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끝까지 '몰랐다', '잘못이 아니다'라고만 했다.
3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0부(부장판사 황병헌)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결심 공판을 열었다. 블랙리스트(문화예술계 지원배제명단) 사건 1심의 마지막 법정 공방이 이뤄지는 자리였다.
지난달부터 부쩍 건강상 어려움을 호소해온 김기춘 전 실장은 이날도 지친 얼굴에 환자복을 입고 등장했다. 자신의 다섯 변호인에 조 전 장관의 변호인 두 명,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과 김소영 전 문화체육비서관 변호인의 변론이 밤늦게까지 이어지자 그는 의자에 거의 누운 자세로 기대있었다. 하지만 오후 8시 32분, 김 전 실장은 "서서 하겠다"며 마이크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주어진 진술 기회를 위해 준비해온 내용을 덤덤하게 읽어 내려갔다.
재판부에 읍소하며 결백 주장한 김기춘·조윤선"저는 문체부 1급 공무원들에게 사직을 강요한 사실이 없다. 문화예술인 개인이나 단체 선정 또는 지원 배제를 위한 명단을 작성하라고 지시한 일도 없고, 그 명단을 본 일도 없다. 이것을 집행하도록 지시하거나 강요한 일도 없고 보고받은 일도 없고 진행 상황을 알지 못했다."그는 국회 청문회 위증 혐의 역시 부인했다. 이어 "이 법정에서 증언과 진술을 들어보니 옥석을 가려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를 몸소 보고 느꼈다"며 "존경하는 재판장님, 배석 판사님 부디 진실을 분별하고 지혜로운 판결을 선고해주시길 간절히 호소한다"고 말했다.
뒤이어 일어난 조윤선 전 장관은 눈물을 보였다. 그는 "블랙리스트 주범으로 몰려 구속된 상황이 엄청난 충격이었다"며 "이 사건 다 끝난 뒤에도 그 낙인을 갖고 살아갈 일은 감당 못 하겠다"고 털어놨다. 또 "오해에 맞닥뜨려 해보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장관직을) 그만둬 많은 회한이 있다"고 했다.
"저는 한평생 살면서, 그리고 앞으로 남은 인생도 문화예술과 문화예술인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작은 꿈이다. 문체부 장관으로 제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희망은 하늘이 허락해주시지 않았지만, 자연인 조윤선의 희망만은 꼭 이어가고 싶다."조 전 장관은 "탄핵당한 정부에서 주요 직책을 거친 책임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잘 견뎌왔다"고도 했다. 하지만 "제가 블랙리스트 주범임이 사실이라며 책임지라는 특별검사팀 주장은 참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의 남편이자 변호인, 박성엽 변호사 역시 최후 변론 때 조 전 장관의 결백을 주장하며 울먹거렸다.
특검은 "김소영 전 비서관 등이 김기춘 전 실장이 (블랙리스트 실행을) 지시했다고 증언하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 업무수첩 등도 그의 지시 내용을 입증한다"고 반박했다. 조윤선 전 장관의 경우 "박준우 전 정무수석으로부터 블랙리스트 업무를 인수인계받고도 기억에 없다, 자신이 지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TF에서 업무 보고를 받는 증 증거가 있다"고 했다.
"반성 않는 피고인들... 역사의 수레바퀴 되돌려"
이용복 특검보는 이 사건을 단순한 정책 사안으로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이 법정에서 이들의 권한이 남용될 경우의 참상을 목도했다"며 "피고인들이 이 사건 범행으로 국가와 국민에게 끼친 해악은 너무나 중대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잘못은 단지 박근혜 정부의 비서실장, 장관, 수석비서관, 비서관 자리에 있던 게 아니다. 피고인들은 참모로서 대통령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오히려 동조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내치는 데에 앞장섰다. 헌법이 수호하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이고 핵심 가치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 네 편과 내 편을 갈라 나라를 분열시키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고 했다"양석조 부장검사는 "(피고인들은) 문화예술인의 생계와 직결되는 보조금까지 무조건 배제했고, 그 규모는 1만 명 남짓이며 실행방법은 졸렬하고 폭력적이었다"고 지적했다. 또 김 전 실장 등이 "합법 절차를 모두 생략하고 이유를 철저히 함구해 이의 제기를 사전에 봉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며 "반성하지 않고, 명백한 증거에도 전혀 (범죄사실을) 몰랐다고 부인하는 피고인들에게 마땅히 중형이 선고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검은 이들과 함께 기소한 김상률 전 수석은 징역 6년, 김소영 전 비서관은 징역 3년에 처해달라는 의견을 냈다. 또 오전에 열린 블랙리스트 사건 또 다른 재판에선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정관주 전 1차관, 신동철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에게 블랙리스트 관리에 관여한 책임을 물어 각각 징역 5년을 선고해달라고 했다. 이 사건들을 모두 심리해온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는 7월 27일 오후 2시 10분에 7명의 선고 공판을 함께 진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