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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커지모 활동 당시 제작한 버튼
▲ Let's come out! 버튼 홍커지모 활동 당시 제작한 버튼
ⓒ 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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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커밍아웃을 했던 연예인이 자기 인생을 갈무리하는 에세이집을 냈다. 책을 소개하는 기사는 그의 47년 인생을 회고하는 인터뷰로 기록되어 있다. 기사는 그가 허심탄회하게 고백하는 살아온 날들을 문장으로 정리한다. 하지만 예의 이야기는 고독과 고통에 사무친 시간으로 기억을 소환한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울먹이며 커밍아웃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커밍아웃 이후 방송에서 퇴출되었다는 뉴스도 떠오른다. '대표 게이'라는 농담 같은 타이틀은 게이 연예인으로서 외로웠던 과거를 복기시켰고, 말마따나 고립은 그의 인생을 지치고 곪게 했다.

생각해보면 하수상한 시절이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집회 장소에 성 소수자 단체에서 활동한다고 말하면 희귀 성씨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성 소수자가 가시화된 이후에는 혐오와 폭력에 노출되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행동의 위험부담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당신의 커밍아웃은 성 소수자에게 침묵의 재갈을 물리던 사회에 날린 일종의 '기습시위'나 다름없었다. 커밍아웃은 사회에 파장을 일으켰고, 사회는 그 이상의 배제와 낙인을 당신에게 돌려줬다. 온전히 홀로 안고 갈 아픔이었을 테지만, 싸움은 당신의 회고처럼 혼자 짊어지고 가지만도 않았다. 성 소수자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생존의 위험을 담보하던 시간, 많은 성 소수자들에게 당신의 커밍아웃은 적지 않은 위안이 되었다. 성 소수자라는 이름 자체가 인생의 짐이던 시절, 나와 같은 성 소수자가 방송에 자신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되었다.

지금은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성 소수자 인권단체의 활동가들과 당신의 모습에 감화된 이들이 당신의 커밍아웃 직후 '홍커지모'(홍석천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모임)를 만들어 활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당신의 커밍아웃 이후 언어폭력과 차별에 몰리는 모습을 보고 곧장 거리에 나와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활동에 참여했다. 사무실 창고에 보관된 성 소수자 인권 캠프 사진에는 당신과 함께 수십 명의 성 소수자들이 여전히 빛나는 웃음을 짓고 있다.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행동은 성 소수자로서 나의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요구이기도 했다. 대개는 당신처럼 고립된 이들이거나 벽장을 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을 이들이었을 것이고, 이제 고립되지 말자고 당신을 지지하며 서로를 다독였을 것이다. 당신을 통해 힘을 얻은 이들의 존재가 당신에게도 힘이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말한다. 동성애가 사회에서 논쟁거리로 부각된 것 자체가 변화이자 기쁨이라고. 적어도 당신의 시계에 성 소수자 역사는 한고비를 넘긴 것처럼 보인다. 기습시위는 변화에 맞지 않는 잘못된 행동이라는 문장이 나온 것도 이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는 지금 이 순간, 변화를 기쁨으로 향유하기엔 갈 길이 멀다. 성 소수자는 여전히 찬반의 도마 위에 올라가거나 농락당하는 대상이다. 지금도 한국사회는 젠더규범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괴롭히고 부당 대우한다. 성 소수자들 중 HIV 감염인은 커뮤니티 안에서도 배제되기 쉽다. 이제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군대에서 색출되고 구속되며 범죄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가시화의 성과'라고 쿨하게 재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당신의 인터뷰가 나온 같은 날,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두고 '성(姓) 소수자 장관'이라고 농담했다. 성 소수자 의제에 지지는커녕 혐오와 차별선동의 민원에 눈치 보기 급급한 정당 대표의 발언이었다. 아직도 이들에게 성 소수자 의제는 나중의 문제요, 당장은 농담에나 거론될 대상일 뿐이다. 다시 물어보자. 무엇이 변했는가?

고독의 시간이 비대해지면 연대의 역사는 고립의 드라마 아래로 함몰한다. 당신이 가져온 변화의 끈들을 부정하지 않으면 좋겠다. 당신과 연대하며 싸운 이들의 많은 수가 성 소수자로서 인권이 당연한 것임을 알았을 것이고, 몇몇은 지금까지도 인권 보장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동성애가 싫다는 유력 대통령 후보를 찾아가 기습시위를 했던 이들은 17년 전 당신과 당신을 지지했던 성 소수자들과 다르지 않다. 기습시위를 잘못된 행동이라 부르는 것은 결국 사회에 당당히 커밍아웃했던 당신의 투쟁을 부정하는 것이다.

당신의 한마디는 많은 성 소수자들에게 생채기를 남겼다. 여전히 당신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변화에 경도되어 당장의 행동들을 평가절하하지 않고, 우리를 기억하자. 설령 당신의 에세이가 기억하는 동료들의 목록에 17년 전의 '우리'가 지워졌을지라도, 지금의 투쟁은 최후의 순간 십시일반 모인 연대의 신호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온 것임을 말이다.


태그:#홍석천, #커밍아웃, #추미애, #성소수자,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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