국공내전이 끝나자, 마오(毛) 주석으로부터 그 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의용군까지 배속받을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후일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5사단장 김창덕, 6사단장 방호산, 12사단장 전우(일명, 都古夫), 18연대장 장교덕 등 국공내전으로 전투 경험이 풍부한 6만여 명의 인적 자원이었다. 당시 그들의 전투력과 사기는 일제 만주군 패잔병들과는 게임이 안 될 정도였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물적, 인적 지원을 듬뿍 받자 자신감이 더욱 넘쳤다. - 이 부분(조선의용군)은 김중생 지음 <조선의용군의 밀입국과 6.25전쟁> 참고했음.
1999.8. 중국 지린성. 필자의 항일유적답사길에 안내를 맡았던 김중생(오른쪽) 선생이 지도를 펴들고 중국 현지인들에게 유적지를 묻고 있다. 김중생 선생은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의 손자로, 한국전쟁 때 조선의용군으로 참전했다. ⓒ 박도
하지만 김일성은 스탈린의 충고에 따라 제반 여건이 성숙할 그날을 학수고대했다. 그런 가운데 1949년 6월 29일, 김일성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했다.

1949년 8월, 소련은 마침내 핵 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무너뜨렸다. 게다가 공산 측으로서는 또 하나의 귀가 쫑긋한 낭보가 들려왔다. 그것은 미 국무장관의 '애치슨라인' 발언이었다.
1947. 날짜 미상. 북한 평양거리. ⓒ NARA
'애치슨라인'

1950년 1월,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한국은 미국이 반드시 방어해야 할 방어선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른바, '애치슨라인'을 선언했다. 이는 미국이 소련, 중국 등 공산 측에 던진 회심의 미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어찌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그 악독한 일본과 숱한 희생을 치르고 얻은 한반도 남쪽을 그렇게 쉽사리 멍청이처럼 포기하겠는가.

더욱이 한반도는 미국이 장차 대륙으로 진출할 중요한 교두보가 아닌가? 이미 1949년 6월, 미국은 내외 여론에 떠밀려 한반도 남쪽에서 철군했다. 미국이 볼 때 이승만 정권과 김일성 정권의 군사대결은 게임도 되지 않아 보였다. 우선 두 사람만 견주어 봐도 한쪽은 고령으로 입으로만 독립운동을 했다면서 살아온 사람이요, 또 다른 한쪽은 새파란 항일 빨치산 출신이 아닌가. 그래서 미국은 한반도를 계속 자기네 판도에 넣기 위해서는 재상륙을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런 까닭으로 미국은 국무장관을 통해 '애치슨라인'이라는 미끼를 태평양 바다에 과감히 던졌다. 미국은 소련과 중국 등 공산 측이 그 미끼를 덥석 물면, 이를 빌미로 한반도 재상륙이라는 큰 고기를 낚으려는 고도의 노림수였을 것이다. 이는 미국이 한반도에 재상륙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젊은 김일성은 경륜이 부족한 탓으로 미국의 이 '애치슨라인' 발표를 문맥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그제야 말로 조국 '해방전쟁'의 절체절명 호기를 맞았다고 판단하고, 1950년 3월 다시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날짜 미상. 인민군 기계화 부대로 NARA에 소장된 북한 측 자료상자에서 발굴했다. “포복 전진으로써 용감하게 적진지에 접근하는 중기관 총수들”이라는 사진 설명이 붙어있었음. ⓒ NARA
스탈린은 1차 방문 때와는 김일성을 달리 아주 여유만만하게 대했다. 그때 소련은 원자탄 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흐뭇한 회심의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것은 역시 내가 너를 잘 간택했다는 자만의 미소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노회한 스탈린은 그래도 돌다리를 두드리는 격으로 김일성에게 안전장치를 마련케 했다. 스탈린은 행여 미국의 개입을 우려한 나머지, 만일을 대비하여 김일성에게 중국 마오쩌둥의 원조 승낙을 받으면 남침을 승인하겠다고 말했다.

소련에서 돌아온 김일성은 곧장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우쩌둥에게 스탈린의 복심을 전달했다. 이에 마우쩌둥은 스탈린 복심에 대한 직접 확인을 요청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지체 없이 베이징으로 발송했다. 마우쩌둥은 스탈린의 문서를 확인한 뒤 김일성에게 만일 위기가 오면(미군이 한국전에 개입하면) 즉각 도와주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산 진영에서는 미국의 '애치슨라인' 발표를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고도 술책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게 웬 떡이냐'고 덥석 미끼를 물었다. 그들은 미국의 깊은 속내를 그때까지 읽지 못했다.
날짜 미상. 미 군정기 좌익사범을 처형한 뒤 상부에 보고하고자 그들의 목을 잘라 방부 처리한 다음 상자에 담고 있는 장면(2007. 3. 버지니아 주 노퍽시 맥아더기념관 소장 앨범에서 기자가 직접 촬영하다). ⓒ 맥아더기념관 / 박도
한국전쟁 발발

남한의 수뇌부는 그런 국제 정세의 실체도, 흐름도 제대로 파악치 못했다. 그러면서도 군사력도, 병사들의 사기도 북한에 훨씬 뒤지면서도, 계속 북한의 군사력을 아주 형편없이 깔보았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신성모 국방장관 등 고위층은 계속하여 북진통일론 망언을 외쳐대는 블랙 코미디를 연출했다. 아마도 그게 친일 세력을 등에 업고 출발한 자기네의 정권을 유지하는 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승만 대통령)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하루 안에 평양이나 원산을 점령할 수 있다." (신성모 국방장관)

남쪽의 우매한 백성들은 지도자들의 이런 흰소리에 반신반의하면서도 각자 생업에 바쁘게 지냈다. 그런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일대에서 울리는 크나큰 포성에 놀라 잠에서 깼다. 북한 인민군들은 T-34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채 해일처럼 남쪽으로 진격해 왔다.

마침내 한반도 화약고가 터진 것으로, 국제 무기업자들의 재고를 쏟아부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탓인지 이 전쟁은 매우 지루하고 지저분하게 펼쳐졌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 꼴로, 애꿎은 한반도 백성들만 강대국 땅따먹기 싸움과 제2차 세계대전 무기 재고품 정리에 희생양이 되었다.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1949. 7. 서울. 미 군사 고문단이 국방경비대에서 병기교육을 하고 있다. ⓒ NARA
1949. 9. 서울. 국방경비대에서 60밀리 박격포 교육을 하고 있다. ⓒ NARA
1949. 9. 6. 서울. 미 군사고문관이 국방경비대에서 기관총 교육을 하고 있다. ⓒ NARA
1950. 2. 18. 일본 도쿄. 이승만 대통령(왼쪽)이 도쿄의 맥아더 장군(오른쪽)을 예방한 뒤 귀국에 앞서 하네다공항 활주로에서 양국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 NARA
1950. 6. 18. 경기도 의정부. 덜레스 국무장관이 북한 지역을 바라보고 있다. 덜레스(중앙), 왼편 유재흥 장군,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이기붕 국방의원, 뒷줄 왼쪽 끝은 당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다. ⓒ NARA
1950. 6. 18. 경기도 의정부.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국 군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오른쪽 끝은 당시 무초 주한 미 대사다. ⓒ NARA
1950. 6. 26 서울. 한국전쟁 발발 다음날로 서울 시내는 태풍 전야처럼 한적하고 매우 평화롭다. 당시 덕수궁, 시청,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중앙청 등이 한눈에 보인다. ⓒ NARA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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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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