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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인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주최로 열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처벌 중단 및 대체복무제 도입 촉구 기자회견에서 2005년 출소한 나동혁씨가 포승줄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인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주최로 열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처벌 중단 및 대체복무제 도입 촉구 기자회견에서 2005년 출소한 나동혁씨가 포승줄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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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에 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몸을 숨겼던 경험은 대가족 제도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예사로운 일이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법원의 유죄판결을 보면서 할머니의 치마 속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부모님이 꾸지람에 이어 회초리를 들 때, 아이들은 가장 안전한 도피처인 할머니의 치마폭으로 숨는다. 그곳은 처벌의 집행을 무효화시키는 공간이다. 아이에게는 시간을 벌어주어 하소연을 할 기회를 가져다주고, 할머니는 부모와 자녀가 만에 하나 신체나 감정에 상처를 받지 않도록 위급한 상황을 피하도록 중재할 시간을 벌어 준다. 노기등등한 부모에게 아이를 내어주는 할머니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연륜으로 쌓여진 할머니의 혜안 때문에 아이가 풀려나올 때쯤에는 모두가 평상심으로 돌아가 있다. 이렇게 해서 부모와 자녀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긴장 상황은 평상심으로 수습이 된다. 대법원의 역할도 이와 같아야 한다.

삼심제의 정점에 있는 대법원은 하급심 보다 당사자의 이익과 권리 보호에 신중을 기하면서 공정하고 정확한 재판을 진행하여 판결에 흔쾌히 승복하도록 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병역거부자 판결문을 보면 고민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판결권 행사를 통해서 할머니의 치마폭이 되어야 하는데 작금의 판결을 보면 오히려 혼란과 분쟁의 빌미를 확대시키고 있다.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가 아예 치마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치맛자락을 말아서 묶어 놓은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 번 무죄라고 했으니 딴소리하지 말라는 식이다. 상급심의 판결이 마치 변치 않는 자연법칙이나 되는 것처럼 하급심의 판례변경 요청을 묵살하고 있다.   

판결에 관한 한, 최고의 경륜을 가진 대법관들이 해방 이후 70년이 넘도록 2004년 단 한 분의 대법관만 무죄의 소수의견을 내었을 뿐, 유죄판결을 유지하고 있다. 올해 대법원은 13건의 무죄 선고를 했다. 반면 1심과 2심은 17건 무죄를 선고했다. 법조인들조차 상급심과 하급심의 핑퐁 판결에 대해서 법조계에 유례가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언론은 사법 불신을 부추기며 조소하는 제목을 뽑고 있다 '대법원 병역거부 유죄로 쐐기를 박았다', 며칠 후엔 '하급심 병역거부 무죄로 되치기' 식으로 보도하고 있다. 재판은 오로지 한 우물만 파는 것과는 다르다. 거듭하다 보면 새로운 법 해석이 나오는 법이다. 병역거부 재판의 경우 하급심인 꼬리가 머리인 대법원을 당기는 형상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대법원이 하급심의 무죄 선고에 대한 기각 판결문에서 기각의 이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증 없이 2004년의 유죄판결 취지만을 반복하고 있다는 데 있다. 집안의 어른인 할머니가 치마폭에 손자녀를 대피시켜서 상황을 누그러뜨리고 갈등을 해소하는 여유를 가졌듯이 대법원도 기계적으로 기각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병역거부에 대한 인권선진국들의 판결문 등을 참조하여 재해석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국제사회의 법률가들로부터 존중을 받는 길이다. 원심 판사들의 무죄 선고를 '튀는 판결'로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해서는 안 된다.

무죄를 선고한 한 부장판사는 자신이 "2005년부터 2012년 사이에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 16건을 유죄로 선고했다"고 밝히면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정당한 사유로 인정하는 것이 일부 판사에게만 통용되는 법해석론이 아니라 국가기관인 국가인권위에서 확인한 결론임을 이 판결로써 강조한다"며 기존 판단을 뒤집었다. 고민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초지일관하는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앞에 두고 판사는 판결 번복으로 자신의 직업적 양심을 바꾸었다.

너무나 당연하다.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인 판사가 객기를 부린다고 폄하해서는 안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듯이 국제인권법에 대한 지식과 통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죄 판결로 유턴한 것이다.

현재 UN 인권이사회 소속의 자유권 규약 위원회, 고등인권 판무관실, 유럽사법재판소, 유럽인권재판소 등은 양심적 병역거부자 개인과 국가 간의 소송에서 병역거부자 편을 들어주고 있다. 매 결정과 판결문에는 한국의 병역거부자 처벌을 인용하면서 대한민국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국제 인권 관련 규범에 역행한다는 점을 명기하고 있다.

이런 인권선진국 법조계의 법 해석을 우리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애써 외면하면서까지 국가안보라는 구실로 반인권적인 처벌을 계속하는 것은 스스로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대한민국이 병역거부자를 양산하는 국가가 되게 방치한 것은 대법원의 유죄 판결 때문이다. 국제 사법계가 한국의 사법부를 주시하고 있다.

국제인권법연구회가 번역 발행한 UN고등인권판무관실(OHRHC)과 세계변호사협회(IBAG)가 공동으로 작업한 '국제인권법과 사법'법률가(법관,검사,변호사)를 위한 편람(A Manual on Human Rights for Judges, Prosecutors and Lawyers)에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국제인권법상 권리로 인정하고 있다.

반면 한국 최고 재판소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주권국가로서의 법 해석을 강조하면서 이를 배척하고 있다. 우리 대법원을 보고 '우물 안 대법원'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까 걱정이 된다. 국제인권규약은 "권고적이고 강제력이 없다"고 강변하는 최고 재판소의 법관들을 보면, 공부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은 권고라서 공부를 안 해도 된다고 말하는 고집 센 아이의 얼굴이 겹쳐진다.
 
판사들은 인사평가에서 상급심의 파기율이 낮아야 유리한데도 불구하고 헌법 6조1항의 국제법 존중의 헌법 취지를 지키기 위해서 일신상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기각 100%인 무죄 선고를 이어가고 있다. 유불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국제인권 기준면에서 대한민국이 인권 국가로 이 정도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무죄로 선고하는 판사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대법원이 법적인 안정성을 너무 강조하여 병역거부자들에게 숨 쉴 공간을 주지 않는 것보다는, 다양한 법 해석을 통하여 국가와 개인의 충돌을 완화시킬 조치들을 강구해야 한다. 일도양단이 아니라 일거양득의 묘를 살리는 판결이 내려야 한다.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순수한 민간역무의 대체복무제를 국방부가 마련하도록 하는 것은 양대 최고 최판소가 과감하게 무죄와 위헌 결정을 내리는 길뿐이다. 이미 하급심 판사들이 길을 터주고 있으니, 부담이 덜하지 않는가? 할머니의 치마폭이 그립다.

덧붙이는 글 | UN인권이사회 35차회기(2017.6/6-23)는 UN총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결론및 권고사항으로 대체복무제의 기간이 징벌적이어서는 안되며 합리적이고 객관적 기준에 근거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태그:#양심적 병역거부, #대체복무기간, #무죄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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