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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페미니즘 열풍'을 넘어 '페미니즘 유행'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서 여성주의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차별이 일상에 공기처럼 스며들어있고, 젠더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게 여전히 낯선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학교 같은 공간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 환경에서 '성평등'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페미니스트로 자라나는 것, 그리고 페미니스트를 키워내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각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23명 정원에 60번인 아이의 번호
▲ 이상한 반번호 23명 정원에 60번인 아이의 번호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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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상한 반 번호

작년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몇 번이냐 물었더니 키 번호는 7번, 그냥 번호는 60번이라고 한다. 몇 번이고 다시 물었다. 60번이 아니라 17번이 아니냐고. 아이는 물을 때마다 60번이라 답했다. 큰 걱정 없이 보낸 초등학교였는데 반 번호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로 지내고 있나 싶어 덜컥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의 반 번호는 정말로 60번이었다. 이유를 알아보니 남학생은 1번부터, 여학생은 51번부터 시작한단다! 이해가 되지 않아 주위를 둘러보니 거의 모든 학교가 언젠가부터 남학생은 1번부터, 여학생은 51번부터라는 이상한 번호 체계를 쓰고 있었다. 이유는 행정시스템의 편의를 위함이란다.

1985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내 번호는 38번이었다. 아마도 가나다순이었고, 남학생에게 번호를 준 후, 여학생으로 넘어와 '정'가인 나는 30번대 후반부에 자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학생이 앞, 여학생이 뒷자리 번호를 차지하고 있다. 몇몇 학교는 남녀 구분 없이 가나다 순 혹은 생년월일 순으로 번호를 정한다고 하지만 대다수의 학교는 여전히 여학생들을 51번부터 줄 세우고 있다.

아이의 학급번호에 부당함을 따지고 있자니 태어나 처음 부여받는 주민번호에서부터 남자는 1, 여자는 2 (이제는 3과 4)를 받는다. 주민번호부터 이런 순서를 쓰니 대부분의 학교가 20명 남짓의 학생들이 있는 반에 60번이라는 번호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는 건 아닐까?

#2. 왜 뽀로로는 비행기를 타고, 루피는 요리만 할까?

그 마저도 요리만 하는 루피. 하늘을 나는 건 뽀로로, 비행기를 만드는 건 에디의 몫.
▲ 저 많은 캐리터 중 여성 캐릭터는 둘 뿐 그 마저도 요리만 하는 루피. 하늘을 나는 건 뽀로로, 비행기를 만드는 건 에디의 몫.
ⓒ 아이코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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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독수리오형제>에서 여자는 4호 한 명뿐이었다.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이들 만화에 여성 캐릭터는 한 명, 많아야 둘이다. 시즌을 거듭할 때마다 등장인물이 늘어나는 <뽀로로>인데 여전히 여성 캐릭터는 루피와 페티뿐이다. <타요>와 <미니특공대> <터닝메카드> 등 다수의 만화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뽀로로>는 시즌을 거듭해 비행기를 타고 하늘도 날고 에디는 뚝딱뚝딱 비행기며 로봇이며 만들어내는데 루피는 시즌 6이 되도록 요리만 한다. 페티는 그저 뽀로로와 같은 펭귄일 뿐, 별다른 특기와 에피소드 없이 그림으로 시즌 6까지 왔다. <타요>의 네 캐릭터 중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엠버도 구조 현장으로 출동하지만 응급환자를 돌보는 일만 거의 맡는다. 다른 캐릭터물도 대동소이하다.

고정된 성역할 캐릭터물이 방영되는 EBS보다 차라리 디즈니가 낫다. <겨울왕국> <모아나> 모두 여성 캐릭터가 '왕자님' 없이 위기를 극복하고 당당히 전 세계 어린이의 사랑을 받고 있다. 디즈니 채널에서 방영되는 만화에도 여성 캐릭터를 자주 만날 수 있다. <꼬마의사 맥스터핀스>는 밖에서 일하는 엄마, 집안 살림을 하는 아빠, 그리고 장난감을 고치며 노는 여성캐릭터 맥스터핀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EBS 프로를 들여다 보면 여전히 아빠는 출근을 하고 집안일은 엄마가, 그리고 시즌 6이 되도록 루피는 요리만 한다.

왕자님의 도움따윈 필요없다. 두사람의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 왕자님의 도움따윈 필요없다. 두사람의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 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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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이의 그림일기 속 의사는 언제나 남성

첫째 아이의 그림일기를 넘겨보다 병원에 간 장면에서 멈췄다. 의사는 남성, 간호사는 여성으로 그려진 아이의 일기. 아이들이 보는 책들도 찾아보았다. 의사의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한 남성, 간호사는 여성으로 그려져 있었다. 삼남매를 불러 물어보았다. 딸인 첫째도, 아들인 둘째, 셋째도 모두 의사는 남성, 간호사는 여성이라는 답을 했다. 아이들이 다니는 소아과의 의사가 대부분 여성인데도 말이다.

만 5세가 되면 자연스럽게 남녀 성역할의 구분이 생긴다고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은 환경에서 만들어준 것이지 않을까? 태어나면서부터 남성은 1 혹은 3의 주민번호 뒷자리를 받고, 여성은 학교에 가서도 51번이라는 말도 안 되는 번호를 받고, 공영방송 어린이프로그램의 주인공은 남성캐릭터가 맡고 있는 당연한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체득하는 성역할은 따져보지 않아도 뻔한 그림이다.

그림만 보면 엄마가 집에서 커피 마시며 전화만 하는 줄 알겠다
▲ 유아 그림책에 실린 너무나 전형적인 성역할 그림만 보면 엄마가 집에서 커피 마시며 전화만 하는 줄 알겠다
ⓒ 이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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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자애 방이 이게 뭐야? 사내자식이 울고 그래!

성평등과 거리가 먼 환경 탓을 하다 문득 우리 집을 들여다보았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식사 준비를 할 때면 무의식적으로 아홉 살 첫째 딸아이를 부르고 마당의 잡초를 뽑을 땐 일곱 살 둘째 아들을 부른다. 똑같이 어지럽혀진 방인데도 "여자애 방이 이게 뭐니? 여자애가 이렇게 더러워서 어떡해!"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삼남매가 싸우다 울음이 터지면 "사내자식이 울고 그래! 뚝!"이라는 말도 별 생각없이 한다. 무려 2017년에 '성평등'이라는 말에 꽤 집중한다는 내가 말이다.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며 최근엔 문화예술협동조합의 대표로 일을 하고 있는 엄마이지만 아이들 눈엔 엄마는 집안일을 하거나 집에서 쉬는 사람, 아빠는 회사에 출근을 하고 집에서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다. 정확하게 엄마가 하는 집안일이 뭔지 물어보았지만 아이들은 그냥 빨래, 요리 정도만 대답할 뿐 집안일의 실체를 모르는 듯했다. 집안일로 이뤄진 집에 사는 아이들인데도 말이다. (사실 남편도 제대로 모르는 집안일이다)

집밖에서 하는 일만큼 집안에서 하는 일도 중요하고 두 일이 균형을 이루어야만 가족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보지만 쉽지가 않다. 나부터도 결혼 9년차인데 직업란에 '주부'라고 쓴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우리 집 가장은 '아빠'라고 아이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부부싸움을 하면 늘 엄마가 아빠에게 혼나면서 끝이 난다고 아이들은 묘사한다. 생활에서 이런 부분들을 발견할 때마다 이길 수 없는 싸움 앞에 선 기분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남성의 시각에서 작성
▲ 때마침 날아온 가정통신문 그러나 이마저도 남성의 시각에서 작성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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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때마침 날아온 가정통신문

그러던 차 지난 금요일 첫째 아이가 가져온 가정통신문(아래 '가통')에 '양성 평등 교육'과 '양성평등 실천 10계명'이 실려 있었다. 달력을 찾아보니 지난주가 "매년 7월 1일~7월 7일,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운 발전을 통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일·가정 양립 실천을 통한 실질적인 남녀평등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제정된 주간"이라는 양성평등주간이었다.

평소엔 대충 스윽 보고 지나쳤던 가통을 정독했다. 여성에게 불평등한 고정관념을 바로 잡기 위해 애쓴 흔적이 많이 보였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이 아닌 "남성과 여성"으로 시작하는 첫머리부터 마음이 상하기 시작했다. "창의적인 여성 인력을 보다 많이 확보할 수 있게"와 "양가 부모님은 똑같이 예우해 드립니다. 시댁과 처가의..."라니!

창의적인 '여성' 인력이라는 말 그 자체가 더 남녀(왜 나는 '여남'이라고 쓰지 못하나?)의 구분을 짓는 것이 아닐지? 그냥 '창의적인 인력'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걸까? 그리고 남성들은 공감하지 못하는 '시댁'과 '처가'라는 표현. 사소한 문제일 수 있지만 '댁'과 '가'가 갖는 글자의 의미에서부터 차별은 시작되는 게 아닐까? (굳이 명절의 양가 부모님댁 방문 순서까진 쓰지 않겠다)

#6. 뚱뚱한 여성의 자리는 없는가

1년 사이 부쩍 자란 아이들의 여름옷을 사기 위해 인터넷 쇼핑몰을 찾았다. 아홉 살이 되면서 주니어 코너에서 옷을 고르는 첫째. 과연 아이들 옷이 맞나 화들짝 놀랐다. 5학년만 되어도 키가 160cm가 되어 엄마와 옷을 같이 입는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 아이들의 옷을 파는 사이트인데 화면 속 아이들은 하나 같이 마른 체형에 어깨가 드러나는 옷과 짧은 치마를 입고 매끈한 다리를 드러내며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천진한 아이들의 얼굴, 통통한 아이들의 몸은 찾아보기 힘들다. 얼굴만 가리면 44사이즈만 파는 성인복 사이트라고 해도 믿을 정도이다. 성평등은커녕 여성의 상품화가 아동복 시장까지 점령해 있다. 그것도 예쁘고 마른 여성만을 상품화하여. 

시원한 민소매와 짧은 반바지를 사려던 계획을 나도 모르게 철회하고 첫째의 옷은 5부, 7부 옷으로 고르고, 원피스 안에 입을 속반바지도 담았다. 또래보다 통통한 첫째의 체형을 커버하며 속살을 최대한 감출 수 있는 옷으로. 그러나 둘째와 셋째는 무조건 시원한 옷을 고른다. 첫째만큼 셋째도 배가 볼록하게 나왔는데 말이다.

양성 평등 교육의 안내가 실린 가통에선 "생물학적 차이를 사회 문화적 차이로 직결시키지 않으며"라고 또박또박 써놓았건만 '예쁘고 조신한 딸', '멋있고 씩씩한 아들'의 상이 쉬 사라지지 않는다.

영어 조기교육보다 제 손으로 찾아 먹고 치우는 교육, 그런 조기교육이 필요하다
▲ 제 손으로 밥해먹는 아이로 키워야겠다 영어 조기교육보다 제 손으로 찾아 먹고 치우는 교육, 그런 조기교육이 필요하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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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전한 82년생 김지영들

<82년생 김지영>이 꽤 오랜 시간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책상에 몇 달째 올려놓아도 남편은 일부러 책장 한 장 넘기지 않고, 아이들은 아빠는 뚱뚱해도 괜찮고 엄마와 누나는 다이어트를 꼭 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말 아침만큼은 남편이 맡으라고 몇 차례의 부부싸움 끝에 결론을 내렸지만 여전히 주말 아침도 내 몫이고, 어쩌다 남편이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면 직장 상사보다 늦게 출근한 부하직원 같은 기분으로 나도 모르게 주방으로 향한다.

<82년생 김지영>의 삶이 42년생, 52년생은 물론 92년생, 2012년생 김지영의 삶과도 별반 다르지 않는 이 사회에서 딸 하나와 아들 둘을 키우는 엄마로서, 안팎의 일 모두를 해야 하는 엄마이자 여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여전히 한숨이 나온다. 여성 스스로 끊임없이 요구하고 찾고 변화하는 것 외엔 답이 없는 것일까? 우선 '우리 집 가장은 아빠'라는 유리천장부터 깨봐야겠다.


태그:#양성평등, #페미니스트 키우기,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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