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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이문을 지나 범종각 옆에서 바라본 건봉사
 불이문을 지나 범종각 옆에서 바라본 건봉사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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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는 520년(신라 법흥왕 7)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처음 이름은 원각사였다. 그 후 고려 말에 서봉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그렇게 새 이름을 붙였다. 서봉사는 나옹스님이 1358년 절을 중건하면서 지금 이름 건봉사로 개명되었다.

1465년 세조가 행차하여 건봉사를 자신의 원당(기도하는 집)으로 삼았다. 세조는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다. 그 때 이후 건봉사는 조선 왕실의 원당이 되었다.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 미역밭,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했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곳으로 호국 불교의 본거지가 되었다. 1605년 일본에 강화사로 갔던 사명대사는 왜군이 통도사에서 약탈해 가져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 와서 건봉사에 모셨다. 사명대사가 1606년에 중건했던 건봉사는 1950년 한국전쟁 때 완전히 폐허가 되지만 다시 중창 불사를 통해 절의 품격을 다져가고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에 있는 건봉사 누리집의 「건봉사의 역사」를 임의로 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건봉사가 520년에 창건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는 때는 527년으로, 520년보다 7년 후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고찰, 1950년 완전히 폐허가 된 거대 사찰

아도화상 창건설은 더욱 믿기 어렵다. 아도화상은 374년(소수림왕 4)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다거나, 418년(신라 눌지왕 2) 경북 선산 도리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는 승려이다. 520년은 이보다 146∼102년 뒤이므로 아도화상이 그때까지 생존해 있었을 가능성이 없다.

 1920년대의 건봉사(건봉사 누리집 사진)
 1920년대의 건봉사(건봉사 누리집 사진)
ⓒ 건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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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집의 해설 중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곳이라는 사실이 특별히 눈길을 끈다. 건봉사에 얽힌 임진왜란 관련 역사는 누리집의 「금강산 건봉사와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에도 언급되어 있다. 「금강산 건봉사와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의 일부를 옮긴다.

'건봉사에 봉안된 진신 치아사리는 신라 시대 자장법사가 636년(선덕왕 5) 중국 오대산에 건너가 문수보살전에 기도 끝에 얻은 진신사리 100과 중 일부입니다. 자장법사는 643년 귀국하여 이 사리들을 통도사, 월정사, 법흥사, 정암사, 봉정암에 나누어 봉안하였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통도사에 난입하여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해 가버렸습니다. 그 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일본에 잡혀간 포로 송환 등의 문제로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 때 통도사 사리를 되찾아오게 됩니다.

사명대사는 왜적이 파괴한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하여 사리를 다시 모셨는데, 그 가운데 12과를 나누어 맨 처음 의승군을 규합하였던 인연이 있는 건봉사에 봉안하였습니다(석가여래치상탑비). 이것은 귀중한 진신사리가 다시 약탈될 경우를 우려해 나누어 분장한 것입니다. (중략)

국내에 진신사리가 봉안된 사찰은 더러 있으나 건봉사처럼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봉안된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 건봉사 진신 치아사리는 사명대사가 봉안한 사실이 분명하므로 그 가치가 더욱 높은 셈입니다. 치아사리는 세계에 15과뿐인데 건봉사에 12과, 스리랑카(불치사)에 3과가 보관된 희귀한 보물이라고 전해집니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적멸보궁 뒤뜰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적멸보궁 뒤뜰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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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1544~1610)의 속명(세상 이름)은 임응규(任應奎)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아버지 임수성과 어머니 달성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경남 밀양이다.

대사는 나이 15세인 1558년에 어머니가, 16세인 1559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경북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다. 직지사 누리집은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된 사명대사는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구국제민(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려냄)의 선봉에서 큰 공을 세웠다. 사명대사의 구국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 8대 가람(절)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부모 타계 후 16세에 출가하여 직지사에서 스님이 되다

그 후 사명대사는 묘향산 보현사로 가서 휴정(서산대사)의 제자가 된다. 대사의 이력 중 특이한 것은 1589년(선조 22) 정여립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강릉의 옥에 갇힌 일이다. 이때 강릉 지역 선비들이 대사의 무죄를 강력히 주장하여 풀려난다.

 경남 밀양 표충사(왼쪽 사당 표충사, 오른쪽 사명대사 유물관)
 경남 밀양 표충사(왼쪽 사당 표충사, 오른쪽 사명대사 유물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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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는 금강산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중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대사는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건봉사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대사는 1593년 1월의 평양성 탈환 전투 때 승병 2,000명을 이끌고 직접 참전한다. 그해 3월에는 서울 근교 삼각산 노원평 전투와 우관동 전투에서도 공을 세운다.

가등청정과 서생포 왜성에서 강화 회담을 하는 사명대사

대사는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서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과 회담을 가진다. 1차 회담은 1594년 4월 13일~16일 서생포 일본군 본진에서 열린다. 일본은 명나라 공주를 일본 왕의 후궁으로 보낼 것, 조선 4도(경상, 전라, 충청, 경기)를 양도할 것, 조선의 왕자 한 사람을 일본에서 살게 할 것 등을 요구한다. 대사는 일본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논리적으로 제압한다.

2차 회담은 1594년 7월 12일~16일, 3차 회담은 1594년 12월 23일, 4차 회담은 1597년 3월 18일에 열린다. 이때도 대사는 조선 측 회담 대표로 참석하여 적의 주장을 꺾는다.

 사명대사가 가등청정과 회담을 벌였던 울산 서생포 왜성, 동해가 아래로 내려 보인다.
 사명대사가 가등청정과 회담을 벌였던 울산 서생포 왜성, 동해가 아래로 내려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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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는 2차 회담 이후 선조에게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리고, 1595년(선조 28)에 다시「을미상소(乙未上疏)」를 올려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정책을 제안한다.  대사는 「을미상소」에서 본인이 주장한 바 그대로 산성 수축에 깊은 관심을 보여 직접 성 쌓기 공사에 참여한다. 대사가 승병들과 함께 수축한 산성은 남한산성, 대구 팔공산성, 경북 구미 금오산성, 가야산 용기산성, 경남 합천 악견산성, 경북 고령 미숭산성, 경주 부산성  등이다.

대사는 무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근처 야로에서 활촉 등을 만들기도 한다. 경남 의령에 주둔하던 1594년(선조 27)에는 각 사찰의 논밭에 봄보리 심기와 산성 주변 개간하기를 장려하여 군량미 4,000석을 비축한다.

나라와 백성 걱정 하고, 무기도 직접 만든 사명대사

1604년(선조 37) 2월 스승 서산대사가 입적한다. 슬픈 소식을 듣고 묘향산으로 달려가던 중에 대사는 선조의 부름을 받는다. 선조는 대사에게 일본 사신으로 가 달라고 부탁한다. 대사는 여덟 달 동안 노력한 끝에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한다.

대사는 10월이 되어서야 스승의 영전에 나아가 절을 올린다. 대사는 그 후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에 들어간다. 1610년 8월 26일, 마침내 영면한다.

 초파일 전후의 건봉사 불이문
 초파일 전후의 건봉사 불이문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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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생가,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
직지사,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
월정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1 / 영감사, 동산리 산1
건봉사, 강원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경내 사명대사 기념관
대전사, 경북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 442-1
동화사, 대구 동구 도학동 35
해인사,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표충비(表忠碑),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903-3
표충사, 사명대사 유물관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23
사명대사 기념관,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06

사명대사 유적들을 시간 순서대로 살펴보다

사명대사 유적지들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면 대략 위와 같다. 통일이 된 뒤라야 가볼 수 있는 금강산 유점사와 묘향산 보현사 등은 생략했다.

직지사는 16세 소년 임응규가 출가한 절이고, 월정사와 영감사는 대사가 수도 생활과 사찰 중건 공사를 하며 머문 곳이다. 대전사와 동화사는 승병을 훈련시킨 곳이고, 해인사는 대사가 이승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곳이며, 표충사(表忠寺)는 사명 · 서산 · 기허대사를 모시는 사당 표충사(表忠祠)와 사명대사 유물관이 있는 곳이다.

 건봉사의 사명대사 기념관. 공식 명칭은 '사명당 의승군 기념관'이다.
 건봉사의 사명대사 기념관. 공식 명칭은 '사명당 의승군 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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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가 창의를 한 역사 깊은 사찰이지만 건봉사는 아직도 사람들에게 덜 알려져 있다. 민통선(민간인 통제 구역)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관계로 오랜 기간 일반인의 답사가 금지되었 때문이다. 1988년 이후에야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었는데, 요즘도 찾아가 보면 절 인근 지역에는 휴전선 일대에서 복무중인 군인들이 오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건봉사 입구 안내판에서 '1878년 4월 3일 큰 불로 인해 3,183칸이 전소되었으나 여러 차례 복원 작업을 통하여 1911년에 9개 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었다.'라는 기록을 읽는다. 이 기록이 말해주듯 건봉사는 강원도 영양 낙산사,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등을 거느린 거대 사찰로서, 한때 3,183칸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었다.

한때 3,183칸이나 되었던 건봉사, 전쟁으로 폐허

하지만 6 · 25의 포성 앞에서는 건봉사도 어쩔 수 없었다. 안내판은 '(건봉사 일대는) 한국전쟁 중 휴전 직전까지 2년여에 걸친 아군 5, 8, 9사단 및 미군 제 10군단과 공산군 5개 사단이 16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건봉산 전투 전적지이며, 이 때 건봉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1994년부터 대웅전, 팔상전, 염불만일원, 종각, 사지 등이 복원되었고, 지금도 사찰 복원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건봉사 돌솟대와 범종각
 건봉사 돌솟대와 범종각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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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건봉사에 가보면 커다란 암석들로 축대를 반듯하게 쌓은 땅은 무수한데, 그 위는 텅텅 비어 있는 터들이 아직도 무수히 널려 있다. 3,183칸이나 되는 절집들이 건재하다가 2년여 폭격을 맞은 끝에 건봉사 경내 출입문인 불이문 하나를 빼고는 하나도 남김없이 무참하게 사라졌으니, 그 많은 절터의 흔적이 생겨나지 않고 어찌 배겨날 수 있었으리.

그 후 건봉사 불이문과 무수한 절터들은 남방한계선 안에 갇혔고,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는 상태로 버려졌다. 신라 시대 이래 줄곧 이어져 온 영화는 간 곳 없고 민족상잔의 뼈아픈 역사만 핏빛으로 안은 채 깊은 산중에 외로이 묻혔던 것이다.

 건봉사 불이문에 새겨져 있는 금강저(일종의 무기)는 이곳이 사명대사의 의승군 창의 및 훈련지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듯 여겨졌다.
 건봉사 불이문에 새겨져 있는 금강저(일종의 무기)는 이곳이 사명대사의 의승군 창의 및 훈련지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듯 여겨졌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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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이 넷 있는 불이문, 기둥에는 무기 조각

그러나 불이문(문화재자료 35호)도 신라 시대 건축물이거나 조선 시대에 지어진 것은 아니다. 불이문은 1920년 건립되었다. 일반 사찰의 일주문(두 개의 기둥을 한 줄로 세워 만든 문) 기능을 하는 문인만큼 불이문을 지나면 건봉사 경내가 시작된다. 다만 이곳 불이문은 기둥이 4개 있다는 점에서 일주문으로서는 매우 특이하다. 벽체가 막혀 있지 않을 뿐 사실상 집 형태로 지어진 것이다.

사명대사 기념관은 불이문으로 들어서기 이전에 있다. 현판이 '四溟堂(사명당) 義僧兵(의승병) 記念館(기념관)'인 이 기념관은 주차장 옆에 있다. 따라서 건봉사를 찾은 답사자는 가장 먼저 이곳부터 둘러보게 된다.

불이문에서는 기둥에 새겨져 있는 금강저 조각을 본다. 금강저는 불교에서 악마를 물리치는 데에 사용하는 무기로, 수도자가 번뇌를 이겨내고 수행을 실천할 때 지니는 상징적 도구이다. 건봉사 불이문 기둥에 금강저가 새겨져 있는 것은 그저 불교적 인식에 따른 조치이지만, 이곳이 사명대사가 승병을 창의한 사찰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아주 잘 어울리는 조각으로 느껴진다.  (불이문의 현판 글씨를 쓴 김규진에 대해서는 기사 <김규진의 글씨를 보며 통일을 꿈꾼다> 참조)

금강저 조각은 현대사의 비극인 6 · 25전쟁도 상기하게 한다. 조각 주변이 얼룩덜룩한데 세심히 들여다보니 총탄 자국이다. 어수선한 총탄 자국을 보노라니 '건봉사는 1950년 한국전쟁 때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는 누리집의 표현이 생생하게 실감으로 와 닿는다. 임진왜란과 6 · 25전쟁으로 상징되는 우리 겨레의 고통이여!

 건봉사 적멸보궁
 건봉사 적멸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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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문을 지나 곧장 올라가면 적멸보궁에 닿는다. 건봉사가 자랑하는 석가모니 진산사리를 뒤뜰에 봉안하고 있는 집이다. 12년 전인 2005년에 들렀을 때와 변함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적멸보궁과 석가여래치상탑비를 만나니 오랜 친구를 만난 양 반갑기 그지없다.

하지만 돌아서서 나오는 길에 마주친 낯선 풍경 탓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예나 지금이나 템플스테이를 하는 건물 담장 사이에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 있어 그리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조그마한 표지판이 분명히 있었는데 지금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없어졌다! 「→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손바닥 크기의 표지판이었는데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어두워져가는 산 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초파일을 맞아 적멸보궁의 뜰 안 하늘은 연등으로 가득 차 이토록 아름다운데, 어째서 통일의 기운은 저물어오는 어둠에 가라앉은 듯 홀연히 행방을 감추었단 말인가!

 건봉사 입구 사명대사 동상
 건봉사 입구 사명대사 동상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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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문.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통일을 이루라는 뜻이리라! 그렇게 마음을 달래며 도로까지 나오니 대사께서 왼손을 치켜든 채 나를 바라보며 '걱정하지 마라!' 하고 달래신다.

왼쪽으로 불을 켜고 나아가자 금세 군인들이 길을 막는다. 밤에는 지나갈 수 없는 통행 금지 구역이라고 한다.

'그래, 병사들이 고생을 하고 있듯이 나도 통일과 평화가 올 때까지 민족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최소한 1인분의 몫은 해야 하리라!'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담장 옆으로 저 멀리 산 속으로 가는 좁은 길이 나 있다. 10여 년 전에 찾아갔을 때에는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작은 표지판이 있었는데 2017년 방문에서는 그 표지판을 찾을 수 없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담장 옆으로 저 멀리 산 속으로 가는 좁은 길이 나 있다. 10여 년 전에 찾아갔을 때에는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작은 표지판이 있었는데 2017년 방문에서는 그 표지판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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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사들이 건봉사 불이문 아래에서 겨울 햇살을 받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건봉사 일대가 군사 지역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한 풍경이다.
 병사들이 건봉사 불이문 아래에서 겨울 햇살을 받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건봉사 일대가 군사 지역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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