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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고래'하면 동해나 울산, 장생포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홍어로 유명한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있습니다. 흑산도와 고래는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을까요? 왜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생긴 것일까요? 대체 흑산도에선 고래와 관련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연재는 흑산도와 고래의 연관성을 좇는 '해양문화 탐사기'입니다. - 기자 말

 ‘사방에 도서가 없고, 바다가 하늘과 서로 맞닿아 아득히 넓고 끝이 없는 바다뿐’인 곳, 그곳이 흑산도였다. 그리고 그 흑산바다에 고래가 살았다.
 ‘사방에 도서가 없고, 바다가 하늘과 서로 맞닿아 아득히 넓고 끝이 없는 바다뿐’인 곳, 그곳이 흑산도였다. 그리고 그 흑산바다에 고래가 살았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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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인들은 바다를 건너 먼 길 떠날 때 타는 배를 '성사(星槎)'로 비유하길 즐겨했다. '사(槎)'가 '벌목한 나무'란 뜻이니 '성사(星槎)'는 '별로 만든 뗏목'. 바닷길을 타고 먼 길 떠나는 일을, '별 뗏목'을 타고 은하수를 건너는 일처럼 아득하게 여겼던 것이다.

1487년 제주도로 떠났던 최부(1454∼1504)의 심정도 '별 뗏목'을 타고 은하수를 건너는 것처럼 아득했으리라. 그해 9월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받은 최부는 11월 11일 아침, 전라도 해남을 출발해서 다음날 저녁 제주도 조천에 도착했다. 그의 임무는 지역 행정을 감독하고 도망친 노비를 찾아내 원적으로 복구시키는 것.

하지만 이듬해인 1488년 1월 30일, 최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한다. 윤1월 초3일, 김존려와 김득례 등 제주목 관원들이 "한라산이 흐리거나 비가 와서 일기가 고르지 않으면 반드시 바람의 변고가 있으니 배를 타서는 안 된다"라고 말렸다. 하지만 그는 일행 42명과 함께 배를 띄웠다. 그리고 추자도 근해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에 도착할 때까지 장장 16일 동안 표류하고 만다.

표류 이틀째, 최부 일행은 '마치 한 점 탄환만한 섬'을 '아득하게' 바라본다. 흑산도였다.

"키를 잡은 사람이 동북쪽을 가리키기에 보니, 마치 한 점 탄환만한 섬이 아득하게 보였다. '아마 흑산도인 듯합니다. 이곳을 지나가면 사방에 도서(島嶼)가 없고, 바다가 하늘과 서로 맞닿아 아득히 넓고 끝이 없는 바다뿐입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배 가운데 누웠다. 나는 안의에게 군인을 감독하여 취로(取露 바닷물을 증류시켜 식수를 받는 일)와 배를 수선하는 일 등을 시켰다."
- 최부 <표해록> '윤1월 초4일 대양으로 표류해 들어가다' 중에서

'사방에 도서가 없고, 바다가 하늘과 서로 맞닿아 아득히 넓고 끝이 없는 바다뿐'인 곳. 예나 지금이나 흑산도는 그렇게 '아득한 바다뿐인 곳'에서 '한 점 탄환만한 섬'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 '탄환만한 섬'은 거꾸로 그 어떤 '너머', 다른 세상으로 로 가는 시작이기도 하다. 최부가 살았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일찍이 지도를 살펴보니, 우리나라의 흑산도로부터 동북쪽으로 향하여 가면 충청도와 황해도의 경계며, 정북쪽은 평안도와 요동 등지에 이른다...(중략)... 서남쪽으로 향하여 조금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가면 섬라(暹羅, 타이)·점성(占城, 베트남 중남부)·만랄가(滿剌可, 말라카) 등에 이른다.

(흑산도로부터) 정남쪽은 대·소 유구국(流球國, 오키나와와 대만)이고, 정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가면 여인국(女人國)이며, 일기도(一岐島, 나가사키현 이키시마의 옛 나라 이름, '일지국'이라고도 함)다. 정동쪽은 일본국(日本國)이며, 대마도(對馬島)다."
- 최부 <표해록> '윤1월 초8일 대양 중에 표류하다'
  
다른 세상으로 열린 그 '아득한 바다'에서 최부 일행은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누군가를 만난다. 고래였다.

 1488년 표류했던 최부가 지도를 보았다면 1402년에 나온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봤을 개연성이 높다고 연구자들은 이야기한다.
 1488년 표류했던 최부가 지도를 보았다면 1402년에 나온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봤을 개연성이 높다고 연구자들은 이야기한다.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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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따라 서쪽으로 가는데 돌아보니 큰 물결 사이로 물체가 보였으나 그 크기를 알 수 없었다. 수면 위로 보이는 그것은 길이가 긴 행랑 같았고 하늘로 거품을 내뿜는데, 파도가 나부끼고 물결이 일렁였다. 초공(梢工)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고 손을 흔들어 말을 못하게 했다. 배가 멀리 지나쳐 간 연후에 초공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저것은 고래인데 큰 고래의 경우에는 배를 삼키고 작은 고래는 배를 뒤엎습니다. 서로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우리는 죽을 지경에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 최부 <표해록> '윤1월 초6일 대양 중에 표류하다' 중에서

추자도 근해에서 시인(視認,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인 약 100킬로미터 밖에 흑산도가 있다. '바람을 따라 서쪽으로' 밀렸으니 최부 일행은 이틀 만에 흑산도 근해에 들어섰을 것이다. 따라서 최부가 고래를 본 바다는 흑산도 근해로 추정된다.

최부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이가 있다. 손암 정약전(1758∼1816)이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유배살이를 하며 흑산도 근해에 사는 생물 155종의 생김새와 서식양태 등을 기록한 해양생물백과사전 <자산어보(玆山漁譜)>를 저술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해양생물을 비늘 있는 인류(鱗類), 비늘이 없는 무린류(無鱗類), 단단한 껍질을 가진 개류(介類),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잡류(雜類) 등 네 가지로 분류했다. 고래는 비늘이 없는 '무린류(無鱗類)'로 분류하고 '경어(鯨魚)'라 칭했다. "현지에서 부르는 이름은 고래어(高來魚)이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색깔은 칠흑색이고 비늘이 없으며, 길이는 10장 가량이고, 혹간은 20∼30장이 된다. 흑산바다에도 역시 있다. <옥편>에 이르기를, '고래는 물고기의 왕'이라고 했다. <고금주(古今注)>에 이르기를, '고래 큰 것은 길이가 1천리이고, 작은 것도 수십 장이다. 그 암컷은 예(鯢)라 부르는데, 큰 것은 길이가 1천리이고, 눈은 밝은 구슬과 같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 서해와 남해에도 역시 있는데, 길이가 1천리 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최씨의 설이 과장된 것이다.

오늘날 일본 사람들이 고래회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데, 약을 바른 화살을 쏘아서 잡는다. 지금도 고래가 죽어 표류해 오면 아직도 화살이 꽂힌 채 남아 있는 것이 간혹 있는데, 이는 화살을 맞고 도망친 것이다. 또 고래 두 마리가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죽어 해안에 혹간 표착하면, 삶아서 기름을 내서 10여 동이의 기름을 얻을 수 있다. 눈은 술잔을 만들고, 수염으로는 자(尺)를 만들고, 그 척추를 자르면 절구를 만들 수 있다. 고금의 본초 관련서에서 모두 이러한 것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이 기록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두 말할 것 없이 고래가 "흑산바다에도 역시 있고, 우리 서해와 남해에도 역시 있다"는 정약전의 단언이다. 즉 흑산바다를 비롯한 한반도 서해와 남해에 고래가 살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고금주>를 지은 최표가 "고래가 큰 것은 1천리라 했는데 길이가 1천리 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라면서 "최씨의 설은 과장된 것"이라고 잘라 말하기까지 한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대목이 있다. "오늘날 일본 사람들이 고래회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데, 약을 바른 화살을 쏘아서 잡는다"라고 소개하면서도 우리나라에서 고래를 잡는다는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손암 정약전이 유배살이를 하며 <자산어보>를 흑산도 사리(모래미 마을) 앞바다.
 손암 정약전이 유배살이를 하며 <자산어보>를 흑산도 사리(모래미 마을) 앞바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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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은 다만 죽어 표착해온 고래를 "삶아서 기름을 내고, 눈은 술잔을 만들고, 수염으로는 자를 만들고, 그 척추를 자르면 절구를 만들 수 있다"라고 그 용도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조선의 다른 기록들과 마찬가지로 <자산어보>에서도 "고래가 죽어 표류해 오는" 경우만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최소한 19세기 초반까지는 조선인들이 포경을 하지 않았다고 유추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흑산바다에도 역시 고래가 살았다"는 정약전의 단언,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그가 유배살이를 했던 흑산도 사리(沙里, 모래미 마을)엔 고래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모래미 마을에 함양 박씨 성을 가진 경호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고기잡이를 나간 경호 할아버지는 바람이 심하게 바람이 불어 표류하게 된다. 그때 고래 한 마리가 나타나 할아버지가 탄 배를 자신의 등에 업었다. 경호 할아버지는 '고래가 배를 뒤집으면 이제 죽겠구나'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고래는 할아버지가 탄 배를 흑산도 앞바다에 부려 놓았다.

할아버지는 마을로 돌아가려고 노를 열심히 저었다. 하지만 심한 바람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그때 다시 저만치 멀어졌던 고래가 다시 돌아와 경호 할아버지가 탄 배를 모래미 마을까지 밀어주었다. 덕분에 할아버지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모래미 마을의 함양 박씨 사람들은 조상의 목숨을 구해준 고래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고래 고기를 일절 먹지 않는다고 한다.

'크기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고래가 살았던 바다, 흑산바다. 고래가 신화가 아닌 설화로 살아있던 섬, 흑산도. 흑산바다를 유영하던 고래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 다음 기사 : '우리는 잡지도 않던 고래, 누가 잡기 시작했을까'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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