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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고리 1호기 영구정지 기념사에서 탈원전을 통한 국가 에너지 정책 대전환을 선언했고, "신규 원전 건설계획을 전면 백지화하겠다"고 말했다. 곧이어 27일에 정부는 현재 건설되고 있는 신고리 5·6호기의 공사를 잠정 중단하기로 했으며, 공론화 작업을 거쳐 완전 중단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같은 정책적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국내 원전 현황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영구정지된 고리 1호기를 빼면 총 24기의 원전이 가동 중인데, 여기에 더해서 신고리 4호기(울산)와 신한울 1·2호기(울진) 등 3기가 공정률 90% 이상으로 건설이 거의 완료된 상태다. 결국, 전체 27기가 향후 우리나라에서 가동되는 원전으로 일단 '확정'된 셈이다(원전도 수명이 있기 때문에, 고리 1호기처럼 오래된 원전부터 수명이 다하면 차례로 정지된다).

이번에 정부가 공사 중단을 발표한 신고리 5·6호기는 공정률이 지금 30% 미만이어서, 사회적 합의만 된다면 건설 자체가 완전히 중지될 수 있다. 그리고 이보다 뒤에 건설 준비를 시작한 신한울 3·4호기(울진), 천지 1·2호기(영덕) 및 부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2기 등 총 6기는 문 대통령의 신규 원전 건설계획 전면 백지화 선언에 따라 계획 자체가 '없던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국내 원전 실태(2017년 7월 현재)
 국내 원전 실태(2017년 7월 현재)
ⓒ 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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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리하자면 이전 정부에서 (고리 1호기를 포함한 기존 25기 외에) 새로 건설을 추진했던 총 11기의 원전 계획 중 3기는 이미 공사가 90% 이상 완료됐고(신고리 4호기, 신한울 1·2호기), 다른 6기에 대한 계획은 현재 백지화를 앞두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9기를 빼고 나면 결국 남는 건 2기(신고리 5·6호기)뿐이고, 이의 건설은 지금 시점에서 제일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신고리 5·6호기(설계수명 60년)의 건설이 완료되느냐 중지되느냐에 따라, 한국에서 더 이상 원전이 건설되지 않는 시점도 달라질 뿐만 아니라 향후 탈원전의 완성 시기 자체가 변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전을 찬성하는 쪽이든 반대하는 쪽이든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여부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고, 우리가 현시점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바로 이를 결정할 재판이 6월 29일 오후 4시에 서울행정법원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재판에 앞서 그린피스와 '560 국민소송단'이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2017/06/29)
 재판에 앞서 그린피스와 '560 국민소송단'이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2017/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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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리 5·6호기 건설허가 처분 취소소송의 의의

부산과 울산에 걸쳐 있는 '고리 원전단지'는 지구촌에서 현재 가동되고 있는 원전단지 중에 세계 최대 규모이고, 고리에만 무려 7기의 원전(고리 1~4호기, 신고리 1~3호기)이 가동되고 있다. 이 중에서 원래의 설계수명 30년(1977년 완공)에서 무려 10년을 더 초과 가동했던 고리 1호기가 이번에 영구정지 됐고, 건설이 거의 완료된 신고리 4호기는 곧 가동 준비에 들어갈 것이다.

영화 <판도라>(2016)에서 참담한 폭발이 일어난 한별 원전의 실제 모델이 바로 고리 원전이고, 일본 후쿠시마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원전사고는 치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대재앙이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대 규모의 원전을 보유한 동시에 지구촌에서 원전 밀집도 역시 1위인 국가다(밀집 원전단지 상위 10개 중에 4개가 우리나라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정부에서는 노후원전 연장가동과 새 원전 건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말했듯이 고리 원전단지 30km 반경 내에는 무려 380여만 명(부산 248만, 울산 103만, 경남 29만)이 살고 있는데, 안 그래도 최대 규모인 기존 7기에 더해서 2016년 6월 23일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신고리 5·6호기의 건설허가를 승인한다. 이에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Greenpeace)와 전국에서 모인 559명의 시민들(560 국민소송단)은 9월 12일 건설허가 취소 소송을 제기한다.

세계 원전 단지별 밀집현황(2016년 12월 1일 기준) - 자료 출처: 국제원자력기구(IAEA) PRIS 데이터 활용.
 세계 원전 단지별 밀집현황(2016년 12월 1일 기준) - 자료 출처: 국제원자력기구(IAEA) PRIS 데이터 활용.
ⓒ 그린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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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펴본 것처럼 공사가 거의 완료된 원전 3기를 곧 가동하고, 건설예정 6기를 백지화하면 남는 건 신고리 5·6호기뿐이다. 각각 2021년과 2022년에 완공 예정인데, 다들 알다시피 문 대통령의 임기가 2022년까지다. 그러므로 신고리 5·6호기가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문재인의 탈원전 공약 이행 여부도 판가름 나는 셈이다. 일단 공사는 잠정 중단됐지만, 원전 이해당사자들이 건재한 상황에서 새 원전의 건설을 막기 위한 재판은 여전히 중요하다.

국내 최초의 원전 건설허가 취소 소송(사건번호: 서울행정법원 2016구합75142)은 원고가 그린피스 외 559명이고, 피고는 원자력안전위원회다. 첫 번째 재판이 6월 29일에 있었고, 두 번째는 8월 17일 오후 4시에 서울행정법원에서 열린다. 나는 560 국민소송단 중 한 사람으로서 직접 첫 재판을 참관했고, 원고 · 피고 · 재판부 사이에 오갔던 주요 쟁점들을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상식적인 수준에서 쓰겠지만, 이 재판은 그 성격상 복잡하고 전문적인 내용이 어느 정도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첫 번째 재판이었던 만큼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따지기 이전에 기본적인 사항을 확인하는 데에 주력했고, 재판 소요시간도 짧았다. 여러 가지 다양한 얘기가 오갔지만, 최대한 압축해서 주요 쟁점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크게 두 가지다.

1. 원고적격 여부

새로 원전이 건설된다고 했을 때, 이로부터 영향을 받고 이해당사자가 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까지로 봐야 할까? 최소한의 범위인 원전 반경 4km 내에 사는 주민? 아니면 원전사고가 발생할 시 인체에 치명적인 방사성 물질들은 반경 30km 내에 떨어지니까(체르노빌과 후쿠시마 둘 다 피난 구역으로 30km가 설정) 이 범위 내의 주민들은 다 포함되나? 이것도 아니라면 원전 건설에 세금이 사용되고 만일 사고가 발생하면 전 국민이 피해를 받으므로, 모든 국민이 당사자로 인정될까?

고리원전 반경 30km 내외 주요 경제 구역.
 고리원전 반경 30km 내외 주요 경제 구역.
ⓒ 그린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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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리 5·6호기 건설허가 처분 취소소송 첫 재판에서도 가장 먼저 원고적격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소송은 그린피스 외 559명이 '원고'인데, 이들은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다(난 서울시민이다). 과연 이들이 모두 원전 건설허가 취소 소송을 제기하기에 필요한 자격을 가진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문제였다. 쉽게 말해, 서울에 사는 내가 울산에 있는 원전의 건설을 막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하여 원고와 피고 사이에 논란이 된 것이다.

만약 원고적격이 없는 자의 소송이라면, 그대로 각하(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하여 내용에 대한 판단 없이 곧바로 재판 종료) 처리된다. 그래서 재판부는 본격적인 심사에 앞서 원고 측 변호인을 향해, 560 국민소송단 각 참여자들의 주소를 바탕으로 원전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지를 거리별로 분류해서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아마 8월에 열리는 두 번째 재판에서 이에 대한 확인이 있을 테고, 원고적격 여부에 관한 본격적인 다툼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재판에 앞서 그린피스와 '560 국민소송단'이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탈핵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2017/06/29)
 재판에 앞서 그린피스와 '560 국민소송단'이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탈핵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2017/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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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적격을 판단하는 데에는 '법률상 이익'이 중요한데, 보통 환경분쟁과 관련한 재판에서는 법률상 이익을 탄력적으로 해석해서 원고적격의 범위를 넓게 인정하는 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피고인 원자력안전위원회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원고의 수가 많은 것보다는 적은 게 나으므로, 이 문제를 피고가 얼마나 완강하게 주장하느냐에 따라 재판 진행은 좀 영향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2. 소급적용 여부

한전의 자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신고리 5·6호기 건설허가 신청을 한 시점은 2012년 9월이고,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가 건설허가 승인을 의결한 시점은 2016년 6월이다. 그 사이에 원전과 관련된 상당히 많은 법 개정이 이뤄졌고, 관련법들은 전 세계적인 탈원전 움직임에 발맞춰 대체로 이전보다 더 엄격해진 편이다.

그렇다면 신고리 5·6호기는 한수원이 신청한 시점의 법(개정되기 전 규정) 적용을 받아야 할까, 아니면 원안위가 승인한 시점의 법(개정된 후 규정) 적용을 받아야 할까? 3년 9개월 정도의 시차가 있는데 여러 법률과 하위 규정들이 그동안 많이 변경되었으므로, 이 부분이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따라 건설허가 처분 취소소송에서 실제 재판의 양상은 크게 달라지게 된다.

사실 560 국민소송단이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건설허가 처분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논리의 상당 부분은 개정된 규정에 근거한 것이므로, 원안위 승인 시점의 법이 적용되어야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법으로 막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원전을 반대하는 시민의 입장에서도 좀 더 국민 안전을 중시하고 상대적으로 엄격한 법을 적용하는 게 시대적 흐름에도 맞고 문재인 대통령의 탈원전 선언과도 부합한다.

반면 한수원이나 원안위 입장에서는 현재 거의 유일하게 건설 중인 원전이 완성되길 바랄 테고, 향후 본인들의 책임 회피를 위해서라도 건설허가 신청 시점의 법 적용을 바랄 것이다. 첫 번째 재판에서도 실제로 피고 측 변호사들이 했던 말을 단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거다. "법대로 하자." 그래서 약 1시간 정도 이어진 재판에서 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법을 위반했는지가 불분명하다"는 취지로 변론을 펼쳤다.

언뜻 들으면 행정소송에서의 합리적인 지적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얘기인지 금방 알게 된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물론이고, 2016년 9월 경주 대지진을 겪으며 모두가 실감했듯이(지금까지 10개월째 총 620회가 넘는 여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전국 곳곳의 원전 고장 사태에서 보듯이, 최근 몇 년간 '원전 사고'는 우리가 직접 체감하고 위협을 느낄 정도로 바로 옆에 가까이 와있다. 그래서 수년 동안 다수의 법 개정이 이뤄졌던 것이고, 마침내 대한민국은 탈원전을 통한 국가 에너지 정책 대전환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설계수명 60년인 신고리 5·6호기가 완성되면 그만큼 대전환은 늦어지는 셈이고, 그만큼 후손에게 더 짐을 지우게 된다. 원전에 대해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은 더 이상 원전을 새로 건설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건 다른 그 무엇도 아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고, 이를 지키기 위해 개정된 법 규정이 원전 허가 과정에도 적용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신고리 5·6호기 건설 취소소송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태그:#원전, #건설허가, #취소소송, #서울행정법원, #그린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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