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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줘야 하나?"

주변에서 잘 이해가 안 된다고 물어보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그때마다 난감해지고 당혹스러워진다. 나로서는 너무도 지당한 이유를 굳이 논리와 근거를 대며 설명해야 하는 수고와 노력은 부질없고 또 공허하다. 때로 4차산업혁명을 맹신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악의적인 시비나 논쟁에 엮인 듯 고역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런 의도와 종류의 질문은 마치 소수 진보당원에게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의 필요성을 묻는 상황과 유사하지 않은가. 나아가 민주공화국에서 살아가는 민주시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준법의 당위성을 따지는 반항적인 학생을 마주친 기분이 들지 않는가. 하지만 답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윤리적인 사회 선생의 입장처럼 어렵기만 하다. "인간이 왜 정의롭고 도덕적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굳이 물어봐야 하나. 굳이 설명을 해야 알아듣는가.

"왜, 기본소득을 농민에게 줘야 하냐"고?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전혀 복잡하거나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문제다. 농민이 농사를 지어서 먹고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농업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농업인은 농업소득만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어렵다. 농민이 농촌에서 먹고 살 수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폐농, 이농으로, 생업의 막장으로 내몰린다. 결국, 도시 난민이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해 사회적 문제의 원인과 현상이 된다.

결과적으로 농민의 이농은 농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문제, 국가의 문제로 확전된다. 7,80년대 질풍노도의 공업화, 도시화 시기를 거치면서 1천만 명의 난민이 몰려 살고 있는 수도 서울, 국민의 절반 이상이 몰려 사는 수도권의 말기적 구조 악의 현실을 직시하라.

지난 대선에서 정의당 심상정후보는 '농민수당'을 핵심농정공약으로 내걸었다.
▲ 공약 지난 대선에서 정의당 심상정후보는 '농민수당'을 핵심농정공약으로 내걸었다.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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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정책이 아닌 도시 난민 방지책, 국가균형 발전책 

"아니,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기 어렵다고? 그렇다면 굳이 농민이 농사를 계속 짓는 이유가 뭐야? 다른 살길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농민의 처지나 심정을 도저히 알 길 없는 일반적인 도시민이나 평균적인 노동자들의 몰이해와 궁금증은 끊이지 않는다. 그 대답도 역시 단순명쾌하다. 모든 사람은 안 먹으면 죽으니까. 그래서 국민의 생명과 생존을 보장하는 농산물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의 공익적 소임, 사회적 책무는 결코 게을리하거나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아가 국민의 식량기지, 인류의 생명창고인 농촌을 농민들이 등지고 떠나면 안 되니까. 농민이 지키는 식량주권이야말로 자주독립국가의 주권, 국민의 생명권을 보증하고 담보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순정한 농민이 아닌 상업적인 기업이나 사사로운 장사꾼이 효율적으로, 경쟁적으로 농사를 지으면 그건 농업이 아니라 공업이고 상업이고 서비스업으로 변질되어 버리니까. 자본을 추구하는 물욕이야말로 농업을, 농촌을 망치는 병원균, 원흉이니까.

"그런데 왜, 농민에게만 주어야 하나? 도시 노동자, 도시 빈민도 먹고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인데?"

때로 농민 기본소득에 대한 의구심은 이렇게 증폭되기도 한다. 기다리던 좋은 질문이다. 그럴 줄 알고 이미 충분히 준비된 답이 있다. 인간적으로 안타깝지만, 미안하지만, 도시민에게는 주지 않는 게 좋겠다. 농촌을 떠나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한 도시 난민들은 당장 농촌으로, 지역으로 하방 해야 한다. 어서 고향의 정처로, 지역의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가야 한다. 농촌에 내려가서 스스로 농민으로 전향하면 당당히 농민 기본소득의 정상적인 수혜자로 동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농민 기본소득은 도시민으로 하여금 그동안 망설였던 그리운 귀향, 자발적 하방의 불안감과 공포를 해소해주는 절묘한 약효를 발휘할게 되는 것이다.

결국 농민 기본소득 제도의 진실은 오로지 농민을 편향적으로 우대하려는 게 아닌 것이다, 도시민을 역차별하자는 게 아니다. 농업이나 농촌지역에 특혜를 주려는 건 더욱더 아니다. 농민과 도시민이, 생산자와 소비자가 농도상생하자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과밀한 도시인구를 과소한 지역으로 분산 재배치, 국토의 균형 발전을 촉발하고 견인하는 전향적 투자지원정책으로 얼마든지 기능하는 것이다. 기본소득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독일 등 EU(유럽연합)의 농가 직불금도 결국 농민의 이농으로 인한 도시빈민화, 도시과밀화를 차단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국민의 2%가 농민이지만 60%가 농촌에 사는 독일의 농업 직불금 제도는, 국토의 균형 발전과 지역의 분권자치를 위한 합리적 정책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한국농촌사회학회 2017년 춘계학술대회에서 충남연구원 박경철책임연구원이 농민기본소득 제안을 발제하고, 필자가 토론했다.
▲ 농촌사회학회 한국농촌사회학회 2017년 춘계학술대회에서 충남연구원 박경철책임연구원이 농민기본소득 제안을 발제하고, 필자가 토론했다.
ⓒ 한국농촌사회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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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농민의 헌신과 희생을 보상해야

 "그런데 과연 농민 기본소득이 농정의 문제를 푸는 만능열쇠, 만병통치약일까?"

그래도 농민 기본소득제에 대한 불안과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게 얘기하는 정책가나 정치인이 있다면 무지하거나 틀림없는 사기꾼이다. 그런 묘약은 선거 입후보자의 공약이거나 위약 또는 독약이 분명하다. 기본소득만으로 농민의 민생고, 농정의 실타래를 풀 수는 없다. 기본소득과 더불어, 마땅히 무상교육, 무상의료, 안정 고용, 사회 주거 등의 기본적 사회복지서비스가 선행, 병행되어야 한다. 법, 정책, 제도 이전에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이라는 아늑한 울타리와 비빌 언덕이 강고하게 구축되어야 한다.

그래야 신뢰, 규범, 협동, 연대, 네트워크 등의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비로소 농촌마을공동체에 두텁게 축적될 수 있다. 비로소 그 토대 위에서 농민 기본소득제 같은 법, 정책, 제도 등이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정상 작동할 수 있다. 아무리 국회와 정부에서 법과 정책을 양산해도 농촌에서 농민들이 수혜 효과를 체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한국에서는 사회안전망의 울타리와 사회적 자본의 토대가 너무도 부실하거나 부재하기 때문에 아무리 법, 정책, 제도를 양산해도 농민의 농촌 생활공동체의 현장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돈을 얼마나, 어떻게 줘야 기대효과를 얻을 수 있나?"

이것에 대한 답으로 농민 기본소득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수백만 명의 농민 또는 농촌주민에게 일괄적으로 지급하자면 수조원 이상의 천문학적 예산이 소요되리라는 걱정을 하는 이들이 많다. 그 예산이 결국 자기가 내는 세금이라 남의 일이 아닌 이해관계자로서의 관심과 우려인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돈은 얼마든지 있다. 또는 필요한 만큼 재원은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 돈의 공급량이나 기술적인 집행 방법이 중요하거나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기본소득의 실행 가능 여부는 재원 방법에 달려 있다기보다, 법의 제정과 예산 집행의 결정권을 가진 국가와 정부의 실천의지와 결단에 좌우된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돈을 많이 주고 적게 주고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한번 상상해보라. 매달 정부로부터 기본소득이라는 월급을 받는 농민의 생활상을. 한 달에 10만 원을 받든, 100만 원을 받든 '국가와 정부가 돌보고 보살펴주는 농민'들은 이전과 다른 놀라운 의식과 태도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선 "국가와 정부와 사회가 드디어 농민을, 국민과 동등하게 챙겨주고 보살펴주는구나" 하는 안도감, 신뢰감이 생길 것이다. 이어 이타적, 능동적, 창조적, 공익적으로 사회적 자본을 무한 생산하는 사회적 농민, 민주적 국민으로 거듭 태어나려는 마음가짐과 의욕이 저절로 솟아날 것이다. 몰락한 사회와 부패한 국가를 개조하는 데 기꺼이 동참할 자세를 기꺼이 갖추게 될 것이다. 농민 기본소득의 직접적인 효과는 일단 이 정도면 되지 않겠는가. 

농민 기본소득에 상응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독일 바이에른주의 '문화.경관 직불금'을 설명하는 히머 前 켐텐시 농업국장
▲ 독일 직불금 농민 기본소득에 상응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독일 바이에른주의 '문화.경관 직불금'을 설명하는 히머 前 켐텐시 농업국장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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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은 기업의 경제학이 아닌 국가의 사회학으로 

그렇다. 지금 다른 방법이 없다. 농민 기본소득 말고 '농업의 종말', '농촌의 사멸'의 대재앙을 멈출 방법은. 오늘날 우리 농업과 농민은 나라 밖에서 초국적 곡물메이저를 앞세운 열강의 무차별적 자유무역협정으로 쓰나미 같은 직격탄을 맞아 휘청거리고 있다. 안으로는 늙고 병들고 가난한 농민들은 그동안 이명박 정부의 기만적 농업 선진화 방안, 박근혜 정부의 허구적인 창조 농업 등 농정당국의 농업 생산력과 부가가치 제고, 국제경쟁력 창출의 선동과 겁박에 시달렸다.

1960년대 제3공화국 민주공화당의 농업기본법 이래 60년 가까이 살농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한국 농정당국의 핵심 미션은 기업화, 산업화, 규모화'일 것이다. 농업 선진화, 농촌지역개발, 6차 산업, ICT 융복합 농업, 스마트 농업 등 현란한 수사와 장식의 농정 구호에서 일관된 방침과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글로벌경제시대에 규모화, 집단화, 공업화를 통해 국제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그런 국제적 시장 질서까지 고려해 수립한 거시 농정의 특혜를 받을만한 농민, 농업법인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2016년 말 기준으로 106만 호 정도 잔존한 우리 농가의 평균 농지 보유 면적은 1.56ha에 불과하다. 그나마 1ha 미만인 농가는 전체 농가의 65%가 넘는다. 평균 농업소득은 1006만 8000원이다. 그나마 농업소득1000만 원도 안 되는 농가가 역시 65%, 70만 가구에 달한다. 농가인구의 40%가 65세 이상의 노인이다. 그러니까 한국 농부의 표준형은 1.5ha의 농지에서 농사를 지어 한 해에 1000만 원을 버는 영세 고령농의 처지인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소농이란 농사만 정직하게 지어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사회취약계층의 표본집단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런 열악한 소농의 생활현장에서 '돈 벌어 부자 되는 농업'이나 '고부가가치 고소득 첨단농업' 같은 농업경제학의 전략과 방식은 대다수 한국 농민들에게 궤변이나 거짓말로 오인받기 십상이다. 소농, 가족농, 고령농이 지배하는 생계형 농업 구조에 매달린 한국 농업의 현실에 기업농 중심의 상업농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렇다고 농업은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포기해서도 안 된다. 국가의 기간산업이고 생명산업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자주권, 국민의 생존권이 다 농업에, 농민의 손에 달려있다. 휴대전화와 자동차를 조리해서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사 휴대전화와 자동차를 아무리 많이 내다 팔아도 곡물메이저가, 초국적 자본이, 세계열강이 식량을, 먹을거리를 내주지 않는다면 바꿔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온 국민이 식량주권을 상실한 약소국의 무력감과 모멸감 속에서 굶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 '기본소득'과 더불어 물고기 잡는 법 '먹고 사는 생활기술'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 곡성군의 어린이 직업체험관 드림하이센터.
▲ 곡성 어린이직업체험학교 물고기 '기본소득'과 더불어 물고기 잡는 법 '먹고 사는 생활기술'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 곡성군의 어린이 직업체험관 드림하이센터.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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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세금으로 월급 주는 공익 농민으로

그래서 농업은 국가 기간산업으로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교통, 에너지, 보건의료, 교육, 주택 등처럼 국가 경제의 사활에 영향을 끼치는 산업이 농업이다. 따라서 농지, 생산 기반 시설, 농기업 등 농업 인프라를 국유화·공유화할 이유는 충분하다. 오로지 기업농이든, 중소농이든 무한 경쟁의 민간시장에 농업의 운명을 떠맡기는 건 무책임하고 위험하다는 경고와 교훈도 이미 주변에 넘친다. 국가 기간산업 농업을 살리자면 당연히 국가와 정부가 나서야 한다.

가령 '국가 기간산업인 농업에 복무하며 식량주권 지키는 농민에 대해 준공무원 대우를 하고 월급을 지급하는 일종의 국가책임 공익농민제도'를 도입하자는 진보적 제안은 충분히 합리적이고 효과적이다. 이를 통해 농업과 농민의 사회적 지위향상, 신규농업인력 유입, 소득안정 등의 정책적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농업의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인 다원적 가치는 사회공익 행위로서 존중되고 대접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농업에 있어 진보는 모두 노동자로부터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토양으로부터도 약탈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며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적 농업'을 극복하는 '합리적인 농업'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또 "자본주의 체제는 합리적 농업과는 역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고, 합리적 농업은 자본주의 체제와는 양립 불가능(설령 자본주의 체제가 농업에 있어서 기술발전을 촉진시켰다고 해도)하다"며 "합리적인 농업에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밭을 경작하는 소규모 농민 또는 연합한 생산자들을 관리해 가는 것"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나라 안팎으로 기본소득 논의와 운동이 활발하다. 핀란드가 전 국민에게 월 80유로(약  10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고, 위트레흐트를 비롯한 네덜란드 일부 도시가 조만간 제한적인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할 예정이다.  미국, 독일 등에서도 기본소득 운동이 활발하다. 브라질은 일찍이 시민 기본 소득제를 입법화했다. 특히 스위스에서는 모든 성인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자는 '기본소득제' 국민 발의 법안이 의회에 제출됐다. 취업 여부나 소득 수준 등에 관계없이 전 국민에게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기본소득을 국가가 지급하자는 것이다. UNESCO의 지원을 받은 인도는 농민 기본소득의 효과를 성공적으로 검증했다.

일본은 '취농급부금지원제도'를 통해 젊은 귀농인에게 정착금 용도로 한시적·조건부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농가의 고령화와 영농 후계자 부족이 심각해지자 의욕 있는 젊은 층을 끌어들여 농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다. 농업을 새로 시작하는 사람(45세 미만)에게 연수기간 2년과 농업 개시 후 5년 등 최장 7년간 해 마다 150만엔(약 2천200만원)씩 최대 1천50만엔(약 1억5천400만원)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연간 소득이 250만엔을 넘거나 농업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지원이 중단된다. 

EU(유럽연합)의 모든 회원국도 '청년농업인 직접지불금(Young Farmers Direct Payment)'을 시행하고 있다. 취농 5년 이내이고 39세 이하인 신규취농자에 대해 기본 직접지불액의 25% 상당을 최대 5년간 증액 지급한다.

농사를 짓든, 농사를 짓지 않든 누구나 먹고 살 수 있는 농촌이라야 아름답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농촌의 삶이 가능하다.
▲ 순천 유경마을 농사를 짓든, 농사를 짓지 않든 누구나 먹고 살 수 있는 농촌이라야 아름답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농촌의 삶이 가능하다.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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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만 사회적 농민에게 농민 기본소득을 

최근 한국도 기본소득의 변방, 사각지대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이 활발하다. 기본소득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녹색당 등 진보 정당은 핵심 정책으로 기본소득을 내건 지 오래이고, 마침내 지난 대선에서는 정의당 등의 유력 대선후보들이 농민 기본소득, 청년 배당 등 기본소득을 핵심 공약으로 약속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구체적으로 기본소득 위원회를 설치, 작동될 전망마저 기대된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이미 기본소득이 더 이상 소수의 상상과 소망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온 것이다.

특히 농민 기본소득제는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주요 의제로, 구체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수호하는 농민이 농촌을 떠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소득을 보전해주자는 선의와 명분이 다중의 설득력과 합리성을 확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실효성이 부족한 기존 농업 직불제의 한계와 폐해를 극복하려는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현행 4% 대의 농가 소득 대비 직불금은 농가소득을 보전하기에는 무기력하고 무의미하다. 농가소득의 50%~90%까지 보전되는 독일, 스위스 등 유럽 선진농업국의 직불금 지원책에 견줄만한 실질적 농업소득 보전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농민 기본소득이 농업소득의 빈 자리를 대신 채울 수 있다.

물론 '농민 기본소득제 공익 농민 월급형 기본소득제 실행모델 개발'(정기석, 2014년 9월, 충남연구원)은 도시민, 노동자, 소비자 등의 국민들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제도라도 발효와 숙성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단계별로, 시범적으로 제도를 시행하면서 전체적인 일정과 강도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 가령 단기적으로는 18~50세의 청장년 10만 명에게 5년 이상 150만 원씩 월급을 지급하는 '청년 공익 영농 요원제'는 어떤가. 기본소득제에 대한 일반 국민의 여론과 주의를 환기, 본격 도입의 단초나 발판을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광역 또는 기초 지차체 등 특정 지역농업 단위로 범위를 한정해 일단 시범사업으로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단계에서는 '영세농 기초 생활 연금제', '고령농 기초 생활 연금제'도 고려해볼 수 있다. '영세농 기초 생활 연금제'는 소득 인정액 하위 30%의 영세농에게, '고령농 기초 생활 연금제'는 65세 이상 고령농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각각 90만 명에게 월 50만 원씩 지급한다면 연간 예산은 각각 5조 4000억 원이 소요된다. 현행 기초연금제도가 일종의 노인 연금제라면, '영세농 또는 고령농 기초 생활 연금제'란 일종의 농민 연금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개념과 차원의 '공익 농민 기본소득제'는 모든 농민이 수혜 대상이다. 2016년 말 기준 약 250만 명의 농민(농가인구)에게 월 50만 원씩 무조건, 무기한 지급한다면 연간 예산은 15조 원 정도가 필요하다. 2017년 농림부 예산은 14조 4887억 원이다. 과연 그 돈은 우리 농민을 위해 합리적으로, 효과적으로,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가. 물론 농림부 예산을 기본소득 예산으로 단순하게 전용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기본소득 재원은 별도로 추가 조성해야 한다. 이때 수급 주체를 농민 단위가 아니라 농가 단위로 산정하거나, 농민에 국한하지 않고 농촌 주민 전체로 확장하는 방식도 얼마든지 고려해볼 수 있다.

거듭 주의를 환기하자면, 기본소득의 정신은 '놀고먹는듯한 베짱이' 마저 국민이니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베짱이가 기본소득을 받으면 능동성과 이타성이 늘어나 '열심히 일하는 개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개미 중의 개미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하는 이유를 더 설명해야 하나. 공익 농민 기본소득은, 농민들이 농사로 돈을 벌어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이기적, 고행적 상업농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준다. 사람과 자연을 살리는 이타적이고 창조적인 공익 농사를 짓는 사회적 농부로 자유롭게 해준다. 사람이 돌아오는 농촌, 사람 사는 세상을 앞당긴다. 결국 도시도 살리고 국가도 살린다. 틀림없다.

덧붙이는 글 | * 정기석 : 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 전국귀농운동본부 귀농정책연구소 정책분과장



태그:#농민 기본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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