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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부분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땅에는 집이 있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여러 곳들이 공간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던 곳이나 공간을 현재에 그치지 않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기억에 담아 보관합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더불어 같이 살았던 우리나라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은 어떤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박정석 교수님(목포대학교 문화인류학과)이 쓰신 <식민 이주 어촌의 흔적과 기억> 겉표지입니다.
 박정석 교수님(목포대학교 문화인류학과)이 쓰신 <식민 이주 어촌의 흔적과 기억> 겉표지입니다.
ⓒ 서강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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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박정석 교수가 쓴 <식민 이주 어촌의 흔적과 기억>은 식민지의 흔적을 찾아나간 기록입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일제의 흔적과 그것에 대한 한국 사람·일본 사람의 기억을 적고 분석했습니다.

박정석 교수와 그 연구자 일행이 조사를 통해 밝혀보고자 한 곳은 포항 구룡포 일본인촌, 울산 방어진 히나세촌, 거제 장승포 이리사촌, 거제 구조라 오우시마촌, 통영 도남동 오카야마촌, 통영 욕지도 자부포, 고흥 나로도 축정, 여수 거문도 일본촌 등 한반도 남부 여덟 곳입니다.

이곳은 일본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어업을 비롯해 여러 가지 사업을 했던 곳입니다. 이곳은 (거문도를 빼고) 일본 특정 지역에서 집단으로 왔기 때문에 마을 이름도 일본 것을 따라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살았던 바닷가 해안 마을을 찾아 일본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찾아서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그곳을 기억하는 두 나라 사람들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 뜻을 입장에 따라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살다가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던 일본 사람들을 찾아 일본 현지 방문 조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인류학 방법론으로 그 결과를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이곳들은 1910년 한일 이전 조선조 초기부터 일본에서 자주 들락거리며 불법으로 바다 물고기를 잡아가고 노략질을 일삼던 곳이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왜구들이 우리 바다에 와서 노략질을 하거나 무단으로 고기를 잡아갔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로 일본정부나 일본 지방정부 혹은 수산물 관련 단체의 경제적 지원으로 당당하게 들어와 수산물을 싹쓸이 하여 일본으로 가져 갔습니다.

일부 눈치 빠른 일본 사람들은 고기 잡이를 포기하고, 고리대금업이나 선박 운송 따위로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어선과 어구를 마련해 한반도로 진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싼 노동력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했습니다.

1920년대 일에 따라서 다르지만 우리나라 사람 선원 한 명 월급이 15엔 정도였다고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것은 같은 일을 하는 일본 사람의 반에서 60퍼센트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제의 한반도 식민 정책 속에서 해안 마을 정착은 일제의 치밀한 계산과 경제적 타산에 따라서 이뤄졌다고 합니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자로 높은 자신의 위치와 태도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려했습니다. 일본 사람들 마을 입구에 지서를 배치하여 통행인이나 출입자를 감시하고, 일본 사람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필요한 분쟁이나 다툼을 없애기 위해서 마을을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마을은 중심가나 바닷가에서 먼 곳에 자리잡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우체국이나 신사, 절 따위를 세워서 자신들만이 통신 정보를 장악하고, 경제적 신앙적 결속을 강화하기도 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일제는 식민 정책을 굳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했습니다. 일본 초등학교에서는 일본 아이들만 가르치고, 우리나라 아이들은 입학을 금지시키기도 했다고 하니까요.

당시 일본은 어부들이 포화상태였고, 세토나이카이를 중심으로 남획해서 어획량이 감소했습니다. 이것을 돌파하기 위해서 일본은 한반도 근해로 물밀듯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특히 한반도 남해는 지형이 일본과 비슷하고, 생선 종류도 비슷하여 큰 수고 없이도 수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섬나라로서 바다에서 물고기 잡은 기법이나 도구가 우리보다 앞섰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앞선 어로 기술과 선박 제조 운용 기술, 자본을 앞세워 우리의 해양 자원을 싹쓸이해 갔습니다. 그 흔적 하나 하나를 지금 남아있는 강점기 때 흔적과 기억을 통해서 재해석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그때 흔적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들과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뜻을 지니고 있을까요? 현재 남아있는 일제 때 지은 건물이나 도로, 기념물들은 모두 온전하지 않습니다. 일부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곳도 있지만 오래되고 낡아서 사라진 곳도 많습니다.

몇 년 전 김영삼 정부 때 광화문에 있던 총독부 건물을 없앴습니다. 지금 오랜 시간을 두고 경복궁을 재건하고 있습니다. 일제는 경복궁에 있던 건물을 없애고 산업 관련 행사를 열거나 새로 길을 내면서 경복궁 터를 조각내기도 했습니다.

창경궁은 동물원으로 만들어서 창경원이라고 했습니다. 왕궁을 동물원으로 짓밟아서 조선왕조의 권위를 짐승으로 취급했습니다. 지금은 복원되었지만 창경원은 동물원으로서 해방 이후 한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일제가 36년 동안 우리나라를 지배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단순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남아있는 흔적, 장소가 지닌 기억과 기억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입장이나 처지, 옛 기억에 따라서 천차만별입니다. 이들을 다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여덟 곳이지만 어촌 마을을 중심으로 직접 일제의 흔적을 찾고,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는 일은 일제 강점기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 박현국 기자는 일본 류코쿠(Ryukoku, 龍谷)대학 국제학부에서  일본 학생들에게 주로 우리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박정석 지음 <식민 이주 어촌의 흔적과 기억>, 서강대학교출판부, 2017.5



식민 이주어촌의 흔적과 기억

박정석 지음, 서강대학교출판부(2017)


태그:#박정석, #식민 이주 어촌의 흔적과 기억, #일제 강점기, #기억, 흔적, #어부 월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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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본에서 생활한지 20년이 되어갑니다. 이제 서서히 일본인의 문화와 삶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한국과 일본의 문화 이해와 상호 교류를 위해 뭔가를 해보고 싶습니다. 한국의 발달되 인터넷망과 일본의 보존된 자연을 조화시켜 서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교류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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